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황제의 애완동물이라는 직위 탓에 미아는 아무 거리낌 없이 연무장으로 향할 수 있었다.
‘여긴가?’
미아가 고개를 쏙 내밀고 연무장을 두리번거렸다.
“…….”
연무장은 어마어마하게 넓었다. 아딜로트는 기사단과 동고동락하며 황제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군사들의 편의를 잘 봐주는 편이었다.
그 넓은 연무장 한 귀퉁이에서는 기사단이 훈련 중이었다. 옷차림을 보니 황제 직속 기사단인 붉은 사자 기사단이 분명했다.
그 앞에는 예상대로 페르디안이 서 있었다. 그는 매의 눈으로 훈련하는 기사들을 살피는 중이었다.
“하나! 둘! 하나! 둘!”
가까이 다가갈수록 기사들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방해하고 싶진 않은데…….’
미아는 우물쭈물 게걸음으로 그들 곁으로 다가갔다.
다행히 기사 중 누구도 자신을 뚫어져라 보거나, 히죽거리거나, 농담을 던지지 않았다. 아니, 아예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미아에게 고개를 돌린 건 오직 페르디안뿐이었다.
“미…….”
그는 미아를 발견하곤 이름을 부르려다, 아직도 호칭을 정하지 못했는지 말꼬리를 흐렸다.
그 모습을 금방 눈치챈 미아가 활짝 웃었다.
“페르! ……님!”
생각해 보니 호칭이 정해지지 않은 건 생각해 보니 이쪽도 마찬가지잖아?
미아가 벽에 붙어 게걸음질 치고 있는 것을 본 페르디안이 그녀 쪽으로 다가왔다.
“여긴 왜 왔지?”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다 끝나시고 얘기해도 돼요!”
그 말에 페르디안이 잠시 기사들을 둘러보았다.
“잠시 자유롭게 대기하도록.”
“예!!”
“……히끅.”
우렁찬 목소리에 미아가 딸꾹질했다. 페르디안은 입을 가리고 눈치를 살피는 미아를 보며 실소했다.
“단장실까지 가기엔 시간이 부족하군. 조금 떨어져서 이야기하지.”
“네엥.”
쏠랑쏠랑 그늘진 쉼터로 향한 미아는 마지막으로 기사들을 살폈다. ‘자유롭게 대기’라고 했는데 노는 사람은 없고 스트레칭하는 모습만 보였다.
“군기가 엄청 잘 잡혀 있네요?”
“보통이다.”
“그런가!”
미아가 샐쭉 웃었다.
“사실 저를 안 좋게 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아무래도 제가 좋게 보이진 않을 거 같아서!”
그 말에 페르디안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답하기 난감하다는 얼굴이었으나, 그는 이윽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기사는 주군의 결정에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 폐하께서 너를 인정하셨으니 그분의 기사인 우리도 그럴 뿐이야.”
“그치만 페르는 초반에 아딜이 저 믿는다고 했는데도 의심하지 않았어요?”
“…….”
페르디안의 말문이 막혔고, 미아가 샐쭉 웃었다.
“농담이에요! 말은 그렇게 했어도 공식 석상에서는 확실히 아딜 편이었으니까!”
그 말 그대로 미아는 사적인 저리에서 페르디안의 불신을 느낀 적은 있지만, 공식적으로라면 페르디안은 늘 아딜로트의 의견을 지지했다.
그게 붉은 사자 기사단의 단장으로서 그의 역할이라는 것을 페르디안은 아주 잘 알고 있는 듯했다.
‘보면 볼수록 아딜이 참 신하를 잘 뒀어!’
흐뭇한 미소를 짓는 미아를 보며 페르디안이 헛기침했다.
“그보다 이야기 들었다.”
“얘기요?”
“레기아 용액을 맞을 뻔했다더군.”
그렇게 말하는 잿빛 눈이 조금 언짢은 듯한 빛을 띠었다.
‘한심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 거 같고.’
그럼 저건 걱정일까.
미아가 물끄러미 그 눈을 바라보았다.
“이봐.”
페르디안의 부름에 정신을 차린 미아가 재빨리 눈을 부릅떴다.
“그보다 ‘이봐’가 뭐예요! 이름도 있는데!”
“그 말을 하려고 온 거라면 돌아가라.”
냉정한 태도에 미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갑자기 나한테 벽을 친 느낌?’
마지막으로 봤을 땐 분명 안 이랬던 것 같은데, 왤까.
‘원작에서 렌을 향한 마음을 확신하지 못했을 때 이런 느낌이었던 것 같긴 한데.’
일단 그건 절대 아닐 테고.
잠시 고민한 미아는 이내 한숨을 쉬었다.
‘생각하지 말자! 이젠 페르가 날 죽일 것도 아닌데 굳이 비위 맞춰 줄 필요 없으니까.’
그래도 조금은 서운한 마음에 미아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건 아니고요. 예전에 소원 들어주시기로 하신 거 기억하시죠?”
즉시 페르디안이 질린다는 얼굴을 하고서 한숨을 쉬었다.
“또 무슨 사고를 치려는 거지?”
“……동네 사고뭉치 다루듯 말하지 말아 주실래요?”
“모른다. 그런 기억 없으니 돌아가.”
그대로 돌아서려는 페르디안을 보며 미아는 당황했다.
‘너 구해 주려고 이러는 거란 말야!’
울상이 된 미아가 저도 모르게 외쳤다.
