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후작에게 물어보지.”
그는 자꾸 귓가에서 나른한 숨을 내뱉는 미아의 어깨를 끌어안은 후 호흐실트 후작에게 다가갔다.
“후작.”
멀리서 그 광경을 재미있다는 듯이 지켜보고 있던 호흐실트 후작이 모르는 척 싱긋 웃었다.
“예. 폐하.”
“내 동행인이 조금 취한 듯한데, 방을 빌릴 수 있겠나?”
호흐실트 후작은 보라색 눈을 장난스럽게 빛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눈치였지만, 너무 많은 사람이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아쉽다는 얼굴로 황제의 품에서 고르륵거리고 있는 미아를 흘끗 쳐다보고는 시원스레 미소 지었다.
“물론이죠.”
그 순간 아딜로트의 품에 안겨 있던 미아가 남몰래 눈을 빛냈다.
* * *
황제가 만취한 그의 애완동물과 함께 볼룸을 떠난 뒤.
볼룸에선 너나 할 것 없이 큰소리가 튀어나왔다.
“보셨어요? 보셨죠!”
“봤죠! 하지만 제가 본 게 맞나요? 세상에! 폐하가 저렇게 죽고 못 사시다니!”
“저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놀랍네요. 무례한 말이지만 전 폐하의 혈관에 피 대신 잉크가 흐르는 줄 알고 있었는데요!”
숙녀들이 목소리를 높였고.
“신사라면 지켜야 할 법도가 있긴 하지만, 아마 합의되었을 테니……. 크흠!”
“일단 폐하께서 생각보다 다정한 분이라는 건 확실하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저 애완동물, 아니, 미아 님이 나타나기 전까진 꿈도 못 꿀 일이었는데…….”
신사들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 황제였다. 전장에서야 검술로 이름 높았다지만, 황제가 되고 나서는 문무관을 쥐 잡듯 잡는 것으로 유명한 그 아딜로트 겐첸 슈뢰더 말이다.
게다가 그는 억지로 무도회에 참가하더라도, 해가 지면 바로 돌아가곤 했다.
그런 황제가 굳이 방까지 빌려서…….
귀족들이 모두 손과 부채로 솟아오르는 입꼬리를 가렸다.
* * *
아딜로트는 비틀거리는 미아를 아예 안아 들고서 복도를 걸었다.
그 품에 안겨 있는 미아는, 당연하지만 전혀 취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녀는 누구나 인정하는 주당에 말술에다 술고래였다. 미아 셀레스티얼의 몸은 단 한 번도 취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취한 척 하고 호흐실트 후작저에서 묵고 가면 되리라고 생각했는데…….
‘이거 어떡하지……?’
취한 척 칭얼대는 미아의 눈이 팽글팽글 돌았다.
‘생각해 보니 이거 좀 위험한 거 아닌가!? 여, 역사를 쓰자는 말로 들리는 거 아닌가!?’
평소에 같이 자는 게 너무 익숙해서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폐, 폐하? 레, 렌은…….”
“황실 마차에 태워서 보냈어.”
쓸데없이 철저한 놈.
미아가 속으로 눈물을 흘리는 사이 어느새 그들은 내빈실에 다다랐다.
호흐실트 후작저의 왼 날개에 있는 내빈관. 그중 가장 좋은 방이었다. 먼 곳에서 볼룸의 음악 소리가 들려왔고, 정원의 불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후작가의 하인은 안내가 끝나자 허리를 깊게 숙였다.
“정리는 모두 마쳐 놓았습니다. 또한, 폐하의 휴식을 방해하지 말라는 후작 각하의 말씀으로 현재 내빈관은 최소한 인력만 남기고 비워 놓은 상태입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설렁줄을 흔들어 주십시오.”
“…….”
왜 이 근처에는 아무도 안 올 거니까 안심하라는 말로 들릴까.
하인까지 사라지자, 남은 건 정말 아딜로트와 미아 둘뿐이었다.
