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운이 좋군요. 호흐실트 후작이 직접 연락을 받았다면 이상한 점을 눈치챘을 수도 있을 텐데.”
“그 아저씨 성격에 직통으로 연락을 받진 않았겠죠! 여차하면 수하한테 떠넘겨야 하니까.”
“뭐가 됐든 우리가 한발 앞섰군.”
요아힘이 말하고 미아가 호응했으며 아딜로트가 추임새를 넣었다.
남자는 호흐실트 후작이 에트루리나 지역에 심은 유일한 연락책이었다.
‘운이 좋았지.’
그때 방에 들어온 사람이 정말로 연락책일 줄이야.
아딜로트가 그를 생포해 품에서 폭발석의 가동 장치를 부숴 버렸을 때쯤 지원도 도착했다.
요아힘은 기가 막히게 상황을 잘 파악하고는 잠입하듯 쳐들어와 단숨에 일당을 생포했다.
‘요아힘 진짜 무서웠지.’
미아가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철혈의 재상을 흘끔거렸다. 기사들과 함께 들이닥친 요아힘은 순식간에 제철소 주변의 잔당을 체포했다.
그리고 미아와 아딜로트가 연락책을 생포했다는 말을 듣고 대단히 기뻐하며, 그를 방으로 끌고 데리고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고 미아는 의아하게 아딜로트에게 물었다.
‘뭐하는 거예요?’
‘라지푸트는 고문법이 발달되어 있거든.’
‘…….’
태연한 대답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얼마 뒤, 요아힘은 다정한 미소를 유지한 채 연락책을 끌고 나왔다.
‘이제 시키는 대로 들을 겁니다.’
그리고 정말로 그랬다.
혹시 들켰을 때 쓰는 비밀 암구호쯤은 이미 요아힘이 다 간파한 듯했다. 덕분에 연락책은 순종적으로 호흐실트 후작의 부관까지 속였다.
“시, 시키는 대로 할 테니 살려만……!”
딱.
아딜로트는 연락책의 임무가 끝나자마자 수도로 그를 잠재웠다. 셋만 남자 요아힘이 빙긋 웃었다.
“자, 그럼 우리 후작 각하는 잠시 즐거운 꿈을 꾸게 두고, 이걸 살펴볼까요?”
요아힘의 손에서 서류 뭉치가 살랑거렸다.
“일단 연락책을 이용해 에트루리나 쪽에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속이는 게 좋겠습니다. 호흐실트 후작이 수하들에게 일일이 모습을 보이진 않은 듯하니, 전로를 지키던 사람도 전부 기사로 갈아치우고요.”
“그라스 후작은?”
아딜로트가 물었다.
“그쪽은 두 분이 축제를 즐기시는 동안 제가 처리해 놓았습니다. 거기다 이…….”
요아힘이 서류를 눈짓했다.
“호흐실트 후작의 서류만 있다면, 둘 다 확실하게 잡아넣을 수 있습니다.”
“다행이네.”
“그런데 대체 이건 어디서 구하신 겁니까?”
요아힘의 물음에 미아가 살짝 손을 들었다.
“숨겨진 비밀 공간이 있더라고요. 쪼오기에!”
미아가 책장을 가리켰고, 요아힘은 헛웃음을 흘렸다.
“정말 운이 좋으시네요.”
미아는 그저 애매하게 웃었다. 그리고 아딜로트를 흘끔거렸다.
거기에 비밀 공간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처럼 명령했으니 이상하게 여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아딜로트는 딱히 그 부분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조금 피로한 듯이 팔짱을 끼고 책상에 기대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문득 눈이 마주쳤다.
“……!”
미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홱 돌렸다. 어쩐지 아딜로트를 보는 게 어색했다. 그리고 자신을 의아하게 바라보는 요아힘을 향해 말했다.
“그, 그보다 증거가 부족하진 않을까요? 아까 살펴보니 호흐실트 후작과 그라스 후작의 유착이랑 전로 기술 유출은 쓰여 있지만, 라지푸트와 관련된 내용은 없던데…….”
전로 기술의 유출이야 페터 크뤼거가 증언할 수 있을 터였다. 문제는 호흐실트 후작이 라지푸트와 내통했다는 증거가 없다는 점이었다.
