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미아는 저도 모르게 두 눈을 감아 버렸다.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그녀의 머릿속에 그간 지로티 공작이 보여 준 모습들이 떠올랐다. 이제야 모든 것이 완벽하게 이해가 되었다.
그가 왜 늘 술병을 끼고 사는지.
왜 누구도 그걸 나무라지 않는지.
왜 그가 공작이면서 의원이 되었는지.
왜 자신이 독에 당했을 때 그렇게 안절부절못했는지까지도.
“……술이 달구만.”
지로티 공작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몸을 세우곤 마지막 술을 털어 마셨다. 빈 술병이 테이블 위에 올라앉았다.
지로티 공작이 공허한 눈으로 병 끝에 방울진 술을 바라보다 물었다.
“이제 나와 폐하가 당장이라도 군사를 끌고 크리소르의 목을 치지 않는 이유를 알겠는가?”
“……네.”
미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엠브라를 떠올렸다.
엠브라는 부모님의 원수를 갚기 위해 크리소르와 가장 가까운 곳에 도달했다. 그리고 그녀를 천천히 중독시켰다.
미아의 입에서 미끄러지듯 답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쉽게 보내 줄 수 없으니까.”
“정답일세.”
지로티 공작이 지금까지와는 결이 다른 무겁고 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도드라진 눈썹 뼈 아래의 검은 눈에서는 감히 측량할 수조차 없는 한이 느껴졌다.
“우리는 절대 크리소르를 곱게 보내 줄 생각이 없다네. 그리고 당연히 그로 인한 위험까지도 감수하고 있지. 그만큼 원한이 깊다고 할 수 있지만…….”
지로티 공작이 잠시 고개를 떨궜다.
그리고 그가 다시 미아를 바라보았을 때, 어느새 그의 눈에는 슬픔만 남아 있었다.
“하지만 넌 아니지 않으니.”
“…….”
“얘야. 넌 어디 가서도 사랑받을 아이란다. 네 아비에게 그다지 정을 느끼는 것 같지도 않으니, 여길 떠나서 행복하게 살면 그만이야. 네가 폐하를 좋아하는 건 알지만, 고작 그것 때문에 네 목숨을 걸진 않았으면 좋겠구나.”
“…….”
“나는 네가 죽지도, 위험해지지도 않았으면 좋겠단다. 아가.”
단어 하나하나에 올올이 스민 슬픔이 미아의 말문을 막았다.
자식이 죽지 않길 바라는 부모의 마음.
그건 미아가 너무나도 잘 아는 것이었다.
‘――야. 엄마 믿지? 조금만 참으면 의사 선생님들이 고쳐 주실 거야. 그러면 그때 엄마랑 뭐든 하자.’
미아는 그 말에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엄마. 난 지금도 좋다니까? 남들 공부할 때 노는 거 너무 좋아!’
그때 미아의 말은 전부 거짓말이었다. 그녀가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싫어. 무서워. 살고 싶어.’였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아.’
지금 이 순간, 미아는 처음으로 자신이 이곳에 있어서 다행이라고 느꼈다.
“전 안 죽어요.”
진심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러니까 술 끊으실 거죠?”
그녀는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지로티 공작을 향해 활짝 웃었다.
“…….”
그 말에 지로티 공작은 눈을 크게 뜰 뿐 반응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그의 눈에 당황과 우려가 비쳤다.
“자네, 아직 내 말을 이해하지…….”
“저만큼 살고 싶어 하는 사람 없다니까요? 누가 살려 줄 테니 할아버지 사진 밟으라고 하면 바로 밟을 건데! 밟고서 침도 뱉을 건데!?”
“그, 그건 상관없네만, 지금 이 일의 심각성을…….”
“지금 할아버지가 바퀴벌레보다 악착같은 제 걱정이나 하실 때예요!?”
미아가 버럭 외쳤다. 지로티 공작은 다시 멍해졌다.
“그럼 무슨 걱정을…….”
“이렇게 귀여운 손녀가 언젠간 결혼을 할 텐데!”
“자네 너무 뻔뻔해진…….”
