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좋아해!”
미아가 바로 답했다. 그녀는 그걸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갸우뚱하고서 양 주먹을 꼭 쥐고 재차 말했다.
“정말 좋아해!”
“…….”
그 말에 아딜로트는 아까보다 더 비참해졌다. 말의 무게가 너무…… 달랐다.
그는 입을 꾹 다문 채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온몸을 태울 것 같던 분노가 물러난 자리를 정복자의 본능이 채우기 시작했다.
“……어디까지 도와줄 셈이었는데?”
그의 그 말은 놀랍도록 매끄럽게 흘러나왔다. 순식간에 반쯤 쉬어 버린 듯한 목소리였지만 말이다.
미아가 채 놀라기도 전에 아딜로트는 팔을 뻗어 미아의 허리를 당겨 왔다. 가느다란 허리가 속절없이 끌려와 몸이 맞붙었다.
“……아딜?”
“이런 거?”
당황한 미아가 가냘픈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지만 아딜로트는 천천히 손을 내렸다. 그 아래 얼굴은 그 자신이 느끼기에도 무심한 낯을 하고 있었다. 눈빛은 어떨지도 몰라도.
“아니면 이런 것도?”
“아, 아딜……!”
아딜로트의 손가락이 미아의 뺨을 감쌌다. 그는 당황으로 바짝 굳은 미아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떨리는 분홍색 눈과 새빨갛게 달아오른 두 볼이 코앞이었다.
“아니면.”
아딜로트가 눈을 내리깔며 고개를 기울였다. 미아가 주춤했으나 아딜로트의 손가락이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를 헤집는 게 더 빨랐다.
“이보다 더한 거?”
“……!”
입술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미아는 저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순간, 온화한 음색이 울려 퍼졌다.
“폐하. 급한 서류가 있습니다만.”
* * *
급하게 달려온 요아힘은 뒤늦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켄달 경이 횡설수설하는 걸 무시하지 않길 잘했군.’
그는 차분히 아딜로트와 미아를 살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아딜로트는 거의 잡아먹을 듯한, 그러나 더없이 싸늘한 눈으로 미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미아는 숨을 너무 오래 참았는지 눈가를 적신 채로 그런 아딜로트의 품 안에서 굳어 있었다. 놀란 토끼 같은 모습을 보아하니 아직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하아…….”
요아힘이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미아 님. 일단 방에 들어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리베로 경을 보내겠습니다.”
“누구 맘대로?”
요아힘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차분한 얼굴로 제정신이 아닌 아딜로트를 한번, 아무도 없는 주변을 한번 보고는 낮게 말했다.
“폐하. 당신은 황제입니다.”
“…….”
“저는 폐하를 황제로 만들기 위해 폐하와 손을 잡았습니다. 폐하께서 누구를 죽이시든 거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었으니 그건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만.”
요아힘은 자신이 이 말까지 해야 하냐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지금은 그냥 질투에 눈이 머셨을 뿐 아닙니까.”
하지만 아딜로트는 미아를 놓아주려는 일말의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연기 연습이었어.”
“저를 상대로 말장난하고 싶으신 거라면 저도 진심으로 상대해드리겠습니다.”
“…….”
빙그레 웃는 철혈의 재상을 바라보며 아딜로트는 침묵했다.
요아힘이 다시 미아에게 말했다.
“미아 님. 리베로 경께 가 계시는 게 좋겠습니다. 1층에 있을 겁니다.”
“…….”
“폐하.”
요아힘의 강한 어조에 잠깐이지만 아딜로트의 팔에서 힘이 풀렸다. 미아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토끼처럼 파드득 몸을 떨어 그에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녀의 얼굴은 홍당무처럼 빨갰다. 귀가 있었다면 놀라서 까뒤집은 상태였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바로 1층으로 내려가지 않고 머뭇거리며 요아힘을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요아힘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 것 같았다.
“폐하는 제가 잘 돌보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
미아는 그제야 고개를 꾸벅, 숙이곤 포르르 계단을 내려갔다. 아딜로트는 도망치듯 떠나는 미아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눈이 가라앉아 있었다. 당장이라도 도망치는 토끼를 잡아다 가둬 버리고 싶어 하는 듯한 사냥꾼의 눈이었다.
“폐하.”
“할 말 없어.”
그러나 그 눈은 요아힘의 부름이 끝나기 무섭게 눈꺼풀 속에 감춰졌다.
하지만 요아힘은 알 수 있었다. 무언가가 아딜로트의 본능을 자극했고, 아마 그는 더는 참거나 숨기지 않으리란 것을.
착잡했다.
“……이게 재상의 역할인지 저는 모르겠습니다만, 인간 된 도리로서 말씀드립니다. 꼭 이런 식으로 조급해하실 필요는 없었지 않습니까.”
“나도 없는 줄 알아서 지금껏 태평하게 있었지. 그런데 아니더라고.”
바라보기만 해도 오한이 들 정도로 서늘한 낯으로 되돌아온 아딜로트가 중얼거렸다.
