134화
“어여삐 보아 주세요. 폐하.”
릴리벳 크라우스가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객관적으로 아름다운 영애였다. 깔끔하게 일자로 떨어지는 검은 머리카락은 윤기가 났고, 녹색 눈은 마치 유월의 신록 같은 색이었다. 태도는 당당했으며 그린 듯한 기품까지 흘렀다.
하지만 아딜로트는 그녀를 냉담하게 일별할 뿐, 다시 크라우스 공작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꿍꿍이야?”
“꿍꿍이 같은 것은 없습니다.”
“예의는 그만 차리지. 우리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은 아니잖아?”
“…….”
잠시 침묵한 크라우스 공작이 찻잔을 내려놓고 무심하게 말했다.
“안정화를 위해서입니다.”
“안정화?”
“정계는 너무 요동치고 있습니다. 특히 이번 호흐실트 후작의 죽음……. 그라스 후작의 강등.”
공작의 녹색 눈이 예리해졌다.
“그리고 릴레 후작까지.”
“…….”
“저는 자존심이 그리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쯤 폐하와 손을 잡는 것도 좋겠다 판단했을 뿐입니다. 그게 설령 크라우스 공작가가 굽히고 들어가는 모양새더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공이 ‘무려 굽히고 들어가 준다’?”
“그러한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다만 폐하께서는 손해 보실 일이 없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아딜로트는 입을 다문 채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이 맞다는 것을 그는 빠르게 이해해 버렸다.
“공의 여동생이 가만 있지 않을 텐데?”
“황태후 폐하는 이미 크라우스 공작가를 떠났습니다.”
플로리안 크라우스가 냉랭하게 말했다.
“제 앞가림은 스스로 해야지요. 설령 크라우스 공작가가 폐하와 손을 잡고 그녀를 적으로 돌리는 일이 있더라도 말입니다.”
그 말에 요아힘의 연둣빛 눈에 이채가 스쳤다.
말인즉, 크라우스 공작가의 릴리벳과 혼인하면 크리소르를 내모는 것을 돕겠다는 뜻이 아닌가.
그렇게만 된다면 아딜로트의 모든 숙원이 이뤄진다.
“…….”
무서울 정도로 달콤한 제안이었으나, 아딜로트는 무심한 낯을 하고서 릴리벳을 돌아보았다.
“그대는?”
“질문의 요지를 모르겠습니다, 폐하.”
갑작스러운 질문에도 릴리벳은 차분하게 되물었다.
시종일관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짓는 그녀는 확실히 당장 황후가 되어도 어울릴 정도였다.
“이렇게 팔려가듯 혼인해도 괜찮으냐는 뜻이야.”
“문제가 될 게 없습니다, 폐하. 크라우스 공작가에 태어난 이상, 그게 제 역할이라면 해야겠지요.”
달리 말하자면 나도 너 썩 마음에 들진 않지만 가주가 시키니까 한다는 의미였다.
제법 당돌한 말에 아딜로트가 미미한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어쨌거나, 고려할 가치가 없는 이야기였다.
“미안하지만―”
그 순간, 요아힘이 끼어들었다.
“당장 결정하긴 어려운 이야기니 오늘은 그만 돌아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요아힘의 말에 크라우스 공작이 흘깃 아딜로트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굳은 얼굴로 침묵하고 있었다. 재상의 의견에 동의하지는 않으나 자신을 앞에 두고 있기에 내색하지 않는 듯했다.
‘여기서 더 말해 봤자 황제를 자극할 뿐이겠군.’
그렇게 결론 내린 크라우스 공작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게 좋겠군요.”
크라우스 공작은 릴리벳 크라우스를 데리고 집무실을 나갔다.
셋만 남자 아딜로트는 즉각 미간을 좁혔다.
“요아힘.”
“폐하. 받아들이십시오.”
“미쳤군.”
아딜로트의 일갈에도 요아힘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손해 볼 것이 없는 제안입니다. 크라우스 공작가는 황태후가 사라지면 정계 영향력이 줄어드는 것을 우려하는 것입니다. 이런 제안이 왔다는 건, 그만큼 저희가 에트루리나 일로 승기를 잡았다는 뜻입니다.”
“…….”
“크라우스 공작가의 영애와 혼인한다면 누구도 폐하를 업신여길 수 없습니다.”
“저 작자가 그렇게 순순히 내 밑으로 들어올 거라 생각해?”
“일단 한번 굽히고 들어온 이상 표면적으로라도 폐하께 권력을 양도할 것입니다. 그때 틀어쥐시면 됩니다.”
“가능할 리 없어.”
“가능합니다. 제가 도울 거니까요.”
