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살아 있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살아남으니까 욕심이 생겨.”
“…….”
아딜로트는 말이 없었다.
그러나 희미하게 들려오는 ‘평범…….’이라는 중얼거림에 미아는 저도 모르게 조금 웃고 말았다.
‘오르퀘니나에서 제일 평범이랑 거리에 먼 게 아딜인데 말이야.’
역시 괜한 소리를 했나 봐.
잔뜩 경직된 분위기를 풀기 위해 미아가 웃으며 아딜로트의 등을 쿡 하고 찌를 때였다.
“그보다 아딜, 이제―.”
“뭔지 조금은 알 것 같아.”
“응?”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것 같던 아딜로트가 툭 말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궁에 나 혼자 남았을 때, 나도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서.”
그 말에 미아는 굳어 버렸다. 곧 그녀의 눈이 흐려졌다.
‘그러네. 아딜도…….’
<장미 정원의 세레니티>에서 아딜로트의 과거는 간단하게 다루어질 뿐이지만, 그때 아딜로트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정도는 미아도 알 수 있었다.
죽음 앞에서 발버둥 치며 평온한 일상을 바라던 건 자신뿐만이 아니었던 거다.
다음 순간, 아딜로트가 낮게 말했다.
“힘들었겠네.”
“…….”
건조하지만 다정한 음성에 미아는 문득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야. 많이 아프지?’
‘아니? 하나도 안 아픈데? 다른 애들은 맨날 힘들게 공부하는데 난 안 그래도 되니까 너무 좋은데!?’
힘들었냐고 물어보면, 힘들지 않다고 대답했을 텐데.
아딜로트는 그녀가 그렇게 대답하리란 것을 짐작이라도 한 것 같았다.
아니, 했겠지.
그 역시도 황태후의 위협 속에서 늘 괜찮은 점, 약점이라곤 없는 척 해야 했을 테니까.
그걸 생각하자 가슴 한 귀퉁이가 먹먹해져 왔다.
‘……기분이 이상해.’
미아가 콧잔등을 찡그린 채 눈에 힘을 주었다. 뭔가를 말해야 하는데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미아?”
아니나 다를까 아딜로트가 몸을 돌렸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보고 멈칫하더니, 놀라 눈을 깜빡였다.
미아가 겨우 입을 열었다.
“나, 나 표정 많이 이상하지?”
아딜로트가 심각한 표정으로 답했다.
“응. 좀.”
“……지금은 평소처럼 귀엽다고 해 줘야 하는 순간이거든!?”
미아는 그렇게 외치고서 저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이상하던 기분도 순식간에 날아갔다.
“뭐. 그것도 맞고.”
아딜로트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걸 끝으로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미아는 가만히 코앞에 놓인 아딜로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수려한 얼굴 위로 잔잔하고 묵직한 붉은 눈이 지긋이 자신을 담고 있었다.
그 눈을 보며, 미아는 어쩐지 처음으로 아딜로트와 제대로 마주한 것 같다고 느꼈다.
소설 속의 남자주인공 아딜로트 겐첸 슈뢰더와 소설에 빙의한 미아 셀레스티얼이 아니라.
정말 그냥 사람 대 사람으로서.
“이건 비밀인데.”
이윽고 아딜로트가 낮게 속삭였다.
“나도 이제 다른 게 욕심나.”
그렇게 말하는 아딜로트의 두 눈에는 끝까지 미아만이 담겨 있을 뿐이었다.
* * *
곤히 숨소리를 내며 누워 있던 미아는 어느 순간 눈을 번쩍 떴다.
‘자는 거겠지?’
그녀는 살금살금 침대를 빠져나왔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잠든 아딜로트를 내려다보며, 미아는 괜히 자신의 뺨을 어루만졌다.
‘나 미쳤나 봐! 진짜 별소리를 다 했네.’
자기감정을 토로하는 건 그다지 익숙하지 않았다. 말해 봤자 남이 해결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듣는 사람만 더 힘겨워질 테니까.
‘그치만 좀 후련한가……?’
누군가에게 공감받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안 했는데.
