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뭔가 보시락거리는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시즈?”
“…….”
“시즈야? 서서 자니? 이러고 자니?”
미아가 재차 물었다.
율리시즈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은 채 어리광부리듯 좀 더 몸을 붙여 왔다. 덕분에 미아는 멀뚱히 서서 눈만 깜빡일 수밖에 없었다.
‘몸이 꽤 탄탄하네.’
미아가 무심결에 생각했다. 키는 그녀와 비슷하지만, 직업 특성인지 온몸이 단단했다.
꼭 치타한테 끌어안긴 기분이었다. 길고 날씬하고 매끈한 부분이 특히나.
‘아딜은 등이 넓어서 그런지 좀 사자 느낌이었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미아는 별생각 없이 율리시즈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왜 그래? 힘들어? 속상한 일 있어?”
그러자 갑자기 한숨이 들려왔다.
“……그런 게 아니라.”
“음! 알았다! 혹시 너도 무도회 가고 싶었어?”
“…….”
“보기만 하니까 심심했지? 에그, 그러게 누가 진로 선택을 그렇게 함부로 하래? 밤에 일하면 비타민D 합성도 못 하잖아! 원래 사람이 햇빛을 안 보면 우울해지고, 어? 바이오 리듬도…….”
그제야 율리시즈가 스르르 몸을 떼어 냈다. 그는 약간 허무한 얼굴이었다.
“미아 님은…… 참…….”
“귀엽다고?”
“…….”
말이나 못 하면…….
율리시즈가 중얼거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왜 나오신 거예요……? 황제랑…… 재밌게 노시는 줄 알았는데.”
묘하게 가시 돋친 듯한 말이었다.
“다 놀고 나왔는데? 도와줘서 고마워! 그런데 너 진짜 무슨 마법사인 거 아냐?”
그러나 원래 미아는 어설픈 가시에는 타격도 안 받는 사람이었다.
율리시즈가 마지못해 어깨를 으쓱했다.
“마법사는 아니지만…… 비슷해요. 가문의…… 능력이라.”
“마법사가 암살자라니 사기야.”
“그 정도니까, 오르퀘니나 최고의 정보 길드라는 호칭을 얻었겠죠……?”
“어쩐지 황궁을 그렇게 쉽게 들락날락하더라니.”
율리시즈가 재차 어깨를 으쓱했다.
‘어쩐지 오늘은 기분이 별로 같네.’
미아는 데면데면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조사하는데 자신이 훼방이라도 놓은 걸까?
‘이럴 땐 깔끔하게 비즈니스 토크만 하는 게 최고지.’
미아가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혹시 아까 시즈도 들었어?”
“네에. 철광석, 말이죠…….”
“응. 내 생각엔 그라스 후작의 에트루리나 지원금 횡령을 눈치챈 호흐실트 후작이 먼저 거래를 제안한 것 같아.”
“그렇네요……. 빈민을 구제하라고 시켜 놨더니, 자기 자신을 구제하고 있네요…….”
그렇게 말하는 율리시즈의 갈색 눈이 점점 무감정해지고 차가워졌다. 소매가 움찔거리는 것이, 당장이라도 달려가 호흐실트 후작의 뒤통수에 비수를 꽂아 넣고 싶어 하는 듯했다.
미아가 저도 모르게 율리시즈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바로 죽이면 안 되는 거 알지? 연락책, 공급책, 중간책, 다 잡아야 하는 거 알지?”
“알죠…….”
“그런 것치곤 눈이 맛이 갔다?”
“…….”
율리시즈가 쌕 웃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팔을 잡은 미아의 손을 부드럽게 밀어냈다.
“암살자 팔 잡는 거 아니에요……. 위험하니까…….”
“그런 애가 벽으로 밀치고 안 놔줘?”
그 말에 율리시즈는 물끄러미 미아를 바라보더니 헛웃음을 흘렸다.
“미워 죽겠네…….”
“엉?”
“아니에요…….”
율리시즈가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 호흐실트 후작의 집무실에는 딱히 수상한 게 없었어요……. 그의 성격을 고려하면, 여기서 단서를 두진 않았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럼 어떻게 할래? 며칠 더 머무르면서 조사해 보는 게 나을까?”
그 말에 율리시즈가 빤히 미아를 쳐다보았다.
“그게 낫겠다고 하면……, 황제도 계속 미아 님과 함께 있나요……?”
음. 잠시 고민한 미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지 않을까? 나 혼자 와 있는 건 이상하고.”
“…….”
기분 탓인가? 갑자기 좀 추워진 것 같은데.
미아가 양팔을 슥슥 문질렀다.
“시즈야?”
당황한 미아가 율리시즈의 이름을 불렀고, 그는 대답 없이 소매로 입을 가린 후 눈을 내리깔았다.
“역시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그래? 그럼 그러지 뭐!”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미아가 밝게 동의했다.
율리시즈가 작게 픽 하고 웃었다.
“네에……. 그럼 제가 길드를 이용해서 호흐실트 후작의 뒤를…….”
“아냐. 그보다 시즈는 길드를 이용해서 에트루리나에서 반출된 철광석이 어디로 빼돌려지는지를 파악해 줘. 서류상의 증거라면 내가 모아 볼게!”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미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율리시즈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어떻게 하시게요……?”
“어떻게 하긴! 호흐실트 후작은 당연히 철광석을 세빌 상회를 통해서 거래하고 있을 거고, 그러면 서류상으로 뭔가 흔적이 남아 있겠지! 그라스 후작도 마찬가지고.”
덧붙인 설명에도 율리시즈는 이해가 가지 않는 눈치였다.
“분명 장부를 조작했을 텐데요……. 그리고 그런 자료는 황실의 상무부에서 관리할 텐데, 상무부의 책임자는 크라우스 공작이라 미아 님이 접근하시기에는…….”
