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애완동물이 되었다-100화 (100/193)

100화

율리시즈는 의아해하긴 했지만 더는 미아를 말리지 않았다. 그 역시도 페르디안이 함께 가는 게 차라리 안전할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내가 이래 봬도 다 계획이 있는 사람인데, 왜들 그렇게 못 믿는 거냐고!’

미아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러자 마차 맞은편에 앉아 있던 페르디안이 말을 걸어왔다.

“긴장되면 지금이라도 돌아가.”

그렇게 말하는 페르디안은 평소와 달리 화려한 차림새였다. 기사단장의 정복도, 키토 후작의 예복도 아닌, 방탕하고 허술한 귀족가 삼남 같은 복장.

풀어헤친 옷깃 사이로 근육질의 가슴이 보일 듯 말 듯 했다.

“……침을 흘리고 있다. 괜찮은 건가?”

“아. 쓰읍. 물론이죠.”

미아가 아무렇지도 않게 입가를 닦아 내며 웃었다.

그뿐만 아니라 페르디안의 길게 찰랑이던 머리카락까지 싹둑 잘려 있었다. 마법이라고는 하는데 무슨 마법이 그런 데에 쓰이는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흑발 장발 기사남이 흑발 귀공자 북부대공 타입으로 바뀌었으니 봐주도록 할까.’

짧은 머리카락에 아무 무늬도 없는 흰 가면이 꽤나 인상적이다. 가면 때문에 눈가에 그늘이 지자 그의 잿빛 눈은 평소보다 어둡고 낯설어 보였다.

“……왜 자꾸 웃는 거지?”

“좋아서…….”

“…….”

페르디안이 움찔했다. 그 모습을 보고 또 미아는 눈을 빛냈다.

“마음에 평화가 찾아오는 얼굴이에요…….”

페르디안이 뭐 이딴 변태가 다 있지, 하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에 미아는 샐쭉 웃고선 드레스 자락 끝을 들어 올려 보였다.

“저는 어때요? 예쁜가요? 물론 귀엽고 깜찍하겠지만!”

“너는 변태지만 자의식이 넘치는 부분만큼은 무척 존경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칭찬 한 번을 안 해 주시네!”

애초에 순순히 칭찬해 줄 거라곤 생각도 하지 않았던 미아가 툴툴거렸다.

그 반응에 페르디안은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농담이다.”

“…….”

잠시 움찔한 미아가 괜히 가면으로 얼굴을 가렸다. 흰 토끼 모양의 가면이 표정을 가리자 그제야 좀 안심이었다.

‘페르가 원래 저렇게 농담을 저런 식으로 했나?’

자기 멋대로 벽을 쳤다가, 어떤 땐 갑자기 성격에 안 맞게 부드러워졌다가.

‘남자의 마음은 어렵구만.’

그사이 마차는 슈타인호프 갤러리 앞까지 다다라 있었다.

“도련님. 도착했습니다.”

마차부로 위장한 기사, 그러니까 켄달 경이 말했다. 그는 한 마리 골든래트리버 같은 눈으로 마차에서 내리는 미아를 바라보았다.

“아가씨. 진짜 조심해서 다녀오셔야 합니다!”

“아이참! 켄, 나 그냥 재미 보러 가는 거거든!?”

“아이고. 아가씨가 위험해지시면 저는 큰일납니다!”

“알았으니까 돌아가기나 해! 난 오늘 어른의 계단을 오를 거란 말야!”

켄달 경과 미아의 연기 때문인지 슈타인호프 갤러리 앞의 경비들은 ‘또 멋모르는 귀족 영애가 왔구만’ 하는 얼굴이었다. 지켜보던 페르디안은 미아를 에스코트하며 침음을 흘렸다.

“……그와는 언제 그렇게 친해졌지?”

“이번 임무 준비하면서요!”

“그래 봐야 몇 시간 아닌가.”

“만나서 5초 만에 반하기도 하는데 몇 시간이면 절친해지기엔 충분하죠!”

미아가 헤실헤실 웃었다.

켄달 경은 이번 위장 잠입 임무에 미아가 끼게 되었다는 것을 듣고 또 형언할 수 없는 눈으로 페르디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몰래 미아에게 다가와 물었다.

‘정말로 억지로 이런 일을 하고 계신 거면 반드시 말씀해 주십시오.’

방향이 좀 어긋나긴 했지만 진짜 기사도를 추구하는 기사이긴 했다.

미아는 금세 켄달 경 및 페르디안의 임무를 돕는 몇 명의 기사들과 친해졌다.

“다들 진짜 좋은 분들이에요!”

태평한 말에 페르디안이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뭐가 됐든 조심해라. 그저 즐기려고 하는 사람만 있는 것도 아닌 데다가…….”

그는 말하다 말고 잠시 미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아무튼 위험한 놈들도 있으니까.”

“뭐. 페르가 지켜 줄 텐데~”

미아가 실실 웃으며 말했다. 농담처럼 한 말이었는데 페르디안은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그래야지.”

“…….”

덕분에 미아만 조금 머쓱해져서 입술을 내밀고 침묵했다.

페르디안은 자연스럽게 입구의 경비병들에게 초대장을 보여 주었다. 모두 잘 훈련된 사병처럼 보였다.

‘시즈도 잘 들어오겠지?’