차근차근 생각을 이어 가던 미아의 머릿속에 마지막으로 떠오른 것은 자신을 바라보던 붉은 눈이었다.
“흠, 큼!”
미아는 재빨리 헛기침하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러고는 거울을 보며 머리를 정돈했다. 단단하게 틀어 올린 탓에 다행히도 그렇게 망가지지 않은 상태였다.
‘좋아! 우리 남주는 자게 두고, 가 볼까.’
후련은 후련이고 일은 일.
미아가 조심스레 방문을 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
복도는 조용했다. 그녀는 검은 드레스 자락을 들고서 살금살금 중앙관으로 향했다.
보통 가주의 방은 중앙관에 있었다. 손님이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게 흔한 일은 아니지만, 누가 발견하면 잠이 안 와서 산책 중이었다고 둘러대면 되리라.
‘시즈는 어디려나?’
미아가 조용한 복도를 살폈다. 분명 어딘가에 율리시즈가 있을 터였다.
‘조사는 잘 되고 있겠지?’
율리시즈의 능력이야 워낙에 뛰어나니 그다지 걱정이 되진 않았다. 오히려 그 덕분에 미아의 일도 매우 쉬워진 편이었다.
그라스 후작이 황태후의 첨병인 이상 율리시즈의 목적은 미아와 같다고 할 수도 있었으니까.
미아는 손쉽게 중앙관 3층에 도달했다.
‘이거 너무 쉬운데? 뭐, 그렇다고 정말 타이밍 좋게 뭔가를 발견할 거라고는 기대도 안―.’
“연락이 왔다고?”
사사삭.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미아는 바퀴벌레보다 빠르게 어둠 속에 몸을 숨겼다.
‘호흐실트 후작?’
무도회에서 인사했을 때와 달리 장난기가 싹 빠진 날카로운 음색이었다.
미아가 조심스레 소리가 들린 곳으로 다가갔다. 가주의 집무실로 보이는 방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수수료를 5% 더 높여 달라고 하십니다.”
“지금 내주는 가격도 꽤 큰 금액인 걸 모르나?”
미아는 침을 삼키며, 문틈으로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방에 있는 건 호흐실트 후작과 낯선 사내였다.
사내는 로브를 쓰고 있어서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옷차림으로 보아 호흐실트 후작가의 하인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호흐실트 후작이 짜증 섞인 어조로 말했다.
“욕심 많은 작자 같으니. 그만큼 해 먹고도 더 달라는 건가, 지금?”
“하지만 각하께서 하시는 일을 눈감아 주고 계신…….”
“눈을 감아 줘? 누가? 네 주인이 횡령하고 있는 걸 내가 눈감아 주고 있다고는 생각 안 하는 모양인가 봐. 일부러 무도회 날 찾아와서 정신없는 사이에 올려 받을 속셈인가 본데, 그만두는 게 좋을걸. 약점을 잡은 건 그쪽만이 아니잖아?”
“…….”
“하던 대로 해. 네 주인은 적당히 해 먹으면서 나한테 에트루리나의 철광석을 팔고, 나는 그걸 좋은 곳에 쓰고. 그거면 되는 거야.”
미아는 좀 더 숨을 죽였다. 대화의 내용이 심상치 않았다.
‘이거, 그라스 후작이랑 에트루리나 광산 이야기 맞지?’
아무래도 에트루리나의 광산 개발을 맡은 그라스 후작이 철광석을 빼돌리고, 호흐실트 후작이 그걸 팔아치우고 있는 듯했다.
명백한 범죄였다. 철광석은 무기의 재료고, 국방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모두 황실에서 관리하는 자원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황실이 무서워서라도 하지 않을 일이지만, 세빌 상회의 인맥으로 판매처를 확보한 모양이었다.
‘이 새끼들……. 나라 좀 좋게 만들쟀더니 그걸 가지고 지들 배를 불리고 있어?’
미아가 좀 더 귀를 기울였지만, 아쉽게도 대화는 이미 마무리 단계에 있었다.
