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애완동물이 되었다-103화 (103/193)

103화

잠든 건지, 정신을 잃은 건지 모를 페르디안을 두고 미아는 가면을 쓰고서 복도로 나왔다. 그리고 잠시 멍하니 문 앞에 서 있었다.

뒤늦게 욕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다.

‘무슨 약이 먹자마자 반응이 와?’

이놈의 썩을 판타지 세계! 아무튼 뭐든 상상 이상이지!

무슨 약인진 몰라도 성분이 엄청나게 독한 게 틀림없었다. 가슴을 토닥이는 내내 페르디안은 이를 악물고 있었으니까.

팔로 얼굴을 가리긴 했어도 몹시 괴로운 표정이었다.

한숨을 내쉰 미아는 빠르게 몸을 돌렸다. 여기서 자신이 이러고 있어 봤자 딱히 페르디안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았다.

‘그보다는 어떻게든 도와줄 사람을 찾아 보자!’

그렇게 생각한 미아가 출구를 찾으러 모퉁이를 돌았을 때였다.

“3층 가냐?”

“아. 응.”

‘이크.’

하인들의 목소리에 미아가 저도 모르게 몸을 숨겼다. 벽에 숨어 고개를 살짝 내밀자, 인사하고 헤어지는 하인들이 보였다.

그중 한 명이 품에 뭔가를 안고 복도를 지나는 모습이 유난히 또렷하게 눈에 박혔다.

미아는 한 박자 늦게, 그가 들고 있던 것이 초록색 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글렌켈란이었다.

동시에 미아의 머릿속에 원작에서 그라스 후작이 늘 글렌켈란을 마시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

예감, 혹은 육감이라고 해도 좋았다.

미아는 확신했다.

저 술이 가는 곳에 그라스 후작이 있다고.

‘하지만 페르가…….’

잠시 망설였으나 고민은 짧았다. 새벽이 되어 클럽이 끝나려면 멀었고, 손님을 죽일 수는 없으니 목숨에 지장이 가는 약은 아닐 터였다.

‘새벽에 하인들이 주정뱅이들 얼굴을 확인하러 오기 전까지만 다녀오면 돼.’

미아는 몸을 숨기고 하인의 뒤를 따랐다. 하인이 다다른 곳은 갤러리의 아주 깊숙한 곳에 있는 화려한 문이었다.

문 양옆으로는 덩치 큰 남자 둘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하인과 경비는 아는 사이인지 얼굴을 보자마자 서로 반색했다.

“또 글렌켈란이야? 그 독한 게 뭐가 맛있다고…….”

“난들 알겠어?”

미아가 입구 옆 벽에 귀를 댄 채 숨을 죽였다. 경비 중 한 명이 투덜대는 것이 들렸다.

“그런데 오늘은 한 병이네?”

그 말에 미아가 멈칫했다. 경비의 말이 이어졌다.

“원랜 각자 한 병……. 아, 오늘은 오진 않았던가?”

“야, 야. 입조심해.”

경비 중 한 명이 다른 한 명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누가 듣는다고. 여기 다 주정뱅이 놈들밖에 없구만.”

입이 가벼운 경비는 실실 웃더니 문을 열고 하인을 들여 보내 주었다. 문이 닫히고, 경비들이 다시 노닥거리기 시작했는데도 미아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원랜 각자 한 병……. 아, 오늘은 오진 않았던가?’

미아가 알기로 <장미 정원의 세레니티>에서 글렌켈란을 마시던 사람은 딱 셋뿐이다.

‘지로티 공작, 그라스 후작, 그리고…….’

깨달음이 찾아오기 무섭게 등 뒤에서 누군가 말했다.

“여기서 뭐하는 거야?”

* * *

미아는 삐걱거리는 동작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응? 아까 그 술 잘 마시던 토끼잖아?”

그곳엔 화려한 파란 가면을 쓴 남자가 능글맞게 웃고 있었다. 손에는 술병을 든 채 말이다.

‘깜짝이야!’

미아가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빠르게 아무 일도 없던 척 고개를 갸웃했다.