“쯧쯧!”
율리시즈의 말에 미아는 손가락 하나를 올려 좌우로 흔들었다.
“모르고 보면 모를까, 뭐가 있다는 걸 아는 상태에선 조사하면 다 나오는 법이야. 게다가!”
씩 웃은 미아가 으스대며 뭔가를 떠올렸다.
“내가 너무 귀여운 나머지 마침 괜찮은 인맥이 생겼거든!”
* * *
다음 날 새벽.
잠자리가 달라서인지 아딜로트도 미아도 일찍 눈을 떴다. 둘은 암묵적으로 전날 밤에 있던 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올리버랑 제인을 불렀으니까 아침 식사는 레벤토르에 돌아가서 하는 게 낫겠어.”
아침인데도 그림처럼 아름다운 아딜로트를 보며 미아는 새실새실 웃다가 입이 찢어져라 하품했다.
“졸려?”
그 모습을 본 아딜로트가 물었다. 미아가 눈을 비비며 답했다.
“잠을 못 자서…….”
“왜?”
“미남이 옆에 있으니 떨리더라고…….”
“그게 거짓말인 건 잘 알겠네.”
“한 번 보고 두 번 봐도 자꾸만 보고 싶네…….”
“이상한 노래 부르지 말고 일어나기나 해. 곧 제인이 올 테니까.”
“말은 그렇게 하면서 입꼬리 올라가고 있거든?”
당황한 아딜로트가 입을 가린 사이 미아는 킬킬 웃으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밥맛은 역시 황궁이 최고지! 황궁 요리사 진짜 요리 잘하는 거 같아요!”
“죽기 싫으면 잘해야지.”
“에이……. 아딜은 꼭 말을 해도 진짜…….”
아침부터 초를 치는 아딜로트의 말에 미아가 뾰로통하게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똑똑.
“제인 씨인가 보다!”
문에서 들린 소리에 그녀가 다람쥐처럼 호다닥 문으로 다가갔다.
“…….”
그에 아딜로트는 옷깃을 정리하며 아무 생각 없이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미아가 입고 있던 드레스에 시선이 머물렀다.
‘뭔가 위화감이…….’
그런 생각을 하던 아딜로트가 불현듯 뭔가를 깨달았다.
틀어 올린 분홍색 머리카락 아래, 목 뒤를 감싼 진줏빛 리본.
리본을 묶은 모양이 어젯밤 보았을 때와 달라져 있었다.
“…….”
그 의미를 깨달은 아딜로트의 몸이 천천히 굳었다.
어젯밤 그는 잠깐 깊게 잠든 것 빼고는 계속 얕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사이 미아가 일어난 적은 없었다.
그러니까 자신이 깊게 잠들었을 때, 리본이 풀린 적이 있다는 소리였다.
그걸 깨달은 아딜로트는 이성적으로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쾅!
막 열리고 있던 문은 아딜로트의 손에 의해 닫혀 버렸다.
“아, 아딜?”
제인에게 문을 열어 주다 봉변당한 미아가 놀라 몸을 돌리려던 때.
아딜로트의 손이 천천히 미아의 목덜미로 올라왔다. 피부를 스치는 감각에 미아는 순식간에 바짝 굳었다.
그 상태로 아딜로트가 낮게 물었다.
“어제 누구랑 있었어?”
“……흐억.”
미아가 보다 뻣뻣하게 굳었다. 언뜻 보이는 옆모습으로 눈을 굴리는 게 보였다.
“하.”
아딜로트의 입에서 칼날 같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그녀는 어제 자신을 재우고, 다른 누군가와 만났다.
‘그럴 수 있다는 걸 알아. 알지만…….’
그런 대화도 해 놓고.
“…….”
단순히 배신감이라고 표현하기엔 보다 저열한 감정이 발끝에서부터 천천히 차오르기 시작했다.
아딜로트가 침묵하자, 미아는 당황한 채 뭔가를 주절거렸다.
“그, 그게 밤에 잠이 안 와서 산책하는데 길을 잃어서……. 시즈가 도와줬어요! 지, 진짜 그것뿐!”
“시즈라면 그 암살자?”
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둘이서 산책을 했다.”
아딜로트의 고개가 천천히 미아에게 기울어졌다.
미아는 어깨를 움찔거리며 반대 방향으로 피했으나 얼마 가지 못했다. 아딜로트가 리본 끝을 쥐고 있었으니까.
“정말 그것뿐이야?”
숨이 닿는 귓가에서 낮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미아의 등을 타고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무, 뭘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진짜예요…….”
미아가 잔뜩 몸을 웅크린 채 울먹이며 답했다. 손가락과 얽혀 풀릴 듯 말 듯 헐렁해진 리본이 신경 쓰이는 눈치였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에서는 억울함이 엿보였다.
“…….”
거짓말 같지는 않은데.
‘만약 미아가 모르는 거라면…….’
그렇다면 예의 ‘율리시즈’가, 미아 몰래 굳이 흔적을 남겨 놓았다는 뜻이었다.
미아는 모르고, 자신은 눈치챌 만한 방법으로.
그건 말하자면.
‘선전포고.’
문을 짚은 손에 잠시 힘이 들어갔다.
아딜로트는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말없이 미아의 목을 감싼 리본을 고쳐 매 주었다.
“아, 아딜……?”
미아가 불안하게 물었다.
그녀를 향해 아딜로트는 산뜻하게 미소 지었다.
“산책 갈래?”
“……넹?”
“산책 가자고.”
“어, 어디로요……?”
겁먹은 미아를 바라보며, 아딜로트는 어딘가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누군가’에게 말했다.
“에트루리나.”
선전포고라면 받아 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