“그런데 이 손녀는 조실부모해서! 같이 입장해 줄 어른이 없는데!”
“셀레스티얼 백작은 아직 안 죽었…….”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같이 들어가 줘야 하는데! 그런 사람이 술주정뱅이면 하객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뭐?”
지로티 공작은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얼굴이었다.
미아가 그런 지로티 공작을 향해 당당하게 외쳤다.
“아시겠어요? 전 할아버지를 팔아먹어서라도 살아남을 거니까! 몸값 잘 올려놓고 계시라고요! 간장, 신장, 폐! 전부 건강하게!”
“…….”
미아의 마지막 외침을 끝으로 있을 리 없는 바람이 휭 하고 스쳐 지나갔다.
‘……위로가 좀 패륜적이었나?’
“그, 그러니까 제 말은…….”
“……그런가.”
미아가 찔끔해 말을 덧붙이려던 순간, 지로티 공작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가 스르르 고개를 돌리더니, 유리 정원의 어드메를 바라보았다. 불타서 재가 된 시체 같던 눈에 희미하게 생기가 스미기 시작하더니, 그는 이내 너털웃음을 지었다.
“하하하…….”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는 정원에서 늙은 공작의 웃음만이 오래 이어졌다.
그의 웃음이 잦아들었을 때, 그는 모든 희로애락이 다 담긴 듯한 표정으로 가만히 미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난 아주 오래 살아야겠군? 자네가 날 팔아먹는 꼴을 보려면 말일세.”
잠시 머뭇거린 미아가 당차게 외쳤다.
“당연하죠!”
그 맹랑하고 당돌한 대답에 지로티 공작은 깨달았다. 어째서 황제가 그녀에게 이길 수 없는지를.
‘신부 입장이라니.’
지로티 공작이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가당키나 한가?
복수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한 삶이었다.
그런데 미아는 제멋대로 거기에 끼어들어 너는 무조건 행복해질 거니까 마음 단단히 먹고 있으라며 강짜를 놓았다.
아주 오랜만에 느껴 보는 기분 좋은 참견에 지로티 공작은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그래……. 악착같이 살아남아 주게. 그 자체로 누군가에겐 구원일 테니.”
* * *
지로티 공작과의 대화가 끝난 뒤.
나선 정원에서 세레니티는 홀로 생각에 잠겼다.
미아는 에트루리나에 가기 전에 처리해야 할 일이 있다며 상무부로 달려간 지 오래였다.
‘아마 또 뭔가 어려운 일을 혼자 해결하는 중이겠지.’
자신이 아직 부족해 도움이 될 수 없는 게 안타까웠다. 자신이 좀 더 능력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이젠 무슨 일이 있으면 말해 주겠다고 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자 가슴이 콩콩 뛰었다. 세레니티는 가만히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미아를 만나고 정말 많은 것이 바뀌었다. 공부를 시작했고, 가문을 나왔고, 꿈이란 걸 생각하게 되었고…….
전부 듀레인 남작가에 있을 땐 상상도 하지 못한 일들이었다.
‘물론 사람들의 어두운 일면도 알게 되었지만.’
막 들었던 지로티 공작의 이야기가 다시금 떠올랐다. 세레니티의 얼굴에도 수심이 짙어졌다.
크리소르 황태후가 권력욕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은 그녀도 전부터 알고 있었다.
레아 황비가 죽었을 때, 아주 잠깐이지만 레아 황비의 죽음이 황태후의 계략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돌기도 했다. 금방 사라지긴 했지만 말이다.
현 지로티 공작의 아들 부처가 황태후의 초대를 받고 돌아가는 길에 죽은 사건도 귀족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다.
다만 황태후의 세력이 워낙에 강성하여 쉽사리 입에 올리지 못할 뿐.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함부로 사람을 판단하고 싶지 않았지만, 슬픈 점은 세레니티가 보는 황태후 역시도 충분히 그런 짓을 할 만한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폐하 쪽이 오히려 소문과 정반대셨지.’
