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미아가 에트루리나로 떠나는 날이 되었다. 세레니티는 미아를 배웅하기 위해 레벤토르 정문으로 향했다.
부산스러운 주변을 둘러보던 세레니티가 문득 입을 열었다.
“행렬이 단출하네요?”
“사교 시즌이라 조용하게 쉬러 간다는 명목이거든!”
배시시 웃으며 대답하는 미아의 모습에 세레니티 역시도 살짝 미소를 지었다.
여행이라고 들떴는지 머리를 땋아서 동그랗게 만 미아는 평소의 배 이상으로 귀여웠다.
“역시 폐하껜 너무 아까워요…….”
“응? 렌, 뭐라고 했어?”
“아무것도 아니에요, 미아.”
세레니티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런데 미아, 폐하와 싸웠나요?”
“윽.”
미아가 움찔하곤 울상을 지었다.
아닌 게 아니라 무도회에서 돌아온 이후, 황제는 내내 화를 눌러 참는 표정이었고 미아는 내내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낑낑댔다.
“나도 잘 모르겠어. 싸운 건 아닌데, 아딜이 좀 화난 거 같아서…….”
배가 불러서 그래요…….
세레니티는 그렇게 말하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미소를 유지했다.
“미아는 잘못한 게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미아가 하는 모든 건 폐하를 위해서니까요. 그걸 몰라주는 사람이 너무한 거예요. 알았죠?”
“……정말?”
“네. 정말.”
미아가 우울함을 벗어던지고 순식간에 까르륵 웃었다.
“고마워, 렌! 렌이 최고야!”
“천만에요.”
그때, 두 사람 옆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다가온 사람을 보고 미아가 반색했다.
“페르 님!”
“오랜만이군.”
페르디안이 고개를 까딱했다. 그는 이번 여행에 함께하지 않기에, 레벤토르 내에서의 호위와 배웅만을 위해 나와 있었다.
“에트루리나로 간다지.”
페르디안이 세레니티 쪽은 돌아보지도 않고서 미아에게 말했다.
“네! 여행은 처음이라 좀 신나요!”
미아는 실실 웃으며 몸을 가만두지 못하고 어깨를 들썩였다. 정말로 신난 듯한 모습에 세레니티는 저도 모르게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페르디안 역시 굳어 있던 입매를 풀었다.
“이제야 황궁이 좀 조용해지겠군.”
“와! 그거 보통은 ‘보고 싶을 거다’로 이어지는 대사인데!”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거다.”
“아! 섭섭해!”
미아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전혀 섭섭함이 느껴지지 않는 모습에 페르디안은 잠시 입을 굳게 다물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폐하를 잘 보필해라.”
그 나직한 말에서 세레니티는 희미한 애수를 느꼈다. 굉장히 복잡한 감정이 스며 있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미아는 그걸 눈치채지 못했는지 마냥 천진하게 웃었다.
“그거 제가 엄청 잘하는 거예요!”
“…….”
말없이 눈을 내리깐 페르디안은 곧 품에서 뭔가를 꺼내 미아에게 건넸다.
“그리고 이걸 가져가라.“
페르디안이 내민 것은 날개 달린 말이 새겨진 방패형의 문장이었다. 미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저번에 빌려준 신분패 아니에요? 비싼 거라고 들었는데.”
“미아, 그건…….”
“응?”
“아, 아니에요.”
지켜보던 세레니티는 당황했다.
키토 후작의 신분패. 단순히 비싼 게 아니라 가치를 매길 수 없다.
신분패 하나만 있어도 오르퀘니나의 어느 곳에서든 키토 후작과 동일한 권한을 가질 수 있었다. 말하자면 그의 전권을 위임한다는 것과도 같았다.
‘그걸 어째서 미아에게?’
타이밍 좋게 미아가 물었다.
“그런데 이걸 왜요?”
“너라면 분명 폐하가 없는 곳에서 말썽을 부리겠지.”
“……아닌데요.”
“맞을 거다.”
“…….”
미아가 입을 불퉁하게 내밀고 뭔가 구시렁거렸다.
“명분이 필요할 때 써라. 그리고.”