“그냥 탐험하고 있었는데?”

“탐험?”

파란 가면이 비웃음을 흘렸다.

“너 여기 처음이지 않아? 저긴 3층 가는 길인데, 거길 굳이 탐험할 생각을 했다고?”

“처음이니까 궁금해한단 생각은 안 하니?”

“그래애? 그래서 탐험은 잘 했고?”

“응. 이제 갈 거니까 비켜.”

미아가 드레스를 탈탈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란 가면은 히죽 웃고는 미아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아까 보니까 술 좀 마시던데. 그러지 말고 한잔 더 하고 가지?”

그가 그렇게 말하며 슬쩍 미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하지만 미아는 즉각 그 손을 쳐 냈다.

“누나 바쁘니까 비킬래? 누나 해장하러 갈 거야.”

“해장은 원래 술로 하는 거야.”

이 자식, 뭘 좀 아는데?

“그렇다고 한들 내가 왜 너랑 가?”

“왜냐하면…….”

파란 가면을 쓴 남자가 목소리를 낮췄다.

“안 그러면 네가 수상한 짓을 하고 있었다고 고발하고 싶어질 것 같아서?”

은근한 경고성 발언이었다.

잠시 그를 무심하게 내려다본 미아는 팔짱을 끼고서 눈을 부릅떴다.

“씁! 딱 봐도 나보다 술도 못 마시는 게! 우유나 더 먹고 와!”

원래 싸움은 쪼는 놈이 지는 거다.

“뭐? 으하하!”

미아의 애정 어린 권고에도 파란 가면을 쓴 남자는 배를 붙잡고 웃기만 했다. 그러더니 다시 걸음을 옮기려는 미아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러지 말고 한 잔만 하고 가. 응?”

그때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낯선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아까 3층으로 글렌켈란을 들고 올라갔던 하인이 서 있었다.

“에이 씨, 인기척도 없이……. 이쪽 사정이니까 그냥 꺼져.”

파란 가면을 쓴 남자가 손을 내저었으나, 하인은 물끄러미 미아를 바라보곤 말했다.

“다나에 님 되십니까?”

“앗? 어? 응!”

다나에. 이곳에서 쓰기로 미리 정해 놓았던 미아의 가명이었다.

미아가 급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하인이 무심하게 말했다.

“지배인님이 계신 곳은 이쪽이 아닙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 그래? 여기 아니야?”

미아가 눈치 빠르게 호응했고, 그러자 파란 가면이 흥이 식었다는 듯이 미아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뭐야. 선약이 있으면 말을 하든가.”

그리고 투덜거리며 돌아갔다.

“…….”

복도에는 곧 미아와 정체 모를 하인 둘만 남았다. 그는 미아에게 눈짓한 뒤 앞서 걷기 시작했다.

터벅터벅 그의 뒤를 따르며 미아가 앞에서 걷는 하인을 흘낏거렸다. 여기서 쓰기로 한 가명은 페르디안과 기사들, 그리고 율리시즈에게밖에 말하지 않았다.

그 페르디안은 현재 쓰러져 있는 상황이니, 남은 건…….

“시즈……?”

조심스러운 부름에 하인이 걸음을 멈췄다. 그가 곧 몸을 돌렸다.

그리고 얼굴에서 얇은 뭔가를 뜯어내자, 그 밑에서 수줍은 미소를 짓는 율리시즈의 얼굴이 나타났다.

“네, 네에……. 저예요, 미아 님.”

미아가 입을 떡 벌렸다.

“진짜 시즈야……?”

“네에…….”

눈으로 보고 있는데도 믿기지가 않았다.

왜소하고 빈약하던 하인이 갑자기 어깨를 펴고 등을 펴자 키가 커졌다.

성대에 문제가 있는 것 같던 거친 목소리도 순식간에 봄날 미풍처럼 부드러워졌다.

머리카락은 평소의 분홍빛이 아니라 덥수룩한 잿빛이었지만, 가발처럼 보이지도 않고 자연스러웠다.

