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뭔가 잘못됐다.’
미아가 굳은 얼굴로 손을 든 찰나였다.
“그, 근데 생각해 보니 제가 거북목이 있어서 높은 베개는 좀―”
미아의 말이 끝나지 않았는데도 페르디안은 이미 침대로 향하고 있었다. 게다가 키토 후작의 침대답게 넓었다.
침대. 느슨한 옷차림의 금욕적인 미남. 무릎베개…….
“…….”
식은땀이 흐르고 방 안이 덥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얼굴이 빨개졌으리라는 것은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 그러니까……. 그, 그게. 나, 남녀가 유별하고……!”
미아에게서는 저도 모르게 울먹이는 듯한 말이 흘러나왔다.
페르디안은 침대에 앉은 채 그런 미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희미한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표정도 짓나.”
“그야…….”
“생각보다 농담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타입이군.”
“……!”
그 말에 미아의 입이 벌어졌다.
“지금 저 놀리신 거예요……?”
페르디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 ……! ……!?”
뭐 이런 놈이 다 있지?
미아가 억울함에 파들파들 떨었다. 페르디안은 코웃음만 쳤다.
“내가 잘못한 것은 맞으니 추후 적당한 방법으로 사죄하지. 오늘은 이만 돌아가라.”
“……가지 말라고 붙잡고 빌어도 갈 거거든요!”
그리고 미아는 쾅 소리 나게 문을 열고 나갔다. 그 바람에 그녀는 뒤에 남겨진 페르디안의 잿빛 눈이 어두워지는 것은 보지 못했다.
* * *
페르디안은 창가에 서서 미아 셀레스티얼과 세레니티 듀레인이 저택을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거리 때문에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미아가 분홍색 머리카락을 찰랑거리며 마차 앞에 서 있는 아딜로트에게 뛰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팔랑팔랑하는 것이 나비 같기도 했고, 폴짝폴짝 뛰는 것이 토끼 같기도 했다.
그녀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아딜로트와 뭔가 대화하더니, 마차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그 뒤를 세레니티 듀레인이 따랐고, 마지막이 아딜로트였다.
그 순간, 마차에 올라타려던 아딜로트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페르디안은 무심히 자신을 바라보는 붉은 눈과 마주쳤다.
거리는 소용이 없었다. 정확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아딜로트의 표정은 평소처럼 심드렁했으나, 페르디안은 그사이 숨어 있는 말 없는 경고를 눈치챘다.
“…….”
페르디안이 멈칫한 사이 아딜로트는 휙 고개를 돌렸고, 곧 세 사람을 태운 마차가 출발했다. 페르디안은 정원 너머로 사라지는 마차를 끈질기게 응시했다.
페르디안은 어릴 적부터 아딜로트를 알아 왔고, 따라서 그를 가장 잘 아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그가 생각하는 아딜로트는 결코 쓸데없이 감정을 낭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즉, 진짜 경고인 거군.’
페르디안은 커튼을 치고서 침대에 누웠다. 손등으로 눈을 가리자 눈꺼풀 안쪽에 어룽거리던 분홍색이 그제야 지워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몸을 누르던 미아의 무게는 아직도 선명했다.
페르디안은 중력에 이끌리듯이 미아 셀레스티얼을 떠올렸다. 늘 아딜로트를 생각하고, 그를 위해 뭔가를 하지 못해서 안달인 여자.
아딜로트를 보는 그녀의 눈은 너무나 다정하고 올곧다.
그리고 그건 아까 그녀가 방을 나서기 직전, 자신에게 보여 주었던 눈과도 닮아 있었다.
문득 페르디안은 자신이 그런 눈을 이전에도 본 적이 있음을 깨달았다.
분명 처음 미아 셀레스티얼을 만났을 때였다.
‘폐하, 반역자는 삼대를 멸하는 것이 법도입니다.’
‘……히끅.’
그때, 잔혹한 이야기가 오가는 와중에도 자신을 보는 미아의 분홍색 눈에 까닭 모를 호의가 흘러넘치고 있었던 것이 기억났다. 거기까지 떠올린 페르디안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그때 자신이 미아를 반역자라고 의심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계속 자신에게 그런 시선을 보내 주었을까?
만약 자신이 그의 오랜 친우인 아딜로트처럼 바로 신뢰를 보여 줬더라면…….