페르디안이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고 세레니티는 늘 강건하던 페르디안의 잿빛 눈이 깜짝 놀랄 정도로 부드러워지는 것을 보았다.
“조심히…….”
“미아.”
그 순간, 싸늘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마차에 타 있어.”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걸까. 아딜로트가 어느새 근처까지 다가와 있었다.
여행을 위해서 그는 간단한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황제의 정복만큼 화려하진 않았지만, 단출한 차림새는 수려한 이목구비를 오히려 돋보이게 했다.
그 이목구비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아름다운 붉은 눈이 놀랍도록 서늘한 빛을 띠고서 이쪽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
시선이 주는 압박감에 세레니티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났다. 시선이 향한 곳은 페르디안이었는데도 말이다.
페르디안은 세레니티와 달리 먹구름 같은 눈을 조용히 내리깔기만 했다.
그리고, 물러나지 않았다.
“조심히 다녀와라.”
페르디안은 못다 한 말을 끝마쳤다.
“응? 응…….”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미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딜로트의 얼굴은 이제 석고상처럼 굳어 있었다.
미아는 뒤늦게 기류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곤 말했다.
“그, 근데 아딜. 나 아직 인사 다 안 했는데…….”
“나중에 해.”
“그치만…….”
아딜로트의 눈이 미아에게 옮겨갔다. 묘하게 화가 난 듯한 눈빛이었다.
“……나중에 하자.”
분명 어르는 듯한 말인데도 어딘지 초조함이 느껴지는 어조였다.
미아는 좌우로 데구르르 눈을 굴리다,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럼 난 렌에게만 인사하고 마차에 타 있을게.”
미아가 세레니티에게 눈짓하며 자리를 빠져나가려던 때였다. 벼려진 분위기를 깨고 낯선 인물이 나타났다. 그녀를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세레니티였다.
“루넬 씨?”
루넬 피아. 크리소르 황태후의 최측근.
세레니티의 부름에 루넬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무슨 용무지?”
난데없는 그녀의 등장에 아딜로트가 눈살을 찌푸렸다. 손은 어느새 허리춤의 단검 위에 올라가 있었다. 페르디안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미아 님께 황태후 폐하께서 전언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루넬은 자신을 향한 노골적인 적의에도 신경 쓰지 않고 거침없는 걸음걸이로 미아 앞에 섰다.
그녀는 담백하다 못해 무기질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미아 님. 에트루리나로 떠나기 전에 문안 인사를 올리라 하십니다.”
그 말에 미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고, 세레니티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전언이 말하는 바는 명백했다.
‘크리소르 황태후 폐하의 편으로 돌아설 마지막 기회.’
미아도 그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녀의 분홍색 눈이 살짝 떨린 순간.
“마차에 가 있으랬잖아.”
넓은 등이 미아의 앞을 가렸다. 한 걸음으로 루넬에게서 미아를 가로막은 아딜로트는 흘낏 미아를 내려다보곤 루넬을 바라보았다.
“인사는 어렵겠어.”
“…….”
“내가 소유욕이 좀 강해서.”
세레니티는 아딜로트의 등밖에 볼 수 없었지만, 그 순간 범접할 수 없는 무게감을 느꼈다. 고요한 산 같은 등이었다.
“…….”
약간 놀란 듯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미아는 이내 단호하게 눈을 빛냈다. 그녀는 아딜로트의 등 너머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는 쌕 웃었다.
“안 갈래요.”
루넬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 전하겠습니다.”
그리고는 불러왔던 정적만을 남기고 총총걸음으로 떠나갔다.
미아의 말은 이제 크리소르 황태후에게 전해질 테고, 크리소르 황태후는 분노할 것이다. 명백했다. 그녀는 반드시 미아를 죽이려 들 터였다.
“…….”
세레니티는 불안하게 주먹을 쥐었다.
‘미아는 무섭지 않은 걸까?’
그때, 미아가 몸을 홱 돌렸다. 그러고는 세레니티를 꼭 껴안고서 속삭였다.
“렌. 이제 나는 완전히 황태후의 적이 됐을 거야. 렌에게 피해가 갈지도 모르니까 필요하면 몸을 피해. 할아버지에게 말해 놨어.”
“…….”