사실상 그 부분이 없으면 호흐실트 후작을 완전히 몰락시키기엔 힘들었다. 누가 뭐래도 그는 대귀족 중 한 명이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호흐실트 후작 본인의 머릿속에 전로 기술이 들어 있을 게 뻔해서, 이번에 잡아넣지 못하면 어떻게든 그걸 다시 이용하려 들 텐데요.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이미 기술을 넘겼을 수도 있고…….”
그러나 요아힘은 빙그레 웃었다.
“그 부분은 이미 미아 님이 해결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네?”
뜬금없는 말에 미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의 어리둥절한 얼굴을 보며 요아힘은 쿡쿡 웃으며 답했다. 그의 녹색 눈이 영민하게 빛났다.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만에 하나 호흐실트 후작이 풀려나더라도 그는 더는 그 정보를 이용할 수 없을 테니까요.”
* * *
리누스 호흐실트는 기분이 좋았다.
황제 아딜로트 겐첸 슈뢰더와 미아 셀레스티얼이 아무 낌새도 눈치채지 못하고 에트루리나 지역에서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수도 울름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두문불출했다.
‘기껏 거기까지 갔는데 아무 소득도 얻지 못해서 속이 쓰겠지.’
그사이 호흐실트 후작은 국경 검문 수준이 너무 강하다고 계속해서 청원을 넣었다.
결국, 황제는 국경 검문을 다시 표준 수준으로 내렸다. 상무부 담당인 크라우스 공작에게도 발언을 부탁하느라 큰 돈을 써야 했지만, 그쯤은 대를 위한 희생이었다.
‘라지푸트에 전로만 팔아넘기면 돼.’
오늘은 대망의 거래일이었다.
전로는 미리 국경까지 이동시켜 놓았다.
라지푸트와의 교역은 엄중한 검사를 통과해야 하지만 국경 지역 상무부 책임자를 잘 구슬렸다.
거래 장소는 국경 근처의 교역 도시였다.
“촌구석이군.”
호흐실트 후작은 못마땅하게 마차 너머로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라지푸트의 그치가 직접 봐야 한다고 고집만 부리지 않았어도.’
자신이 직접 이런 곳에 오는 것은 위험부담이 크지만, 별수 없었다.
‘어차피 앞으로 지속적인 거래를 하려면 한 번쯤은 얼굴을 봐 두는 것도 좋겠지.’
호흐실트 후작은 그런 생각을 하며 접선 장소로 향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로브를 쓰고 전로를 호위하고 있는 사람들을 일별한 뒤, 낡은 건물의 지하실로 들어갔다.
그가 방에 들어간 지 얼마 안 있어, 망토로 온몸을 휘감은 남자 한 명이 들어섰다.
“처음 뵙겠소. 라호르 바라하요.”
검은 눈에 체격이 다부진 이였다. 호흐실트 후작은 서글서글하게 미소 지었다.
“리누스 호흐실트입니다. 반갑군요.”
거래는 빠르게 이루어졌다.
바라하 역시도 이 거래가 황제의 눈에 띄어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는 듯했다.
마침내 계약서에 두 사람 모두의 인장이 찍혔다.
호흐실트 후작은 웃음을 참기 위해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그때, 바라하가 입을 열었다.
“하나 물어도 되겠소?”
“묻는 건 상관없지만 대답은 보장하지 못합니다.”
바라하가 눈빛으로 수긍하곤 물었다.
“이런 걸 왜 우리에게 넘기는 거요? 오르퀘니나 사람은 라지푸트를 싫어할 텐데.”
멍청한 질문이군. 호흐실트 후작이 비소했다.
“그야 돈 아니겠습니까?”
“큭큭.”
바라하 역시도 비소를 지었다.
“그쪽 황제가 들으면 재미있어 하겠군. 우리 쪽 전사들을 쥐 잡듯 죽여서 전쟁을 끝내 놨건만, 정작 그 신하는 나라를 팔아먹는 꼴이라니.”
라지푸트 인들은 민족애가 깊다. 그러니만큼 호흐실트 후작의 행동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리누스 호흐실트는 그 숨겨진 조롱을 코웃음으로 답했다.
