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수도 울름의 호흐실트 후작저.
막 일을 마치고 저택에 돌아온 호흐실트 후작은 부관의 보고를 듣곤 크라바트를 풀던 자세 그대로 멈췄다.
“황제가 다르켈 시에 도착했다고?”
서글서글하고 유쾌하던 그의 얼굴이 즉각 성마르게 굳었다.
“그걸 왜 이제야 전달해!”
“큭.”
후작이 화장대 위의 향수병을 부관에게 내던졌다. 향수병은 부관의 눈두덩이를 맞고 깨져 나갔다. 지독한 향기가 방 안에 번지기 시작했다.
“재, 재상의 짓인 것 같습니다. 마차가 어디로 향했는지 모르게 처리한 데다, 근교로 향하는 것처럼 속여서……!”
“제기랄. 그 미친놈…….”
호흐실트 후작은 무도회에서 만났던 아딜로트를 떠올렸다.
‘일은 잘되어 가나?’
평소의 아딜로트답지 않던 물음이었다. 속을 알 수 없는 붉은 눈이 자신을 속을 들여다보듯이 응시했던 것도 기억났다.
“……하, 하하하!”
이윽고 호흐실트 후작은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알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자신이 에트루리나에서 뭔가를 하고 있다는 걸!
“애송이가 내가 누군 줄 알고!”
와장창!
호흐실트 후작이 팔을 휘두르자 탁자 위에 있던 글렌켈란 병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광소를 멈춘 호흐실트 후작은 번들거리는 눈으로 중얼거렸다.
“아니지. 대책은 이미 세워 놨으니까. 그렇지, 좋아. 나쁘지 않아. 이런 풍파도 있는 법이지…….”
보라색 눈이 휙 하고 부관에게 향했다.
“서류는 잘 숨겼겠지?”
그라스 후작과 자신의 유착 관계를 증명할 서류.
그리고 에트루리나 광산에서 채굴한 철광석을 세빌 상회로 은밀히 빼낼 때 사용한 전표.
혹시라도 한쪽이 배신하면 쓰기 위해 마련해 놓은 것이었다.
기묘하게 일그러진 상관의 얼굴에 수하는 긴장한 채 답했다.
“예! 즉각 매뉴얼대로 따랐습니다. 신이 아니고서야 위치를 알지 못할 겁니다!”
그 대답을 들은 호흐실트 후작의 입매가 만족스럽게 올라갔다.
역시 수도에 두지 않길 잘했다. 수도에 뒀다면 진작 황제의 그림자가 찾아냈을 것이다.
“좋아, 좋습니다. 나쁘지 않아……. 기술자들은?”
“전부 가둬 놓았습니다.”
“그거 가지고 되겠어? 혹시 모르니 가서 잘 달래 주도록 해. 부인이 요즘 몇 시에 잠드는지, 아들딸이 요즘 몇 시에 집에 들어가는지도 같이 알려 주고.”
“예.”
“좋아요, 좋군요…….”
분명 위기 상황이지만 걱정할 문제는 없었다. 호흐실트 후작은 애써 불안감을 털어 내려 손바닥을 비볐다.
‘그래. 증거는 없어.’
애초에 물증이 확실했다면 황제가 진작 자신을 먹어 치웠을 것이다. 황제는 그런 성격이었다.
‘그래서 몸소 에트루리나까지 간 건가? 한가하기도 하지.’
역시 진작 거래를 끝냈어야 했다. 그 멍청한 만리타가 지레 호들갑만 떨지 않았어도 됐을 텐데.
라지푸트의 주전파가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전달받은 아딜로트는 즉각 국경 검문을 강화했다. 세빌 상회가 쌓아 온 인맥으로도 쉬이 통과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덕분에 그가 심혈을 기울여 어렵사리 만든 유통 라인이 전부 쓰레기가 됐다.
“그런데…….”
그때, 수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그게, 라지푸트에 납품할 전로 중 하나를 마지막으로 검사했는데 문제가 있어서…….”
“그랬죠. 그래서?”
“기술자 한 명이 전로를 수리하러 다르켈 시에 가 있습니다.”
호흐실트 후작이 멈칫했다.