“쓰, 쓰다듬었으면서!”
그 말을 들은 즉시 페르디안은 눈을 감아 버렸다.
“너…….”
그는 난생처음 보는 당황한 표정으로 제 눈을 가렸다가, 한 글자 한 글자 짓씹듯 말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만, 표현을…….”
“그, 그치만 허락도 없이 쓰다듬은 건 맞……!”
툭.
그때 뒤에서 들린 소리에 미아와 페르디안이 동시에 시선을 돌렸다.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던 갈색 머리 기사 한 명이 검을 떨어뜨린 채 굳어 있었다. 그의 눈이 사정없이 떨렸다.
“……단장님.”
“켄달 경. 경이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다.”
페르디안이 급하게 말했지만 기사는 믿지 않는 눈치였다.
“하지만 방금 숙녀분께서…….”
“그건 오해가―”
“오해 아닌데…….”
미아의 작은 중얼거림에 분위기가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켄달 경은 말없이 바닥에서 검을 주워들더니, 발검 자세를 잡기 시작했다.
“단장님……. 기사도대로 행동하겠습니다.”
비장한 얼굴이었다.
페르디안은 똑같이 자세를 잡으면서도 험악하게 미아를 노려보았다. 미아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페르 놀리는 게 재밌어서 그만.’
짧게 헛기침한 미아가 그제야 앞으로 나서서 사정을 설명했다.
“그…… 사실 오해가 맞아요, 켄달 경!”
“예? 정말입니까?”
켄달 경은 반신반의하는 눈치였다.
그는 몹시 불안한 눈으로 미아를 보다가, 혹시라도 위험에 처하거든 꼭 자신을 찾아오라고 한참을 강조한 뒤에야 돌아갔다.
“…….”
“…….”
기사가 돌아간 뒤, 어색해진 분위기 속에서 페르디안은 짜증스럽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뭘 요청할 셈이지?”
“아! 그게요, 최근에 ‘발라뒤르 클럽’ 조사 중이시죠?”
예상치 못한 말에 페르디안의 눈이 커졌다.
“그걸 어떻게…….”
“저 거기 데려가 주세요! 위험한 짓 하기 전에 말하라고 했으니까 페르한테 말하는 거예요!”
“거긴 대체 왜―”
“비밀! 그리고 아딜한테도 비밀로!”
“임무에 외부인을 데려갈 수는 없다.”
“그럼 그냥 입장만 같이 해 주세요!”
“애초에 그런 난잡한 곳에 왜 가려고 하는 건지부터 말해. 그러지 않고선 도와줄 수 없다.”
페르디안의 태도는 딱딱했다. 굳은 입매는 절대 호락호락하게 넘어갈 것 같지 않았다.
차마 원작이라는 천기를 누설할 수 없는 미아는 한숨을 쉬었다.
결국 이 변명을 쓰고야 마는가…….
“남자는 많을수록 좋으니까…….”
미아가 영혼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휑하니 바람이 둘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말한 그녀보다 더 당황한 눈치인 페르디안은 갑자기 자신의 입을 가리더니, 미간을 찡그렸다. 미아는 그런 그의 귀가 살짝 붉어진 것을 놓치지 않았다.
“페르?”
“…….”
“페르, 귀가 빨개요?”
“―알았으니까! 조용히 좀 해라…….”
페르디안은 손등으로 얼굴을 가린 채 시선을 피했다. 그는 한참 뒤에야 달아오른 얼굴을 가라앉히곤 헛기침했다.
“농담은 적당히 해라.”
“진짠데!”
“웃기는군. 그게 아니라 폐하와 관련된 일이겠지.”
와. 어떻게 알았지?
미아가 멍하니 눈을 끔벅이자 페르디안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짧게 한숨 쉬고는 몸을 돌렸다.
“어차피 네 머릿속엔 폐하밖에 없을 게 뻔하니까.”
뭐 그렇긴 한데.
‘왜 씁쓸한 것처럼 들리지?’
미아가 멀뚱멀뚱 그를 바라보았다. 페르디안은 부정하지 않는 미아를 보며 희미한 쓴웃음을 지었다.
“……말한 바가 있으니 부탁은 들어주지. 따로 연락하겠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서 연무장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 등을 바라보며 미아는 괜히 머리를 긁적였다.
‘요즘 들어 시즈도 그렇고 그렇고 좀 이상하단 말야. 여름 타나?’
뭐가 됐든, 성공이었다. 이제 진짜 그라스 후작을 조질 때가 되었다.
* * *
슈타인호프 갤러리는 수도 외곽에 있는 갤러리였다. 소유주는 랑게 남작. 율리시즈는 그에 대해 심약하고 소심한 사람이라고 평했다.
‘아마 그라스 후작에게는 아무 생각 없이 장소를 빌려줬을 확률이 높아요…….’
참고로 율리시즈는 따로 발라뒤르 클럽에 잠입하기로 했다. 그는 미아가 페르디안과 함께 클럽에 잠입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매우 언짢은 기색을 표했다.
‘아, 알아내기까지 하셨으면, 저한테 맡기시지…….’
‘그럼 물어보겠는데, 시즈 너는 뒷골목에 조금 큰 늑대가 상처 입고 쓰러져 있으면 어떻게 할 거 같아?’
‘……도축장에 갖다 주겠죠? 늑대 고기면 냄새는 좀 나겠지만…….’
‘그래서 내가 가는 거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