“……웃기는 상상이군.”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어처구니없는 망상이었다.
어처구니없고, 그래서 달콤하고, 그리고 허망한.
페르디안은 몸을 뒤척이며 더 굳게 눈을 감아 버렸다. 아무래도 약 기운이 가시려면 먼 듯했다.
* * *
황궁으로 돌아와 방에 혼자 남은 미아는 가장 먼저 율리시즈를 불렀다.
“시즈!”
이름을 부르기 무섭게 율리시즈가 기다렸다는 듯이 창문으로 들어왔다.
“네, 네에……. 미아 님.”
“얘기 좀 해야지?”
“바, 발라뒤르 클럽 3층에서의 일…… 말씀이시죠……?”
“응.”
그날의 일을 떠올리는지 율리시즈가 눈을 가늘게 떴다.
“벼, 변장하고 올라갔을 때, 위엔 그라스 후작이 있었고……, 상대는 없었어요……. 대신, 마법으로 상을 띄워서 대화 중이었고요…….”
“그래?”
“그라스 후작에게 술을 줬을 땐, 둘 다 황태후에 대해 긍정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듯했으니…… 태후파 귀족인 것 같긴 하지만, 자세한 건 알아내지 못했고요…….”
미아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생각보다 보안을 철저하게 하고서 횡령 중인 모양이었다.
그때, 율리시즈가 별거 아니란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거울상에도, 상대가 마시는 글렌켈란만 비쳤을 뿐이라…….”
그 말에 미아가 멈칫했다.
“상대도 글렌켈란을 마시고 있었어?”
율리시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에……. 그 초록색 병은, 특이하니까…….”
그는 글렌켈란을 마시는 게 한두 명도 아니니 꼬리를 잡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물론 미아의 생각은 달랐다.
글렌켈란.
높은 도수와 특유의 쓴 향 때문에 호불호가 크게 갈리는 술이었다. 그만큼 찾는 사람이 적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리고 <장미 정원의 세레니티>에서 글렌켈란을 마셨던 인물은 총 셋.
지로티 공작, 그라스 후작, 그리고 리누스 호흐실트 후작이었다.
고작 그런 이유로 의심하기엔 근거가 마땅치 않았지만, 원래 늘 현실이 소설보다 더한 법이다.
‘그리고 이게 소설이라는 걸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성은 있지.’
게다가 호흐실트 후작은 원래부터가 가장 늦게 황제파에 합류한 귀족이었다. 본디 중립 귀족이었던 그는 아딜로트의 황권이 강해지기 시작할 때 뒤늦게 황제파로 돌아섰다.
덕분에 원래부터 황제파 귀족이었던 이들은 호흐실트 후작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한편으로 두기엔 너무 계산적이라는 거였다.
미아는 그를 향한 평가를 어느 정도는 이해했다. 호흐실트 후작은 ‘세빌 상회’를 운영 중인 상단주기도 했으니까.
미아가 미로미스 상회를 운영 중일 땐, 에트루리나 광산 개발권을 두고 경쟁하기도 했다.
‘하지만 원작에서 호흐실트 후작은 끝까지 아딜 편이었는데?’
그때, 문득 미아의 머릿속에 <장미 정원의 세레니티>의 결말부가 떠올랐다. 모든 게 다 끝나고, 크리소르의 악행이 낱낱이 밝혀져 그녀가 사형대에 오른 장면이었다.
처형당하기 직전까지도 크리소르는 담담했다. 그러다 자기 목에 밧줄이 걸리고 나서야 조금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엔, 귀족들이 모여 있는 곳을 향해 소리 질렀다.
‘이 배―!’
미아의 눈에 예리한 빛이 스쳤다.
크리소르가 죽기 직전, 마지막 순간 외칠 만한 말.
만약 그게 처형 직전에 자기를 도울 거라고 믿었던 이가 아무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라면…….
‘배신자?’
그렇다면 원작과 다른 게 아니라 원작에서 나오지 않았을 뿐인지도 몰랐다.
‘……이를테면, 황제파 귀족인 줄 알았던 호흐실트 후작이 사실 태후파의 첩자였다든가?’
미아가 부지불식간에 헛웃음을 쳤다.
“내 추측이지만 너무 근거 없고 너무 그럴듯하네.”