미아는 여전히 아딜로트의 목덜미를 끌어안은 채 취한 척 술주정 같은 웅얼거림만 내뱉었다.
머리 위에서 아딜로트의 희미한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는 흔들림 없는 걸음걸이로 침대로 향했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레 미아를 내려놓았다.
‘심장아, 나대지 좀 마…….’
미아는 심호흡한 뒤, 깜빡 졸았던 사람처럼 눈을 비볐다.
“침대야……?”
다행히도 목소리가 어색하진 않았다.
그런 그녀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딜로트는 어둠 속에서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답했다.
“침대야.”
“아, 아딜도 잘 거지?”
“나는.”
아딜로트가 말하다 말고 입술을 달싹거렸다.
기분 탓일까, 그의 붉은 눈은 평소보다 더 탁하게 보였다. 평소의 여유로운 기색이 전혀 없었다.
‘……위험!’
미아가 식은땀을 흘리며 애써 까르륵 웃었다.
“자, 자자! 아딜도 누워!”
그녀는 일부러 만취한 사람처럼 침대를 팡팡 두드렸다.
아딜로트가 멀거니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게 느껴졌지만, 미아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방긋거리기만 했다.
취했다는데 어쩔 거야.
어쩔 거야!
……하지만 조용한 시선을 받는 시간이 길어지자 이대로 가다간 정말 잡아먹히겠다 싶은 경고음이 머릿속에 울렸다.
“음냐, 졸려!”
그에 미아가 재빨리 풀썩 침대 위로 누웠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가증스러운 졸린 척이었다.
아딜로트는 그런 미아를 내려다보며 한참을 우뚝 서 있기만 했다.
“하…….”
그리고 마지못한 듯한 한숨과 함께 옆에 누웠다.
방에는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
“…….”
둘 다 옷도 갈아입지 않았고 씻지도 않았지만, 누구도 하인을 부르자고는 말하지 않았다.
만약 여기서 씻기까지 한다면, 정말로 분위기가 이상해지리란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던 것이다.
먼 곳에서 음악 소리가 들려올 뿐 조용한 방 안.
미아는 베개에 묻고 있던 고개를 비틀어 아딜로트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오뚝하게 솟은 코와 모난 데 없이 날카로운 턱, 무슨 생각을 하는지 허공을 바라보는 눈이 보였다.
“……무슨 생각 해?”
미아가 속삭이듯 물었다. 아딜로트는 입술을 몇 번 달싹거리다 대답했다.
“속인 사람은 없는데 속은 사람은 있다는 생각.”
“…….”
아니야, 아딜. 사실 속인 사람이 있어……. 넌 허위 매물에 당한 거야…….
없는 양심이 약간 찔렸던 미아가 헛기침했다.
‘……그래도 함부로 손대진 않네.’
생각이 많아 보이는 아딜로트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미아가 괜히 자신의 뺨을 꼬집었다. 그녀는 자꾸 존재감을 주장하는 양심의 명령에 따라 아딜로트의 가슴 위에 살짝 손을 얹었다.
“토, 토닥토닥해 줄까……?”
“…….”
그러자 아딜로트는 한숨도 헛웃음도 아닌 이상한 소리를 내고서 등을 보이며 돌아누웠다. 미아가 덜컥 놀라 몸을 반쯤 일으켰다.
“화, 화났어?”
“아니.”
“그, 그럼?”
“…….”
아딜로트의 침묵에 안절부절못하던 미아가 손뼉을 짝 치곤 말했다.
“끄, 끝말잇기 할래?”
“잠이나 자.”
“자선가!”
“…….”
“자선가아아!”
아딜로트가 등 돌린 채로 한숨을 쉬었다.
“……가위질.”
“질그릇.”
“…….”
“이겼당. 히히.”
