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아무튼 중요한 건 이게 아니지.’
미아가 재빨리 중년 남자에게 다가갔다. 가까이서 얼굴을 보니 더 확실했다.
“아저씨 혹시 페터 크뤼거?”
“……!”
미아의 말에 남자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딜로트의 눈에도 이채가 스쳤다.
“누, 누구시죠……?”
페터가 겁먹은 목소리로 물었다. 피떡이 된 얼굴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미아는 슬쩍 뒤로 물러나 아딜로트에게 속삭였다.
“미로미스 전로 제작을 맡겼던 기술자야. 알아?”
갑작스러운 질문에도 아딜로트는 당황하지 않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실종자 목록에 있었어.”
역시.
미아가 페터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아저씨. 왜 여기 있어? 아까 그 사람들은 뭐고?”
“히, 히익! 오지 마!”
달래는 말에도 페터 크뤼거는 혼비백산하여 뒤로 물러나기만 할 뿐이었다. 그나마 뒤가 벽이라 더 도망치지는 못했지만.
“우리 나쁜 사람 아니야.”
“거짓말!”
페터 크뤼거가 흐느끼듯 외치며 아딜로트를 두렵게 바라보았다.
“사, 사람을 그렇게 쉽게 뭉개는데 악당이 아니라고! 누굴 속이려 들어!”
“왜 구해 줘도 지X이지? 그냥 가 버릴까?”
아딜로트의 일에는 언제나 은은하게 빡쳐 있는 미아가 중얼거렸다. 정말로 그대로 가고 싶다는 듯이 미아의 몸이 움찔거리는 것을 본 아딜로트가 실소했다.
“굴러 들어온 증인을 걷어차려고?”
“그건 그래.”
“써, 썩 꺼져! 너희도 세빌 상회 사람이지! 날 안심시키고 다시 데려가는 게 분명해!”
“근데 진짜 한 대만 차면 안 되나?”
미아가 한숨 쉬었다.
기술자들이 세빌 상회에게 납치된 게 분명해졌으니 정말로 두고 갈 수도 없는 노릇.
아딜로트는 뜻대로 하라는 듯이 뒤에 묵묵히 서 있을 뿐이었다.
‘좋아. 일단 진정부터 시키자.’
“이 못된 놈들! 하늘이 두렵지 않느냐! 악독한……!”
그 순간 미아가 아딜로트의 후드를 벗겼다.
샤라랄라…….
자체 배경음이 깔리는 수려한 용모가 페터 크뤼거 앞에 드러났다.
밤에도 빛을 잃지 않는 은발에 채도 높은 붉은 눈. 무심한 낯에 약간의 퇴폐미를 더하는 나른함까지.
“……!”
페터는 일순 천사를 본 사람처럼 굳었다.
좋아. 일단 닥치게는 했고.
미아는 아딜로트를 가리키며 말했다.
“보면 알지? 이 미모가 오르퀘니나에서 우리 폐하 말고 또 있을 리가 없다는 것도 알지? 그러니까 얌전히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시간 없으니까.”
페터 크뤼거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려던 순간이었다. 그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외쳤다.
“제, 제법 잘생기긴 했다만 그걸 어떻게 믿어!”
순간 멈칫한 미아가 똑같이 버럭 외쳤다.
“‘제법’? 아저씬 저 얼굴이 ‘제법’ 잘생긴 정도로 보여!? 저 얼굴이 ‘제법’ 잘생긴 정도인 나라가 있으면 이민 가고 싶네, 아주!”
아딜로트가 어이없다는 듯이 미아를 돌아본 순간, 페터 크뤼거가 말했다.
“듣고 보니 그렇군. 황제 폐하십니까?”
“…….”
아딜로트는 침묵했다. 아무래도 둘 다 약간 맛이 간 것 같으니 자신은 끼지 않는 것이 좋을 듯했다.
“그치만, 역시 믿을 수가…….”
페터 크뤼거는 반쯤은 넘어온 듯했으나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후. 어쩔 수 없나? 이건 안 꺼내려고 했는데.”
미아는 숨을 세게 불어 앞머리를 날린 뒤 품을 뒤졌다.
다음 순간 그녀는 척 하고 뭔가를 내밀었다.
“이거 보여?”
페터 크뤼거의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그, 그건 키토 후작가의 문양……?”
미아가 꺼낸 것은 페르디안이 건네준 키토 후작의 신분패였다. 미아가 당당히 외쳤다.
“그래! 우린 키토 후작가 사람이야! 키토 후작가 정도는 알겠지!”