마지막으로 괜히 하늘을 바라본 뒤 미아는 갤러리에 들어섰다.

복도는 어두웠다. 벽에 걸린 촛대만이 어슴푸레 불을 밝히고 있었다.

조금 더 들어가자 슬슬 사람들이 보였다. 모두 가면을 쓰고 있었다. 더러는 미아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휘파람을 불었다.

그때마다 페르디안이 손에 힘을 주는 것이 느껴졌다.

내부로 갈수록 가관이었다.

안쪽에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헐벗다시피 한 이들이 가면을 쓰고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그리고 미아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페, 가 아니라, 디안.”

클럽에서 부르기로 한 가명을 말하자 페르디안이 즉각 고개를 기울여 왔다. 미아는 손을 모아 그의 귓가에 가져다 댔다.

“이거 아닌 거 같아요! 지금 디안이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아가씨인 저를 데리고 어른의 계단을 오르려고 한다는 설정이잖아요?”

“……그렇다.”

“그럼 자세 좀 바꿔도 돼요?”

페르디안이 멈칫했다.

그가 당황한 사이 미아는 재빨리 잡고 있던 손을 놓고, 그의 손을 자신의 허리에 둘렀다.

페르디안이 돌덩이처럼 굳는 게 느껴졌다.

“이게 더 자연스러울 것 같아요! 그리고 그렇게 목석처럼 굴지 말고 치근대 봐요!”

미아의 속닥임에도 페르디안은 뻣뻣하게 굳어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미아가 옆구리를 퍽퍽 찌르자 그제야 다시 걸음을 옮겼다. 호두까기 인형도 그것보단 자연스럽겠다 싶은 걸음걸이였다.

때마침 넓고 높은 라운지가 드러났다. 라운지에는 조약돌 모양의 낮은 소파가 늘어져 있었고, 사람들은 삼삼오오 둘러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아……. 좋아…….”

“하……. 이번 거 끝내준다…….”

제정신으로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약과 술을 같이 하는 모양인지 모두가 온몸이 축 늘어진 채였다.

귀족이랍시고 어디에선가 고상한 클래식이 연주되고 있었지만, 소리가 너무 커서 귀가 아플 정도였다.

페르디안은 미아를 바 자리로 끌고 갔다. 밋밋한 검은 가면을 쓴 바텐더가 자연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무엇으로 드릴까요?”

“나! 맛있는 거! 단 거!”

그 순간 페르디안 대신 미아가 끼어들었고, 바텐더는 그런 미아를 향해 싱긋 미소 지었다.

“알겠습니다. 이쪽 아가씨께는 단 술을. 신사분은요?”

“같은 걸로.”

“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용케 대답은 한다 싶은 딱딱한 말이었다. 미아가 슬쩍 페르디안의 옆구리를 찔렀다.

“디안. 너무 딱딱한 거 아니에요?”

“……이런 건, 잘 적응이 되지 않는다.”

“전에도 몇 번 와 봤다면서요! 그때도 이랬어요?”

“…….”

침묵은 긍정.

‘하이고! 왜 이런 임무를 그렇게 오래 끌었는지 알 것 같네!’

아무래도 자신이 도와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미아가 고개를 저었다.

페르디안이 다치는 것을 막기 위해 온 거지만, 기왕이면 임무도 해치워 버리는 게 좋으니까.

“디안 임무가 적국과 내통하는 세력의 끄나풀을 찾는 거라고 했죠?”

미아가 목소리를 낮추자 페르디안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라지푸트 쪽에 국가 기밀이 새어 나간 정황이 있다. 귀족들의 사교 모임이 수상하니 그쪽을 중심으로 조사하라는 명령이다.”

라지푸트라니. 미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딜이 반죽여 놓은 거 아니었어요?”

“그들은 호전적인 민족이다. 절대 오래 가만히 있을 이들이 아니지.”

“흐음.”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래서야…….’

미아는 은근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입구와 출구에는 전부 가면을 쓴 경비병이 서 있었다. 그들은 매의 눈으로 ‘손님’들의 거동을 살피는 중이었다.

미아가 고개를 돌리자 이쪽을 보고 있던 자들이 슬며시 눈을 피했다.

‘아무리 봐도 의심받고 있네!’

하기야 그럴 만도 했다.

남녀를 불문하고 약과 술에 빠져 질펀하게 속닥이다가 위층으로 사라지는 상황에서, 담백하게 바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한 쌍이라니.

‘더럽게 수상하다. 나라도 의심한다.’

미아가 한숨을 쉬고서 페르디안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페르디안은 순순히 그녀의 손에 끌려와 고개를 기울였다.

“디안.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아요.”

“…….”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가면 때문에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잿빛 눈에서 답답함과 불편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

솔직히 말해서 페르디안은 정말로 까마귀 속의 백로처럼 이 공간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니 어울리지 않는다면, 자신이 교두보를 놓아주면 된다.

“우리, 설정 바꿔요.”

미아가 살며시 페르디안의 귓가에 손을 가져다 댔다. 가면 아래 페르디안의 동공이 커지는 것이 보였다.

“무슨…….”

페르디안의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온 상태에서, 미아는 부러 약간의 흥분을 내비치고서 나직하게 속삭였다.

“성추행으로 고소하기 없기예요.”

* * *

페르디안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바텐더가 내온 술을 마시자마자 미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것이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