아딜로트의 눈이 흐려졌다.
요아힘이 뭔가를 가능하게 하겠다고 말하면, 그건 분명 그렇게 되리란 것을 아딜로트는 모르지 않았다.
“게다가 여차하면 릴리벳 크라우스 양을 인질로 삼는 법도 있습니다. 일단 명분만 저희가 쥐고 있으면 휘두를 방법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요아힘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차가운 말을 내뱉었다.
그래도 아딜로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깊은 눈으로 요아힘을 바라보기만 했다.
잠시의 눈싸움 뒤, 요아힘은 다시 빙긋 웃으며 슐츠 공작을 돌아보았다.
“슐츠 공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슐츠 공작은 자신에게로 화살이 돌아오자 당황했으나, 이윽고 한숨과 함께 말했다.
“말을 들어 보면 그는 폐하께서 황태후 폐하를 처단하는 것도 도울 생각인 듯하더군요……. 저와는 관계 없지만, 그게 폐하와 지로티 공의 숙원이란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
“그러니 냉정하게 본다면 받아들이심이 옳습니다. 하지만…….”
슐츠 공작의 말이 흐려지고, 얼굴에는 낭패감이 떠올랐다.
그가 누굴 생각하고 있을지는 뻔했다.
“미아 님은.”
요아힘은 차가운 어조로 그 생각을 잡아 끄집어냈다.
“키토 후작가에 신병을 맡기시면 키토 후께서 잘 돌봐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그 순간 내내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만 있던 아딜로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쉬지.”
“폐하.”
요아힘은 머뭇거림 하나 없이 방을 떠나는 등을 향해 말했다.
“당신은 황제입니다. 오르퀘니나를 위한 선택을 하십시오.”
* * *
황제궁의 정원.
테이블 주위로는 세 사람이 둘러앉아 있었다.
“……해서, 크라우스 공작이 직접 찾아왔다고 들었네.”
루치아노 지로티 공작이 설명을 마쳤다. 그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미아를 흘끔거렸다.
“흐음!”
미아는 의미 모를 소리를 내뱉으며 크림치즈를 올린 복숭아 타르트를 한판째 마시는 중이었다.
“저, 미아. 폐하도 원해서 이런 일이 생긴 건 아닐 거예요…….”
옆에 있던 세레니티가 애써 수습하려고 나섰다.
하지만 미아는 멀뚱멀뚱한 세레니티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하기만 했다.
“흐음?”
그리고 다시 타르트를 먹기 시작했다.
“…….”
“…….”
지로티 공작과 세레니티가 땀을 삐질 흘리며 시선을 교환했다.
야 이거 보통 일이 아니다…….
그런 공동의 마음가짐이 눈빛으로 공유되었을 때였다.
미아가 대뜸 외쳤다.
“잘된 거 아냐?”
“네?”
“잘됐다구. 크리소르에게 손대기 어려웠던 게 뒤에 크라우스 공작이 있어서였는데, 힘을 합치면 크리소르는 금방 해치울 수 있잖아!”
미아의 말에 세레니티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미아. 진심이에요……?”
“응! 진심인데? 냉정하고 객관적이고 이성적으로 판단한 건데?”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는 눈에 초점이 없어요, 미아.
세레니티는 당황으로 말을 잊었고, 지로티 공작이 슬쩍 끼어들었다.
“이보게, 자네. 그…… 황제는 이혼이 쉽지 않다는 건 알고 있는 게지?”
“알죠.”
“그리고 정말로 황후가, 그것도 크라우스 공작가 출신 황후가 들어온다면 자네가 지금처럼 지낼 수 없다는 점도?”
“아는데요!”
“폐하와 헤어져야 할 텐데도?”
쿡. 카가가각.
미아의 포크가 위협적으로 타르트를 찍은 뒤 그릇을 긁었다.
그녀가 방긋 웃었다.
“진짜 알아요!”
“…….”
“…….”
지로티 공작은 눈앞의 토끼가 황제, 혹은 크라우스 영애의 목을 포크로 찍어 버리는 상상을 하고 몸을 떨었다.
미아는 그런 지로티 공작을 보고 심드렁히 포크를 내려놓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진 모르겠지만, 아딜이랑 할아버지가 원하는 걸 이룰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잖아요. 황태후의 사회적이고 물리적 몰락.”
“……그렇긴 하네만.”
지로티 공작이 떫게 말했다. 미아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거면 된 거죠. 애초에 폐하가 결혼한다는데 제가 거기다 무슨 말을 하겠어요? 난 애완동물인데.”
지로티 공작과 세레니티는 착잡한 시선으로 두 번째 타르트를 조지는 중인 미아를 바라보았다.