“나라가 나한테 해 준 게 뭐가 있습니까? 내가 머리가 좋고 틈을 잘 찾아내서 돈을 벌겠다는데 그게 문제입니까? 돈 없는 거지새끼들을 주워다 써 주면 감사할 줄이나 알 것이지.”
“그 거지새끼들이 원해서 가난하게 태어난 게 아닐 텐데도?”
호흐실트 후작이 빙긋 웃었다.
“억울하면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라고 하십시오. 나처럼 말이죠.”
바라하는 더 말하고 싶지 않은지 냉소만 지었다.
“아무튼 계약은 끝났으니…….”
그때였다. 누군가 급하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장군!”
들어온 이는 라지푸트 사람이었다. 그는 급하게 바라하에게 다가가 뭔가를 귀엣말했다.
“……뭐?”
바라하의 눈빛이 예리해졌다.
‘뭐지? 분위기가 달라졌다.’
호흐실트 후작이 몸을 빼내려 황급히 일어났지만, 바라하가 더 빨랐다. 그는 어느새 허리춤의 검 손잡이 위에 손을 얹고 있었다.
“리누스 호흐실트. 이게 어찌 된 일이오?”
검은 눈이 매처럼 번득였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요. 문제라도 있습니까?”
호흐실트 후작 역시 손뼉을 쳤다. 그러자 숨겨진 비밀 통로를 이용해 호위 기사들이 모습을 드러났다.
작은 방 안이 살벌한 기운으로 가득 찼다.
“하!”
바라하가 코웃음 치며 외쳤다.
“당신은 저게 오르퀘니나의 최신 기술이라고 하지 않았소!”
“당연하지. 지금 나를 의심하는 겁니까? 기술의 ‘기’도 모르는―”
“모르는 건 당신 아니오!”
바라하가 노호를 내지른 순간, 누군가 급하게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후, 후작 각하!”
“플랑크?”
호흐실트 후작의 부관이었다.
그때부터 리누스 호흐실트 후작은 맹렬한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 이걸 보십시오! 황제가 호외를 냈습니다!”
“무슨……. 호외라니!”
호흐실트 후작이 재빨리 부관이 가져온 종이쪼가리를 빼앗아 펼쳤다. 그리고 그 쓰인 내용에 그의 표정이 아연해졌다.
⌜전 미로미스 상회의 숨겨진 상단주 ‘미아’, 황제를 위해 새 전로 기술 고안해…….⌟
⌜‘지로티 전로’로 이름 붙이고 상용화까지 끝마쳐…….⌟
⌜기존 ‘미로미스 전로’보다 20배 이상의 효율로 강철을 생산해 낼 수 있어, 비약적인 철강 기술의 발전이 예상되는…….⌟
단언컨대 리누스 호흐실트는 인생에서 이 정도로 놀라 본 적이 없었다.
갑자기 나타난 미로미스 상회가 세빌 상회를 누르고 에트루리나 지역의 개발권을 따냈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이게 지금 무슨 미친 소리야!!”
호흐실트 후작의 손안에서 호외가 구겨졌다. 부관 플랑크는 덜덜 떨며 말을 이었다.
“그, 그뿐만이 아닙니다. 기술자를 잡아놓았던 시설에서 연락이 끊겼…….”
“뭐?”
그때, 바라하가 흠칫하고 검을 뽑아들었다. 그에 반응해 호흐실트 후작의 기사들 역시도 검을 뽑았으나, 바라하의 시선은 문밖을 향해 있었다.
“함정이었나……!”
그가 이를 뿌득 가는 것과 동시에 문이 열렸다.
그리고 검은 머리카락에 잿빛 눈을 가진 기사 한 명이 태연하게 걸어 들어왔다.
“리누스 호흐실트 후작.”
차가운 목소리에 바라하도, 호흐실트 후작도 움찔했다.
“…….”
페르디안 키토는 무심하게 그 둘을 둘러보았다. 그의 등 뒤로, 전로를 옮기던 인력들이 하나둘씩 로브를 벗고 있었다. 전부 황제의 기사들이었다.
“설마 진작부터……!”
“사정은 나중에 듣겠습니다. 호흐실트 후작.”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외치는 호흐실트 후작의 말을 페르디안이 잘랐다. 그는 무심하고 아름답게 허리춤의 검을 뽑았다.
“감옥에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