세레니티는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내가 미아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그때, 멍하니 정원을 산책하던 세레니티의 눈에 누군가 눈에 띄었다. 황태후의 측근 시녀인 루넬이었다.
“루넬 씨.”
세레니티가 종종걸음치는 루넬에게 다가갔다. 면포를 들고 이동하던 루넬은 세레니티를 보곤 허리를 굽혔다.
“안녕하십니까, 듀레인 님.”
세레니티가 면포를 흘낏 넘겨보았다. 이러한 면포는 보통 환자의 몸을 닦을 때 쓴다.
“황태후 폐하께 가시는 길인가 봐요?”
“예.”
딱딱하고 건조한 대답이었다.
검은 머리를 깔끔하게 넘기고 단단히 틀어 올린 루넬은, 사용인들 사이에서도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다는 평을 받는 사람이었다. 크리소르 황태후가 크라우스 공녀였을 적부터 그녀를 모신 사람이기도 했다.
세레니티의 눈에도 루넬은 진심으로 크리소르를 걱정하는 사람이었다. 루넬을 지긋이 응시하던 세레니티가 말했다.
“황태후 폐하께선 요즘 어떠신가요? 공부가 바빠 통 찾아뵙지 못했네요.”
“무탈하십니다.”
루넬이 무심한 태도로 답했다.
그녀의 대답을 듣고서야 세레니티는 아차 하고 우물쩍 미소를 지었다.
“제가 질문을 잘못했네요. 나쁜 소식을 바라고 드린 말씀은 아니었는데……. 저도 황태후 폐하께서 건강하시길 바라요.”
이건 진심이었다. 세레니티는 누구든 아프지 않길 바랐다. 잘못한 게 있다면 살아서 건강하게 죗값을 받으면 그만이다.
그 말에 루넬의 바위 같던 시선이 조금 누그러진 듯했다.
“……감사합니다.”
“감사는요. 저는 하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세레니티가 그렇게 말하고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다시 ‘자신이 뭘 해야 미아에게 도움이 될지’에 대해 떠올랐던 것이다.
루넬은 그 모습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드물게도 먼저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는…… 듀레인 님을 좋아하십니다. 보고 있기만 해도 소녀 때로 돌아간 것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폐하께서요?”
“예. 그때의 황태후 폐하는…… 정말로 순수하고 총기 넘치는 분이셨지요.”
그렇게 말하는 루넬의 눈빛이 꿈꾸듯 몽롱했다.
황태후가 크라우스 공녀였던 시절에 정말로 그러했다는 이야기는 세레니티도 들은 바가 있어, 그녀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들었어요. 정말로 총명한 분이셨다고요. 라지푸트의 만리타 장군에게 일침을 놓으셨다는 일화는 저도 듣고 감탄했어요.”
그 말에 루넬이 희미하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걸 아시는군요. 요즘 젊은 사람들은 모르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좋은 것과 값진 것, 훌륭한 것은 시대를 가리지 않으니까요.”
“맞습니다. 폐하께선 늘 그런 분이셨죠. 아직도 만리타 장군은 폐하께 매년 신년 인사를 보내오곤 하죠.”
“와, 정말요?”
세레니티가 손뼉 치며 감탄한 순간, 루넬이 뒤늦게 흠칫했다.
그녀의 얼굴에 순식간에 아차 하는 기색이 스쳐 지나가더니, 루넬은 다시 날카롭게 말했다.
“……그가 황태후 폐하를 존경하는 마음에 자진하여 그랬다는 뜻입니다. 방금 말은 잊어 주시길.”
사정은 모르지만 어쩐지 약간 곤란해 하는 듯하여, 세레니티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은 끝났지만 아직 여론은 좋지 않으니까요. 남이 들어서 좋을 건 없는 이야기겠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테니 안심하세요.”
일순 세레니티를 바라보는 루넬의 청록색 눈이 흔들렸다.
“……부탁드립니다.”
그러나 곧, 낮은 목소리로 되돌아온 루넬이 정중하게 말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살펴 가시길.”
루넬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황태후궁으로 향하는 것이리라.
“…….”
세레니티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황립 도서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미래에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다면, 지금은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