“어쩌면 길들여진 건 내 쪽인지도 모르지.”
* * *
아딜로트는 에트루리나 광산 개발 사업과 관련된 일을 처리하느라 축제에는 갈 수 없겠다고 선언했다.
따라서 미아도 블루문 페어를 구경하러 나갈 수 없었다.
오류라곤 없는 논리였다.
황제는 바빴고, 미아는 위험했으며, 그러므로 가장 강한 황제 옆에 있는 게 그녀를 위해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
황제는 서류를 보는 공관에.
미아는 기사의 호위를 받으며 별채에.
완벽한 구도였다.
분명 그럴 터였다.
‘속이 답답하군.’
그런데도 요아힘의 속은 영 개운치 못했다.
‘분명 미아 님이 축제에 가지 않는 게 더 합리적이야.’
그의 이성은 계속해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차 창을 통해 거리를 구경하며 들떠 있던 눈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재상님.”
그때, 때마침 미아에게 말을 전하게 한 제프리 켄달 경이 돌아왔다.
“켄달 경. 미아 님께 전달했습니까?”
“그랬습니다만…….”
켄달 경이 말꼬리를 흐렸다. 표정도 좋지 않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늘 자신의 생각을 똑바로 전달하기를 교육받는 기사는 답답하다는 듯이 얼굴을 찡그렸다.
“없어서 더 이상한…… 그런 기분을 혹시 아시겠습니까?”
“무슨 말입니까?”
“저는 기사라 이런 걸 잘 표현하는 법을 모릅니다. 다만 좀…… 이상한 것 같아서 말입니다.”
요아힘이 괜히 만지작거리고 있던 펜을 내려놓았다.
“더 자세히 설명해 보세요.”
“예. 그게, 축제를 구경하는 건 어렵겠다고 전해드렸는데…….”
설마 울기라도 한 걸까. 눈가 피부가 연약해 보였는데 화장품이라도 찾아다 주는 게 나으려나. 불쑥 드는 걱정에 요아힘의 안색이 어두워졌을 때였다.
“눈을 몇 번 깜빡이고, 그리고 그냥 ‘그렇구나!’하고 웃으셨습니다.”
“……예?”
요아힘의 반문에 켄달 경은 그게 끝이라고 말했다.
“그렇구나! 하고 끝입니다. 끝에 느낌표가 중요합니다.”
“…….”
“기분이 이상합니다.”
켄달 경은 그런 말을 남기고 경계를 서기 위해 돌아갔다. 그 순간부터 요아힘의 기분도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 * *
업무는 밤이 되어서야 끝났다. 공관을 급습했으니 첫날 봐야 하는 서류가 가장 많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황제는 여전히 공관에 남았다. 뭔가를 억누르기 위해 서류로 정신을 돌린 모양이었다. 미아에게 괜히 손대는 것보단 그게 나을 것 같아 요아힘도 그를 말리지 않았다.
“…….”
그대로 숙소로 향하려던 요아힘은 불현듯 발걸음을 돌려 별채의 최상층으로 향했다.
아딜로트와 미아에게 배정된 방이었다. 문 앞에는 여성 기사인 리베로 경이 서 있었다. 그녀는 요아힘을 보고 경례했고, 요아힘도 묵례로 답했다.
곧 요아힘이 방문을 두드렸다.
“미아 님.”
안쪽에선 대답이 없었다.
“미아…….”
“재상님.”
재차 미아를 부르려던 요아힘을 리베로 경이 가로막았다. 그녀는 아까의 켄달 경처럼 오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손수 조용히 문을 열어 주었다.
‘뭐지?’
요아힘을 영문도 모른 채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창가에 앉아 있는 미아를 발견했다. 그녀는 에트루리나로 떠나던 첫날처럼 머리를 땋아 동그랗게 말아 올린 상태였다.
하지만 제인의 도움을 받았던 그날과 달리, 오늘은 혼자 했는지 여기저기 머리카락이 삐져나와 있었다.
옷차림은 산뜻하고 화사한 외출복이었다. 레이스가 달린 챙 넓은 모자는 수석 시녀인 제인이 특별히 챙겨 준 것이었다.
“와! 광대! 와와와!”
미아는 그 상태로 자신이 들어온 줄도 모르고 신이 나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요아힘은 한숨을 쉬면서도 조금은 안심했다. 적어도 병 걸린 토끼처럼 시름시름 앓고 있지는 않으니 말이다.
‘저렇게 기대를 하시니, 무리를 해서라도 축제를 보여드려야겠어.’
그렇게 생각한 요아힘이 그녀를 놀라게 하지 않으려 조용히 다가갔을 때였다. 서서히 드러난 옆모습과 그녀의 눈을 본 요아힘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요아힘이 생각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미아의 분홍색 눈에는 일말의 기대도 없었다. 흥분은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그녀는 거리의 사람들, 축제의 불빛을 마치 하늘의 은하수 보듯 관찰할 뿐이었다.
마치 자신이 저 세계에 낄 수 있으리란 기대가 하나도 없는 사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