“너 무슨 마법사야?”

“하하…….”

“웃지 말고! 와! 그거 어떻게 한 거야!?”

“기업 비밀이라니까요…….”

율리시즈가 어깨를 으쓱하곤 수줍게 미소 지었다.

“그보다 여기서 뭘 하고 계신 거예요……? 페르디안 키토가 미아 님을 보호할 줄 알았는데…….”

“아, 맞다! 시즈! 도와줘!”

뒤늦게 페르디안을 떠올린 미아가 율리시즈의 소매를 붙잡았다.

“페르가 뭘 잘못 마셨어…….”

“네……? 하아…….”

순간 율리시즈의 얼굴에 한심하다는 시선이 떠올랐다. 솔직히 미아도 조금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반박할 수 없었다.

“쓰러져 있는데 나는 못 옮기겠고, 페르가 자꾸 끙끙 앓고…….”

“…….”

“……시즈야. 표정이 이상하다. 무슨 생각 해?”

율리시즈가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기사단장이란 게 꼭 필요할까 하는 생각……?”

“…….”

이러다 일치겠네. 미아가 재빨리 가식적인 미소를 지었다.

“아, 안 데리고 가면 아딜한테 들킬걸!?”

그 말에 잠시간 미아를 바라보던 율리시즈는 이내 김이 샜다는 듯 물러났다.

“그래요……. 기회는 많으니.”

……무슨 기회?

“페, 페르 도와줄 거지!?”

“……어쩔 수 없죠.”

율리시즈가 한숨을 쉬더니 창문을 열었다. 밤바람에 잿빛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그는 그 상태로 눈을 가늘게 뜨고 바깥을 살피더니, 미아에게 물었다.

“뒷문 쪽에 있는 마차로 가면, 되나요……? 미아 님이 타고 온 마차 같은데…….”

여기서 그게 보여……? 같은 아마추어 같은 질문은 이제 하지 않기로 했다. 미아가 냅다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근데 경비가 많을 텐데, 어떻게 데리고 나가게?”

미아의 질문에 율리시즈가 대답 없이 싱긋 미소 지었다. 어쩐지 불안해지는 미소였다.

그리고 잠시 뒤.

“부, 불이야!”

“으, 으악! 갤러리가 불타고 있어!”

갤러리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덕분에 검은 그림자가 뒷문으로 빠져나가는 것은 누구도 보지 못했다.

* * *

다음 날, 미아는 눈을 찌르는 햇빛에 정신을 차렸다.

“미아. 잘 다녀왔나요?”

자세히 보니 햇빛이 아니라 세레니티의 얼굴이었다.

“응. 렌은?”

“저도요.”

미아가 하품하며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은 거대한 원형 침대 위에 있었다. 네글리제 차림의 세레니티는 씻고 나왔는지 머리카락이 촉촉이 젖어 있었다.

그 상태로 그녀는 심장 떨리게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연막을 위해서긴 했지만, 미아랑 같은 침대에서 자는 것도 정말 좋네요.”

“그러게에……, 하암!”

미아가 재차 하품하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낯선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어제 키토 후작저로 왔지, 참.’

페르디안은 일 처리를 깔끔하게 하는 타입이었다.

아딜로트에겐 비밀로 해 달라는 미아의 부탁을 제대로 들어줄 생각이었는지, 그는 연막을 위해 미아의 외박 사유까지 직접 만들어 주었다.

세레니티와 둘이서 키토 후작저에서 파자마 파티를 한다는 게 바로 그 사유였다.

어떻게 페르디안의 머릿속에서 그런 융통성이 나왔는지는 모를 일이었으나, 덕분에 미아는 아딜로트에게 외박한 이유를 둘러대지 않아도 되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와중, 세레니티가 옆에서 슬그머니 다가와 속삭였다.

“그, 그런데 미아…….”

“응~?”

아직 잠이 덜 깬 미아가 배시시 웃으며 답했다.

“키, 키토 후작 각하와도 좋은 사이일 줄은 몰랐어요…….”

……잠이 확 깼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