아주 바빴을 텐데, 언제 그런 것까지 챙긴 걸까.
“……고마워요. 미아.”
“천만에!”
몸을 뗀 미아가 밝게 웃었다.
하지만 세레니티는 아주 미세하게 그녀의 손이 떨리고 있음을 눈치챘다.
‘……두려운 거구나.’
생각해 보면 미아는 늘 살아남는 게 제일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황태후를 완전히 적으로 돌리는 것이 무섭지 않을 리 없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그것을 티 내지 않았다. 자신이 느끼는 두려움을 타인에게 전염시키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지키고 싶어. 미아가 무서워하지 않게……. 다치지 않게.’
그 순간, 내내 세레니티를 괴롭히던 고민이 풀렸다.
자신은 미아를 돕고 싶었고, 미아가 다치지 않길 바랐고, 미아가 계속 웃을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니 그녀는 의원이 되어야 했다.
* * *
황궁 레벤토르의 황태후 궁.
정원에서 차를 마시고 있던 크리소르가 멈칫했다.
“미아 셀레스티얼이…… 그냥 갔다고?”
“예.”
“내가 부른다는 말을 듣고도 말인가?”
“예.”
루넬이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잠시 반응이 없던 크리소르는 이내 날카로운 웃음을 터뜨렸다.
“하……! 하하하! 하하…….”
그리고 웃음이 점점 잦아드는가 싶더니, 그녀는 별안간 손을 휘둘렀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게야!”
와장창!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찻잔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크리소르는 찻주전자를 루넬을 향해 던졌다.
퍽!
정통으로 찻주전자를 맞은 루넬의 머리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하지만 루넬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가만히 서서 눈을 내리깔았다.
크리소르 역시 루넬이 다치든 말든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신경질적인 비명을 내질렀다.
“그 계집애……. 그 망할 년!”
한참을 그렇게 악쓰던 크리소르가 녹색 눈을 번득이며 어딘가를 향해 외쳤다.
“율리시즈!”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정원 한 귀퉁이에서 언제부터 있었는지도 모를 사람 한 명이 걸어 나왔다. 갈색 머리에 작은 체구, 흐릿한 이목구비를 가진 시녀였다.
“……부르셨나요?”
사근사근한 여자의 목소리에 크리소르가 얼굴을 찌푸렸다.
“여자로도 변장하나? 취향이 고약하군.”
크리소르의 말에도 시녀로 변장한 율리시즈는 사르르 미소만 지었다. 그 모습에 크리소르가 더더욱 눈살을 찌푸렸다.
‘천민 주제에.’
가장 뛰어난 암살자라고 해서 고용했으나, 자신을 아래로 보는 듯한 저 눈은 정말이지 찔러 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크리소르는 서둘러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노호를 질렀다.
“그 계집애가 황제 편에 붙었어! 말이 다르지 않나!”
“말이, 다르다고요……?”
“내게 거역할 기미는 없다고 하지 않았어!”
그녀의 말에 율리시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제 눈에, 미아 셀레스티얼은 당신에게 충성스러운 것처럼 보였는데요……. 수상한 행동도, 하지 않았고요…….”
“지금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아니죠……. 거짓말이 아니잖아요? 마법이 걸린 계약서에 서명하라고 한 건, 당신이면서…….”
율리시즈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키득키득 웃었다. 미묘하게 조롱기가 느껴지는 웃음소리였다.
“하……!”
크리소르는 이를 갈면서도 반박할 수 없었다. 율리시즈의 말대로 암살자와의 계약은 늘 마법으로 이루어진다. 고대 술식이 아니면 그걸 깨뜨릴 수는 없다.
‘아니면 혹시 마법을 깼다거나?’
하지만 크리소르는 이내 그 생각을 접었다. 고대 술식은 이제 번개 치는 로디움의 엘프만이 알고 있다고 전해진다.
게다가, 무엇보다 율리시즈는 절대 미아 셀레스티얼과 손잡을 수 없는 인간이었다.
“그래. 네가 배신했을 리는 없지…….”
그녀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럴 거라면 애초에 셀레스티얼 백작을 죽이지도 않았을 테니.”
그 순간, 내내 고요하던 율리시즈의 눈이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