증인은 곤란하다. 서류와 달리 말을 할 줄 아니까.
미로미스의 기술자를 빼내 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 명 한 명의 인재가 아까운 상황이었지만.
‘꼬리를 밟힐 순 없지.’
대상인은 결단이 빨라야 하는 법.
호흐실트 후작이 삼백안을 치뜨며 건조하게 말했다.
“뭘 고민하고 있어? 바로 죽여.”
* * *
당황한 아딜로트의 몸이 굳었다. 그 와중에도 미아는 뚱한 걸 넘어 시시하다는 듯이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가고 싶어 했잖아.”
정신을 차린 아딜로트가 말했다.
미아는 무심한 얼굴로 즉답했다.
“아닌데?”
화가…… 났구나.
아딜로트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축제는 아직 안 끝났으니까…….”
“저기 말이야.”
싸늘하지는 않지만 냉정한 목소리로 미아가 아딜로트의 말을 잘랐다.
“그런 식으로 사람 내팽개쳐 놓고, 이제 와서 선심 쓰듯 나가자고 하면 넙죽 감사합니다, 할 줄 알았어?”
“…….”
“물론 몰래 나간 건 내 잘못이야. 그치만 아무 일 없었잖아. 페르도 구해 줬는데 왜 나한테 화를 내? 내가 만만한 거야, 아딜이 오만한 거야? 아니면 둘 다야?”
“…….”
화가…… 진짜 많이 났구나.
표정 없는 인형 같은 얼굴로 하는 말이 어찌나 신랄한지 아딜로트의 귓가에 쏙쏙 박혀 들었다.
만만하다고 생각해 본 적 따위 없지만, 미아가 그렇게 느껴도 이상하지 않았다. 아딜로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애꿎은 건침만 삼켰다.
미아는 그런 아딜로트를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팩 돌렸다.
“그리고 나 축제 안 가고 싶었거든? 아딜 혼자 가.”
그러고는 별채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아딜로트는 멀찍이서 ‘네가 쓰레기네…….’하는 눈빛으로 구경 중이던 기사들을 해산시키고는 빠르게 그 뒤를 쫓았다. 저도 모르게 목소리에 다급함이 실렸다.
“너 없이 내가 왜 가.”
“난 아딜 없어도 혼자 갈 수 있는데?”
“난 못 가. 같이 가자.”
“싫어. 안 가.”
“미아.”
미아가 자리에 우뚝 섰다.
“안 가!”
그녀는 버럭 외치고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것도 전속력으로.
……기사를 시킬까?
그 순간 본능적으로 감탄하고 만 아딜로트가 빠르게 미아의 뒤를 쫓았다.
토끼인 줄 알았는데 미친 망아지였는지 제법 잘 달리던 미아는, 별채의 4층 숙소 앞에 도달해서야 문고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헉……. 허억……. 왜 땀도 안 흘려!?”
“흘리고 올까?”
억울함이 배어 있는 목소리에 당황한 아딜로트가 대답했다. 미아는 울컥 외쳤다.
“짜증 나!”
“짜증 풀어 줄게. 외출복 입은 김에 나가자.”
“안 가! 이거 그냥 제인 씨가 챙겨 줘서 입은 거거든!?”
“알아. 그러니까 잠깐 나갔다 오자.”
“그렇게 애틋한 눈 한다고 들어줄 것 같아? 인생이 쉬워? 난 감정이 있는 외모지상주의자라고!”
그렇게 외친 뒤 벌떡 일어나 문을 연 미아를 향해 아딜로트가 물었다.
“내가 싫어졌어?”
“……!”
그 말에 미아가 눈을 부릅뜨고서 그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이내, 억울하다는 듯이 서럽게 외쳤다.
“이 타이밍에 그걸 물어보는 것도 비겁해!”
맞다. 방금은 좀 비겁했다.
하지만 그녀가 ‘네가 싫다’고 말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아딜로트는 겨우 심장이 제자리를 찾은 기분이었다.
“그럼 뭐가 싫은데?”
“다 싫어! 다!”
“내가 서운하게 했지?”
“아니라니까!”
“평범한 거 하고 싶다며. 평범하게 축제 구경하자.”