“알다마다요!”
페터 크뤼거가 호응했다. 살았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오르퀘니나에서 가문의 문장을 위조하는 것은 중범죄인데다, 하물며 그 키토 후작가라면야.
“구해 주실 줄 믿고 있었습니다!”
넙죽 엎드려 태세를 바꾸는 페터의 모습에 미아가 슬쩍 속삭였다.
“아딜. 어쩐지 인생 잘못 산 것 같지 않아?”
“…….”
* * *
미아와 아딜로트는 페터 크뤼거를 앉혀 놓고 심문을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은?”
“저만 불려 왔습니다. 전로 하나를 수리해야 해서…….”
페터 크뤼거는 수리하다가 감시가 약해진 틈을 타 도망쳤다고 했다.
“펴, 평소랑 달리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거든요…….”
그의 판단은 옳았을 것이다. 아까의 괴한들은 절대 페터를 살려가려는 눈치가 아니었으니까.
“아무튼 놈들은 기술자를 데려다가 몰래 전로를 만들라고 시켰습니다. 현재 가동 중인 제철소 바로 옆에 있는 폐 제철소에서요.”
“흐음.”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서 수작을 부리다니, 대담하다고 해야 할지.
하지만 그게 이치에 맞긴 했다.
전로라는 건 제작에서부터 완성품까지 어디 두메산골에 숨길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운송이야 마법의 도움을 받으면 된다지만…….
‘그럴 바에야 차라리 에트루리나에서 다 해치우는 게 낫다 이거지.’
사람들 눈에 띈다 해도 제철소니까 상회가 들락날락하는 게 이상할 리도 없고.
그라스 후작과의 결탁 덕에 감사를 피하기도 쉬웠을 테고.
‘그렇다는 건 지금 덮쳐야 한다는 건데…….’
페터를 쫓던 놈들이 돌아가지 않으면 그들이 할 행동은 뻔했다.
증거 은닉.
막말로 예의 폐 제철소에 폭발석 두어 개만 던져도 증거는 깡그리 사라질 터였다.
전로는 좀 아깝겠지만, 기술자 한 명만 살려 놔도 언제든 새로 만들 수 있었다.
더군다나 전로 기술을 빼돌렸다는 정도로는 호흐실트 후작을 사형시킬 수 없다. 그를 완벽하게 몰락시키려면 반드시 간첩죄가 필요했다.
‘라지푸트와 연락한 흔적이 분명 어딘가에 있을 텐데. 시즈가 수도에서 그걸 못 찾았단 말이지…….’
냉정하게 눈을 빛낸 미아가 고개를 돌렸다.
“아딜. 아무래도…….”
그러나 옆에 있는 줄 알았던 아딜로트는 자리에 없었다. 그는 어느새 멀찍이 있는 골목에서 나오는 중이었다.
“어디 다녀와?”
“기사들이 올 때까지 잠들어 있진 않을 것 같아서 손을 좀.”
아딜로트는 태연하게 말하며 단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미아는 그의 로브에 새로운 핏자국이 묻어 있는 것을 슬쩍 외면했다.
“그보다 아저씨. 우리 제철소에 가야 할 것 같은데, 혹시 안쪽 사정에 대해 좀 알아?”
“예? 들어가시려고요?”
“그래야지. 조사하러 왔으니까.”
“위, 위험할 텐데…….”
“우리 폐하가 더 쎄.”
페터는 불안하게 힐끔거리면서도 바닥에 그림을 그려 최대한 자신이 아는 것을 설명해 주었다.
“고마워. 아저씨는 일단 공관으로 가. 가서 재상에게 신변 보호를 요청해. 그리고 조용히 기사들 좀 불러 줘.”
“저, 저 혼자 갑니까? 평민 나부랭이라고 제 말을 안 들어 주시면…….”
“미아가 머리 묶어 줘서 고맙다고 했다고 전해. 그러면 의심 안 할 거야.”
“알겠습니다!”
페터 크뤼거는 그대로 공관을 향해 절뚝이며 달려나갔다.
페터 크뤼거가 떠난 뒤. 미아는 슬쩍 아딜로트를 올려다보았다.
“안 보내네?”
“추적자가 있을 수 있으니까 둘만 보낼 순 없지. 내 옆이 제일 안전해.”
담담한 대답에 미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보내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아무래도 그 폐 제철소가 렌이 갇혔던 원작의 거기 같거든.’
곧 미아가 씩 웃었다.