“네?”
“아니야.”
미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확실히 알아볼 필요성이 있었다.
“혹시 그때 3층을 지키던 사람들을 잡아다 물어보면 안 돼?”
그 말에는 율리시즈가 고개를 저었다.
“발설을 막는 마법 계약서에 서명한 것 같아요……. 이미 한 명에게 물어봤는데, 대답하려는 순간 목이 터져서 죽었어요…….”
“으.”
얼굴을 찌푸린 미아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럼 혹시 호흐실트 후작은 뒤가 구리다는 소문 없어?”
“호흐실트 후작이요……?”
“응.”
미아의 질문에 율리시즈가 연갈색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그러고는 뭔가를 가늠하듯 눈을 가늘게 떴다.
“호흐실트 후작을 의심하고 계신 거예요……? 하지만 리누스 호흐실트는, 황제파 귀족이지 않나요……?”
“그래서 하는 말이야. 혹시 그라스 후작이랑 친하다거나, 아니면 황태후에 대해 긍정적인 발언을 했다거나. 그런 거 없어?”
“리누스 호흐실트는, 황제파 내에서 발언권이 적기 때문인지 결벽적으로 뒤가 깨끗해요…….”
율리시즈가 말꼬리를 흐렸다.
“아니, 깨끗했죠……. 일단 길드를 통해 조사해 볼게요…….”
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가 호흐실트 후작이라면 섣불리 건드리지 않는 게 좋았다. 아무래도 더 큰 뭔가와 이어져 있으리란 예감이 들었다.
* * *
율리시즈를 내보낸 미아가 중앙궁으로 향했을 때였다. 얼마 안 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빨간 사람이 그녀의 시야에 띄었다.
“바이지겔 백작 각하?”
“아, 미아 님.”
로사 바이지겔이 놀란 듯이 몸을 돌렸다. 기사로서 입궁한 건지 붉은 망토를 두른 기사단 정복 차림이었다.
‘으, 너무 멋있다!’
일 잘하고 유능하고 창 잘 쓰는 언니라니. 미아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다가갔다.
“기사단 일 때문에 오신 거예요?”
바이지겔 백작이 싱긋 웃었다.
“네. 그리고 바이지겔 백작이라고만 불러 주셔도 됩니다.”
“에이, 그럴 순 없죠! 찬물도 위아래가 있는데!”
“미아 님이 위입니다.”
바이지겔 백작이 우아하게 미소 지으며, 그러나 딱 잘라 대답했다. 다음에 만날 땐 예를 갖추겠다더니, 정말로 자신을 윗사람으로 모시는 듯한 태도였다.
요즘 들어 주변이 이런 태도긴 했다.
예전엔 자신을 그냥 귀여운 애완동물 보듯 하던 황궁의 사용인들도 점점 예의를 차리는 게 보였다.
아딜로트가 너무 연막을 잘 친 모양이었다.
‘그냥 혼담 방지 백신 프로그램 같은 건데.’
미아가 어색하게 웃으며 뺨을 긁었다. 그사이 바이지겔 백작은 햇빛이 들지 않는 곳으로 너무나 자연스럽게 미아를 에스코트했다.
“그보다 키토 후작 각하께 들었습니다. 위험할 뻔하셨다고요.”
“흐억.”
당황한 미아가 저도 모르게 목 졸린 개구리 같은 소리를 냈다.
‘페르가 말한 거야?’
분명 숨겨 준다고 했는데!
시선의 의미를 눈치챈 바이지겔 백작은 별거 아니란 듯이 답했다.
“같은 기사단이니까요. 후작 각하께서 말씀하신 게 아니라 제가 눈치챘습니다. 파자마 파티라고 둘러대라고 조언해드리기도 했는데, 잘 통한 모양이군요. 폐하께는 비밀로 하신 모양이지요?”
“그게 바이지겔 백작 각하의 생각이었어요!?”
어쩐지 페르디안 머리에서 나올 것 같은 아이디어가 아니다 싶었다.
바이지겔이 싱긋 웃었다.
“바이지겔 ‘백작’입니다, 미아 님.”
“앗. 에헷…….”
“귀여운 척하셔도 안 됩니다.”
“척이 아니라 진짜 귀여운 건데…….”
그 말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던 바이지겔 백작이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