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그게 무슨 소리야?”
“어제 키토 후작 각하와 돌아왔잖아요! 미, 미아는 정말 대단해요. 분명 후작 각하는 폐하와 군신 관계인데도 미아와……! 미아의 매력의 끝은 어디일까요?”
“……렌. 어차피 안 들릴 것 같지만 페르랑 나는 관계 같은 거창한 걸로 엮일 사이가 아니야.”
“그, 그럼 그냥 키토 후작 각하가 미아에게 매달리고 있는 건가요?”
“…….”
미아가 재빨리 세레니티의 입을 막았다. 키토 후작저에서 후작을 가지고 하기엔 엄한 이야기였다.
“그보다! 새벽에 깨어 있었어?”
“네에. 마차가 들어오는 것을 봤어요. 후작 각하께서 비틀거리시더라고요…….”
혹시 약에 취한 걸 들켰을까 싶은 미아가 움찔했으나, 세레니티는 달아오른 뺨을 감싼 채 즐거운 건지 뭔지 모를 신음을 토했다.
“어, 엄청 재밌게 논 거죠?”
음……. 즐거운 거 같다.
미아는 허탈하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게 아니라 업무랑 관련된 거였어…… 라고 말해도 안 들을 거지?”
“걱정하지 마세요. 미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 그리고 폐하껜 비밀로 해드릴게요!”
미아는 인심 넉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더는 말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변명이라도 해 줄까 싶었지만, 애초에 페르디안이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하다가 물을 들이켜서 벌어진 일이었다.
‘난 노력했단다! 미안해! 나머진 알아서 하렴!’
그때였다.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가 정원을 울렸다.
“뭐지?”
“그러게요. 심지어 여긴 키토 후작가인데…….”
세레니티의 말에 불안을 느낌 미아가 잽싸게 창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는 보았다.
사자 두 마리가 등을 맞댄 문장을 단 붉은 마차를.
“……깩.”
오르퀘니나에서 붉은색과 사자는 황가 슈뢰더의 상징이다.
말인즉 황실의 마차란 거고, 현재 황족은 크리소르 황태후와 아딜로트밖에 없으니…….
‘설마 어제 발라뒤르 클럽에 간 걸 들켰나!?’
미아가 후다닥 얼굴에 물을 찍어 바르고 1층으로 달려나갔다. 때마침 아딜로트가 마차에서 내려 입구에 당도해 있었다.
“아딜!”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은빛 머리통을 보자마자 미아가 냅다 외쳤다. 그렇게 위험한 짓은 하지 말라고 했는데 또 했다는 걸 들키면 전처럼 황제궁에 감금당할지도 몰랐다.
“내, 내가 다 설명을!”
“뭐?”
“응?”
깜빡깜빡.
아딜로트와 미아의 눈이 마주치고, 두 사람은 동시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지었다.
‘……나 잡으러 온 게 아니구나!?’
미아가 잽싸게 태도를 바꾸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까르륵 웃었다.
“아, 아침부터 여긴 웬일이야!? 나 보고 싶어서 왔나!?”
“헛소리하는 걸 보면 잠은 잘 잔 모양이네.”
“아딜은 잘 못 잤나!? 내가 없어서!?”
“…….”
“……진짜?”
아딜로트가 아니꼽다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맞다. 불면증 있었지?’
아무래도 잠을 못 잤다고 수면제를 되찾으러 온 모양이었다. 귀엽다는 생각에 미아가 실실 웃자, 아딜로트가 심드렁하게 팔짱을 꼈다.
“넌 파자마 파티를 왜 남의 집에서 해?”
“황궁도 제집은 아닌데요!”
“그 정도 지냈으면 너네집이라고 쳐.”
“어허! 등기부 등본이 지엄하거늘!”
“넌 진짜 감성이 메말랐어.”
아침 댓바람부터 재수 없는 소리나 하고 있지만 그래도 안 들켰으니 괜찮다!
미아가 실실 웃고 아딜로트가 마뜩잖다는 듯이 그녀를 흘기는 동안 키토 후작가의 집사가 다가왔다. 몹시 당황스러운 얼굴이었다.
“지고하신 오르퀘니나의 달을 뵙습니다. 주인님께선…….”
“됐어. 조용히 온 거고 소란 피울 생각 없으니까. 얘만 데리러 온 거야.”
아딜로트가 한숨을 쉬며 미아를 턱짓했다.
“나만? 페르 안 보고 가?”
온 김에 업무 보고라도 들을 줄 알았는데.
순수하게 궁금해서 한 질문이었으나, 의외로 아딜로트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조금 신경질적으로 콧등을 꾹꾹 누르더니 낮게 말했다.
“지금은 안 보는 게 나아.”
미아가 흠칫 놀라 주먹으로 입을 가렸다.
“……둘이 권태기야?”
“……계속 말했지만 너랑 대화하면 좀 짜증나.”
아딜로트가 인상을 팍 구기더니 손을 내밀었다.
“파자마 파티 같은 건 황궁에서 해. 정복자의 홀이라도 빌려줄 테니까.”