그 말에 미아가 일순 입술을 짓씹었다.
“그래서 더 싫어!”
아딜로트가 멈칫했다.
“왜?”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물었다.
아니나 다를까 미아의 큰 눈이 빠르게 젖어 들었다. 그녀는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외쳤다.
“―내가 그런 말 한 건 아딜이 처음이었는데!”
불시에 튀어나온 듯한 진심이었다. 미아는 제 말에 제가 놀랐는지 곧바로 입을 콱 다물었다.
하지만 이내 댐이 무너지듯, 분홍색 눈에서 알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엄마랑 아빠한테도 말한 적 없는데!”
눈물은 곧 폭포처럼 미아의 뺨을 적셨다. 뭔가를 눌러 참는 것 같던 미아가 흰 얼굴을 서러운 홍조로 물들였다.
“그래서 이번엔 진짜로 쪼끔 기대했단 말이야…….”
그 말을 끝으로 미아는 자리에 서서 엉엉 울기 시작했다.
‘네가 바라던 게 뭔데?’
‘완전 평범하고 특별할 것 없는 거.’
언젠가 나눴던 밤의 대화가 아딜로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자신이 정말로 실수했다.
아딜로트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울고 있는 미아를 끌어안았다. 잠깐 멈칫한 미아는 딸꾹질과 함께 그의 옷자락을 붙잡고 더 서럽게 울었다.
“원랜 안 한단 말이야……. 어차피 또 실망할 텐데……. 어차피 나는 축제 같은 것도 못 가고, 또 올 거라던 사람도 조금 지나면 안 올 거고…….”
“…….”
“FDA 개새끼들 맨날 거짓말만 해……. 맨날 효과 좋대…….”
미아는 온몸의 수분을 쏟아 내고 싶은 사람처럼, 아이처럼 울었다.
현재를 즐길 뿐, 미래나 관계에 대해 아무런 기대도 없는 것 같던 그녀의 모습이 그제야 이해되었다.
그 애처로운 등을 토닥이며 아딜로트가 말했다.
“나가자. 이번엔 거짓말 아니야.”
“으앙앙……. 싫어.”
“…….”
참 내 반려동물은 울고 있어도 호락호락하지가 않지.
“에프디에이 죽여 줄 테니까 나가자.”
“크흥, 흑. 네가 걔를 어떻게 죽여…….”
“다 방법이 있어. 황제잖아.”
미아는 뭐가 웃긴지 울다 말고 갑자기 킁컹 하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아딜로트는 그게 좋았다. 뭐가 됐든 그녀가 다시 웃기 시작했다는 게.
“내가 너랑 놀고 싶어서 그래. 걔는 잊고 나랑 놀아.”
“황제는 안 놀아…….”
“황제도 가끔은 놀고 싶어.”
아딜로트는 그렇게 말하며 미아를 조금 떼어냈다. 그 짧은 시간에 얼마나 운 건지 예쁜 얼굴이 엉망이었다.
아딜로트는 소매로 덜 마른 눈물을 조심스레 문질렀다. 아직 뾰로통한 기색이 남아 있는 얼굴이 밀가루 반죽처럼 말랑하게 모양을 바꿔 갔다.
“황제도 가끔은 관심 있는 여자랑 축제도 구경하고 싶고.”
미아가 움찔했다.
“그 머리 귀엽다는 말도 하고 싶고.”
그러거나 말거나 아딜로트는 미아의 눈물을 다 닦아 내고 나서야 손을 내려놓았다.
“옆에 있는 걔랑 너무 친하게 지내지 말라는 말도 하고 싶어.”
미아는 젖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놀라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너무 울어서 선 채로 기절했나 싶었는데, 도망칠 기회를 노리는 토끼처럼 어깨가 움찔거리는 것을 보니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아딜로트가 실소했다.
“해도 돼?”
“…….”
딸꾹.
미아는 기어코 딸꾹질을 시작했다. 그 모습에 아딜로트가 실소했다.
‘역시 바로는 대답해 주지 않겠지.’
하지만 상관없었다.
아딜로트는 젖은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미아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나가자. 지금 내가 너 꼬시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