“……알겠습니다. 주인님껜 그리 전하겠습니다.”
로브를 쓴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리고 이딴 일로 찾아오지 말라고도 전해. 황제의 그림자가 뒤라도 밟으면 골치 아파지니까.”
“예.”
곧 두 사람이 곧 방을 나설 채비를 하는 것이 보였다.
‘수, 숨어야 해!’
미아가 재빨리 드레스를 움켜쥐고 복도 모퉁이를 돌았다. 하지만 운 나쁘게도 호흐실트 후작과 낯선 사내가 향하는 방향 역시 그쪽이었다.
‘악! 왜 이쪽으로 오냐고!’
하필 일직선 복도였다. 숨을 곳이라곤 없었다. 이미 뒤통수까지 발소리가 달라붙은 상황이었다.
‘안 돼! 들킨―’
그때였다.
“쉿.”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 미아의 입을 막았다.
‘시즈!’
순식간에 나타난 율리시즈가 미아를 끌어안고 벽으로 밀쳤다. 그의 손가락이 곧장 피아노를 치듯 빠르게 허공에 뭔가를 그렸다.
이윽고 손가락 끝의 술식에서 짧은 빛이 터져 나온 순간.
“그러고 보니 황제는……, 음?”
모퉁이에서 호흐실트 후작이 돌아 나왔다. 미아는 숨을 참은 채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녀를 지켜보았다.
호흐실트 후작은 정확히 미아와 율리시즈가 끌어안고 있는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호흐실트 후작 옆의 남자가 의아하게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각하?”
“아니……. 방금 빛이 보이지 않았나?”
“창밖의 등이 반사된 게 아닐까요? 오늘은 무도회 때문에 평소보다 화려하니까 말입니다.”
“……그래?”
호흐실트 후작은 이내 관심이 사라졌다는 듯이 시선을 거두었다.
“아무튼, 잘 전하라고. 황제가 알면 그쪽이나 나나 끝장이야. 서로 이득을 보려면 주의를 해야지. 게다가 너희 주인도 알지 않니? 내가 황제파인 척하고 있는 이상, 여차할 때 가장 위험해지는 건 나라는 걸. 그걸 알고도 5%를 더 받겠다고? 양심도 없는 작자 같으니.”
“…….”
“그리고 적당히 해 처먹으라고 전해. 황제의 그림자가 에트루리나를 조사 중인 것 같다는 정보가 있었으니.”
“예?”
로브를 쓴 사내가 당황하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겠습니다. 주인님께 전달하겠습니다.”
“그러시든가.”
질린다는 듯이 혀를 차는 호흐실트 후작과 사내가 코앞에서 스쳐 지나갔다. 후작의 향수 냄새까지 맡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그 둘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도 한참 뒤.
미아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흐아……. 깜짝 놀랐네!”
얼마나 놀랐는지 등에 식은땀이 다 흘렀다.
‘들켰으면 진짜 죽었겠다!’
하지만 덕분에 알아낸 게 많았다.
첫째, 그라스 후작은 에트루리나 개발 지원금을 횡령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철광석을 빼돌리고 있다.
둘째, 호흐실트 후작이 그걸 갖다 팔고 있다.
셋째, 호흐실트 후작은 황제파인 척 하고 있다…….
‘즉, 태후파의 스파이라는 거지.’
원작에서도 나온 적 없는 이야기였다.
아무래도 원작에서도 내내 사실은 황태후 편이었는데, 아딜로트가 승기를 잡자 아딜로트에게 붙은 모양이었다.
그 와중에도 크리소르 황태후에게는 그걸 잘 숨겨서 그녀가 죽기 직전까지 자신의 정체를 누설하지 않게끔 한 듯했고.
잠시 고민에 빠졌던 미아는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그냥 나란히 셋 다 조지면 되겠군!’
계산을 마친 미아가 율리시즈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그가 아직도 자신을 반쯤 끌어안고 있었던 것이다.
“시즈! 다 갔으니까 얘기 좀 해.”
“…….”
하지만 율리시즈는 잠깐 움찔했을 뿐, 미아를 놓아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