단호한 표정은 평소와 같았지만, 묘하게 초점이 안 맞는 눈은 계속 흔들리고 있었다. 아마 본인도 그걸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안타까운 눈으로 그녀를 지켜보던 세레니트는 곧 비장하게 포크를 들었다.
“그래요. 미아. 폐하는 그냥 결혼하시게 두죠! 제가 돈을 벌어서 미아를 먹여 살릴게요!”
“렌! 역시 난 렌밖에 없어!”
“전 예전부터 미아밖에 없었는걸요!”
여자 둘이 부둥켜안고 까르르 웃는 모습을 바라보던 지로티 공작도 결국 포크를 들었다.
“떼잉! 그래! 뭐 황후가 그리 좋은 자리라고! 지로티 공작의 하나뿐인 손녀나 하게!”
“할아버지도 최고!”
“껄껄!”
그때, 수석 시녀인 제인이 빠른 걸음으로 정원에 나타났다.
“황제 폐하께서 드십니다.”
그 말에 세레니티와 지로티 공작이 동시에 미아를 돌아보았다.
“아가. 너무 야단치진 말고. 알겠지? 우리 폐하도 원해서 청혼을 받은 건 아니지 않으니.”
“그래요, 미아. 폐하에게 한번만 더 기회를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포크는 이리 주세요.”
미아는 순식간에 무기를 빼앗겼다.
곧 아딜로트가 황제궁 후원에 들어섰다. 얼마나 급한 걸음으로 온 건지 따라오는 기사들이 저만치 뒤에 있었다.
“지고하신 오르퀘니나의 달을 뵙습니다.”
“폐하를 뵙습니다.”
세레니티와 지로티 공작이 그에게 인사했다. 아딜로트는 눈매를 찡그리곤 주위를 둘러보았다.
“미아는? 여기 있다고 들었는데.”
“네?”
“응?”
설마.
세레니티와 지로티 공작이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미아는 어느샌가 사라져 있었다. 남아 있던 복숭아 타르트 역시 싹 사라지고 없었다.
* * *
미아는 복숭아 타르트 한 판을 손에 든 채 우물거리며 궁을 거닐었다. 어쩌다 얼굴이 익은 궁인들 몇과 마주치기도 했다.
그들도 아딜로트의 결혼 소식을 들었는지 안타까운 눈으로 미아를 보다가 앞치마 아래에 숨겨 두었던 간식을 살짝 건네주곤 했다.
덕분에 시간이 지날수록 미아의 주머니는 불룩해졌다.
그렇게 미아의 발걸음은 어느새 아무도 없는 정원에 닿았다.
‘여긴…….’
언젠가 아딜로트와 있었던 곳이다.
하녀복을 입고서 염탐을 하겠다고 설쳤을 때, 아딜로트가 벌을 준다며 그녀의 손을 오랫동안 잡고 있었던.
‘어쩐지 입맛 떨어지네.’
미아는 타르트를 옆에 내려놓고서 멍하니 파고라에 기댔다. 그녀의 시선이 문득 자신의 손으로 향했다.
아딜로트가 주었던 루비 반지가 약지에 고이 끼워져 있었다.
‘……내가 왜 도망친 거지?’
릴리벳 크라우스 등장은 미아도 예상하고 있었다.
<장미 정원의 세레니티>에서 그녀는 세 번째 악녀로 등장한다.
크라우스 공작가의 분가에서 곱게 길러진 릴리벳.
그녀는 크라우스 공작이 만약을 위해 대비해 놓은 비장의 수였다.
어릴 때부터 ‘황후가 되기 위해’ 키워진 릴리벳은 기품 있고, 가문도 출중했으며, 당당했다.
지금까지의 악녀들과는 결이 달랐다.
그녀는 자신이 황후 되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고, 세레니티는 그런 릴리벳의 태도에 주눅 들어 자신감을 잃고야 만다.
‘물론 내가 그렇진 않겠지만.’
릴리벳 자체는 미아에게 큰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저 병실 환자는 누구야?’
‘불치병이야. 왜 그 지극정성인 부모 있잖아.’
‘아, 그 집 딸이야?’
‘응. 그나마 애가 생글생글 잘 웃어서 낫긴 한데, 그래도 부모가 고생이지.’
전생에서 병실 문틈으로 들었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또 남에게 부담을 지우게 되는 걸까?’
미아가 눈을 질끈 감은 순간이었다.
바스락.
“어머.”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아가 재빨리 눈을 뜨고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융단 같은 흑발을 늘어뜨리고, 녹색의 눈을 반짝이는 릴리벳 크라우스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