미아가 그제야 아딜로트를 살폈다. 완벽한 황제의 정복 차림이긴 했지만 급하게 나온 사람처럼 빛나는 은발은 평소보다 부스스했다.
정말로 없는 시간을 쪼개 달려온 모습이었다. 일어나는 거야 늘 새벽같이 일어나지만, 황제의 일정은 늘 새벽에 시작해서 새벽에 끝나니까.
‘아마 지금은 아침 먹을 시간일 텐데.’
그 귀한 시간을 빼내서 굳이 여기까지 와 준 걸까.
‘아딜은 진짜…… 쓸데없이 잘해 주고 그래.’
낯간지러운 기분에 미아가 괜히 입술을 내밀고서 아딜로트가 내민 손을 하이파이브하듯 찰싹 때렸다.
“준비하고 나올 테니까 기다려!”
* * *
곧바로 방으로 돌아가려는 미아를 붙잡은 건 키토 후작가의 집사였다.
“미아 님.”
“네! 에른스트 씨? 맞죠?”
“예. 맞습니다.”
이 동네 집사들은 전부 에른스트라서 이름을 외우기 어렵지 않은 편이었다.
집사 에른스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괜찮으시겠습니까? 주인님께서 부르십니다.”
“페르 님이요?”
“예.”
그는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 하나를 입술 앞에 가져다 댔다. 시선은 바깥의 마차를 향하고 있었다.
‘아딜한텐 비밀이란 건가.’
미아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페르가 괜찮은지 살필 생각이긴 했으니깐. 도움도 받았고 말이야.’
페르디안은 가주의 침실인 3층 중앙의 방에 있었다.
“페르 님이 진짜로 저를 여기로 부르셨어요?”
“예.”
“흐음!”
아무나 출입할 수 있는 곳은 아닐 텐데? 미아가 그런 생각을 하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왔나.”
미리 기다리고 있었는지 페르디안은 방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긴 로브를 자수 허리끈으로 질끈 묶은 느슨한 차림새였다.
기사단 정복을 입고 머리를 깔끔하게 묶지 않은 페르디안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어제도 방탕한 귀족가 삼남처럼 입고 있긴 했지만, 지금처럼 분위기가 느슨하진 않았었다.
‘좀 낯서네.’
미아가 문 앞에서 눈만 데구르르 굴리자, 그걸 다른 의미로 해석한 페르디안이 자리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네가 날 못 믿는 것도 이해하지만, 오늘 부른 건 어제의 일을 사과하기 위해서다.”
“네?”
“어제…….”
그러고는 좀처럼 말을 꺼내지 못하고 망설였다.
‘무슨 말이길래?’
그렇게 한참 뒤 페르디안은 다시 입을 열었다.
“다친 곳은 없나? 내가 그렇게 된 뒤로…….”
설마 그걸 물어보려고?
미아가 서둘러 대답했다.
“켄달 경이 도와주셔서 멀쩡해요!”
“……그래.”
“네엡.”
“…….”
“…….”
너무 순순하게 대답했나.
페르디안에게서는 이제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머쓱해진 미아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페르디안은 뭔가 더 묻고 싶어 하는 얼굴이었다. 아마 자신이 무슨 짓을 더 하지 않았나 등등일 테지만, 차마 자기 입으로 물을 수 없었는지 한참을 침묵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뭔가를 결심했는지 고요한 눈으로 미아를 응시했다.
“미안하다. 면목이 없군.”
너무나도 정직한 사과에 미아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 시선을 받아냈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요? 무릎베개가?”
“…….”
“임무 제대로 못 한 게? 근데 그건 나한테 미안할 일은 아닌 거 같구.”
미아가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그 모습을 보고 페르디안이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내가 너를 끌어들였다. 내 어리석은 행동을 네가 덮어 준 것과 다름없지. 게다가…….”
그의 말꼬리가 흩어지고, 잿빛 눈이 미아의 눈치를 보았다.
“그때 나를 돌보느라 분명 기분이 나빴을 텐데―”
“안 나빴는데.”
미아가 멀뚱멀뚱 대답했다.
“…….”
멈칫한 페르디안은 미간을 찌푸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 말은 안 하는 게 나았을 거다.”
……왜?
멍한 미아를 두고 그는 좀 더 얼굴에 수심을 드리웠다. 미아는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빚졌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냥 해 본 생각인데 꽤 일리가 있었다. 페르디안은 공사가 철저하고 엄격하니까.
자기 바보짓으로 남에게 민폐를 끼친 걸 수치스러워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잠깐 고민한 미아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럼 똑같이 할까요?”
“똑같이?”
“네!”
미아가 활짝 웃었다.
“저 무릎베개 해 주시면 되잖아요!”
이러면 기겁하겠지?
진짜 해 주진 않을 테니, 페르디안이 기함하면 미아도 눈을 흘기며 없는 일로 만들 생각이었다.
“그거면 되나?”
그런데 분위기가 생각보다 묘했습니다.
“네?”
“그걸로 괜찮다면…… 그렇게 하지.”
페르디안은 당황한 듯했지만, 예상했던 것만큼 질색하는 눈치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