“그럼 어디 나쁜 놈들 조지러 가 볼까?”
* * *
미아와 아딜로트는 페터 크뤼거를 사냥하려던 남자들이 타고 온 말을 찾아내 올라탔다.
얼마 안 가 제철소가 보였다. 그곳을 기준점으로 잡고 페터 크뤼거가 말한 곳으로 향하니, 그가 말한 대로 작은 폐 제철소가 있었다.
‘원작의 그곳이 확실하네.’
주변 지형을 둘러보며 미아가 생각했다.
지금까지 원작 에피소드가 연루된 사건에서는 반드시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테레지아가 그랬고, 힐데가르트가 그랬다. 주체가 미아로 바뀌었어도 흐름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럼, 만에 하나 세레니티 대신 아딜로트가 곤경에 빠지는 일도 있을 수 있지 않을까?
‘혹은 뭔가를 찾아내거나.’
그사이 아딜로트는 적당한 말을 세우고 풀숲에 숨었다.
“경비가 있어.”
검은 로브를 쓰고 단검을 쥔 그는 평소보다 표정이 없었다.
그게 아딜로트의 임전 태세라는 것을 미아 역시 잘 알고 있었긴 하지만, 눈앞에서 보니 위압감이 상당했다.
“뒷문으로 갈까?”
“죽이는 게 더 쉽고 빠르고 조용해.”
보통은 그 반대인데…….
아딜로트는 망설이지 않고 어둠에 섞여 경비병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미아가 잠깐 눈을 감은 사이에 소리 없이 모든 걸 끝내고 돌아왔다.
시체는 풀숲에 숨겼다. 증원이 오기 전까지는 잠입 미션처럼 조용히 증거를 수색해야 했다.
“가자. 내 등에서 절대 떨어지지 마.”
제철소 안은 무거운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사람은 없었다.
‘하기야 철통 보안을 해 봤자 거기가 수상하다고 광고하는 꼴일 뿐이니.’
조용하게 나아가던 미아와 아딜로트는 어느 순간 걸음을 멈췄다.
“…….”
미로미스 전로.
현대의 것처럼 크지는 않지만, 이 시대 사람이 보기엔 제법 거대한 강철 항아리가 작은 창문에서 들어오는 희미한 빛을 받고 늘어서 있었다.
미아가 잽싸게 전로 근처로 다가갔다.
“미아?”
아딜로트가 낮게 이름을 불렀으나, 미아는 잠자코 전로의 아래를 살폈다.
역시, 없었다.
“코드가 없어.”
“뭐?”
가까이 다가온 아딜로트가 되물었다. 미아가 작게 속삭였다.
“원래 미로미스 전로를 만들 때 기술자들에게 아래에 코드를 새기라고 했어. 그게 없어. 전부 새로 만들어진 전로야.”
“…….”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그래서 약간 섬뜩하게 보이는 붉은 눈이 가늘어졌다.
“다 죽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누군가를 죽이겠다는 말을 저렇게 매력적인 목소리로 말한 건 뭔가.
하지만 미아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호흐실트 후작이라면 여기에 폭발석이라도 설치해 놨을 거야. 게다가 전로 자체로는 호흐실트 후작이 라지푸트에 전로를 팔아먹으려 했다는 증거가 못 되잖아.”
“그럼 어떻게 하고 싶어?”
붉은 눈은 답을 바라듯 어둠 속에서 미아를 가만히 응시했다. 자신이 여기서 무슨 말을 하든 그대로 실행할 것만 같았다.
난데없이 세상에서 가장 날카로운 검을 쥐게 된 기분에 미아는 괜히 한기를 느끼며 말했다.
“분명 이쪽 구역을 다스리는 책임자가 있을 테니 그 사람을 잡거나, 아니면 증거만 수집해서…….”
그때였다.
땡땡땡땡땡땡!
요란한 종소리와 함께 제철소 내에 순식간에 불이 들어왔다. 동시에 누군가의 고함이 울려 퍼졌다.
“‘사냥꾼’ 조의 연락이 끊겼다! 혹시 모르니 전체 수색해!”
더는 고민할 시간도 없었다.
미아가 즉각 팔을 벌렸다.
“안아 줘!”
아딜로트는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미아를 안아 들었다.
“달려!”
“숨을 곳이―”
“있어!”
이제부터는 시간 싸움이었다.
거기에 뭔가 있기만을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아니, 있을 것이다.
‘왜냐면 여주는 언제나 옳거든! 뒤로 넘어져도 백덤블링으로 꽃길만 걷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