아딜로트가 ‘이 자식 대체 뭐지?’ 하는 눈으로 미아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미아는 기다렸다는 듯이 돌아보는 아딜로트의 뺨을 찔렀다.
“화난 거 아니지?”
“……하.”
“귀여우니까 봐줄 거지?”
미아가 새실새실 웃으며 말했다.
“…….”
아딜로트는 한참을 눈썹을 찡그린 채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기어코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넌 갈수록 뻔뻔해진다?”
그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하며 미아의 손가락을 잡아 내렸다.
“그래서 싫어?”
“싫다고 하면?”
“앞으론 치명적인 매력 쪽으로 밀어 볼까 하는데.”
아딜로트가 다시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제야 좀 평소의 아딜 같네.’
미아가 샐쭉 웃으며 기지개와 함께 자리에 누웠다. 잠자리가 좀 어색하긴 하지만, 남의 집에서 캠핑한다고 생각하면 못 잘 것도 없었다.
미아는 배 위에 손깍지를 얹은 채 입을 열었다.
“그보다 내가 미로미스 상회를 운영했던 거, 그렇게 밝혀도 되는 거였어?”
똑같은 자세로 천장을 보고 누운 아딜로트가 심드렁히 대꾸했다.
“슬슬 밝힐 때도 됐지. 언제까지 정말 애완동물 취급이나 받게 할 순 없잖아.”
“흐음. 어차피 각오하고 있던 건데 뭐.”
“그리고…….”
뭔가 말하려는 것 같던 아딜로트는 말끝을 흐리더니 그대로 침묵했다.
“아딜?”
“…….”
“아디이일?”
“안 듣는 게 나을 텐데.”
“뭔데 그래? 듣고 판단할게!”
아딜로트는 그러고도 별로 내키지 않는지 한참 뒤에야 나직하게 말했다.
“내가 싫어서 그래.”
“…….”
“사람들이 널 우습게 보는 게.”
미아는 웃는 얼굴 그대로 입을 딱 다물었다.
아딜로트는 보지도 않고서 미아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아는 듯했다.
“그거 봐.”
그는 다시 등을 보이며 돌아누웠다.
할 말을 잃은 미아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아딜로트의 등만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면 처음에도 아딜 등을 보고 걸었지.’
유모였던 메어리를 보러 지하 감옥으로 내려가던 때.
겁먹고 파들거리던 자신에게 옷자락을 잡으라고 해 주었던 아딜로트의 모습이 떠올랐다. 분명 의심스러웠을 게 분명한데, 그는 늘 자신을 배려해 주었다.
“…….”
망설이던 미아가 아딜로트의 등으로 손을 뻗었다.
‘……조금쯤은 솔직해져도 될까.’
그녀는 조심스레 아딜로트의 등에 다가가 머리를 기댔다. 등을 통해 아딜로트가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미아는 그 상태로 나직하게 속삭였다.
“사실 난…… 잘 모르겠어.”
아딜로트가 잠깐 침묵했다.
“뭘?”
“그냥 다. 내가 하고 있는 게 맞는 건지, 이게 내가 바라던 건지.”
이곳에서 자기 이야기를 하는 건 거의 처음이었다. 자기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가 낯설어, 미아의 말은 평소보다 느렸다.
“네가 바라던 게 뭔데?”
아딜로트의 질문에 미아가 샐쭉 웃었다.
“평범한 거.”
“평범한 거?”
그는 의아한 눈치였다. 미아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응. 완전 평범하고 특별할 것 없는 거.”
이해받진 못하겠지만.
남들처럼 학교에 다니고, 친구와 싸우고, 공부에 시달리고, 진로를 걱정하는 그런 거.
‘이번 신약은 FDA 승인도 받은 거니까 기대해 보자, ――야.’
‘그거 쓰면 완치될 수 있어요?’
‘……예후가 좋다면, 진행은 막을 수 있을 거야.’
아직도 생생한 병실의 소음을 떠올린 미아가 그것을 떨쳐 내기 위해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