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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애완동물이 되었다-98화 (98/193)

98화

그가 뭔가 말하기도 전에 미아가 팔다리를 파르륵 떨었다. 아딜로트는 별수 없이 그녀를 품에서 내려놓았다.

미아는 발이 땅에 닿자마자 고개를 홱 들더니, 울상이 된 얼굴로 그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탕!

손바닥으로 벽을 치는 소리가 울렸다.

‘아프지 않나?’

아딜로트가 미아의 손바닥을 걱정하는 사이 미아가 새빨간 얼굴로 외쳤다.

“지금 나 엿 먹어 보라고 이러는 거지!”

코앞에 놓인 분홍색 눈에는 억울함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아딜로트가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아니.”

“그럼 나한테 왜 이러는데!”

“네가 너무 앙증…….”

“으아아!”

미아가 다시 비명을 지르며 그의 입을 막았다.

“그런 말 말고! 거기선! 알겠으니 나가 보라고 해야지!”

“…….”

정말로 부끄러웠는지 미아의 뺨에서 귀까지 전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잔뜩 치켜 올라간 눈썹은 그녀가 성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긴 했지만, 슬프게도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귀여워……까지 생각한 아딜로트가 점잖게 시선을 피했다.

“그러게 누가 꽃다발 받침대한테 청혼 당하래?”

“그건 걔가 변태고! 내가 너무 귀여워서!”

“그래. 그러니까 이것도 네가 너무 귀여워서 벌어진 일이라고 쳐. 황후 후보인데 이 정도의 전시 행정은 있어야지.”

“하지만 혼담은 지금 안 들어오고 있잖아!”

아딜로트가 멈칫한 뒤 답했다.

“그게 전부는 아니잖아.”

“그게 전부인데!”

“…….”

아딜로트는 별안간 가슴 속에 묵직한 덩어리가 얹힌 듯한 감각을 느꼈다. 그 낯선 감각에 그는 실소했다.

누구에게도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이 없는데, 그걸 이렇게 손쉽게 해내는 것도 미아의 재주라면 재주였다.

“……나한텐 아니야.”

단호하게 말한 그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너한텐 내가 남일지 몰라도 나한텐 아니거든.”

“어?”

미아가 당황했는지 짧은소리를 내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러곤 입술을 몇 번 달싹이고,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난처하다는 듯이 그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으음, 아딜은 진짜, 동물 복지가……!”

“그래. 너한텐 내가 상냥한 주인님인지 몰라도 나한테 넌 애완동물이 아니고.”

그린 듯한 대답에 아딜로트가 한숨을 쉬며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이래 보여도 내가 이번엔 꽤 화가 났거든.”

“…….”

미아는 이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기계적인 미소만 짓고 있었다. 아마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라는 듯했다.

‘어지간히 내가 불편한가 보지.’

물론 아딜로트도 그런 미아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었다. 사방에서 온갖 더러운 말을 듣고 있으니, 저였어도 곁에 남아 있고 싶지 않으리라.

미아는 자신이 당한 일을 미주알고주알 늘어놓는 성격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가 받는 생채기는 그가 모르는 곳에 켜켜이 쌓여 가고 있을 터였다.

‘그래서 더 안 돼.’

더는 누구도 미아를 무시하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되었다. 지금도 늘 도망칠 궁리를 하는 게 보이는데, 한 번 더 그랬다간 그 좋은 머리로 정말 망명 계획을 세울지도 모른다.

‘그렇게 둘 순 없어.’

아딜로트는 레아 황비를 떠올렸다. 뭔가를 잃어버리는 것은 한 번이면 족하다.

그녀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곳에 있어야 했다.

오르퀘니나에. 자신 옆에.

‘이젠 숨길 게 아니라 차라리 드러내야겠어.’

“오늘은 이 정도면 됐으니 이만 들어가.”

생각을 마친 아딜로트가 등을 세우며 말했다.

“그, 그래도 돼요?”

미아가 눈을 빛냈다. 말과 달리 ‘살았다!’ 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곧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서 결국 뭐였어요, 이건? 탐색전이었나?”

“…….”

왜 항상 저런 쪽으로만 생각하는 걸까?

조금 괘씸하다는 생각에 아딜로트가 한숨을 쉬었다.

“……아직 그 정도 거리라는 거겠지.”

“네?”

그는 곧 홀로 몸을 돌렸다.

“글쎄. 뭐였을까? 반지를 선물하는 이유랑 비슷하지 않나?”

“반지요? 반지면 분명, 소유…….”

미아의 말끝이 잦아들었다. 아딜로트는 등 뒤로 미아가 기어코 호다닥 달아나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 * *

“그때 분위기 말이십니까? 폐하께서 릴레 후작가에 쳐들어가겠다고 하신 걸 간신히 막았죠.”

찻잔을 건네주며 요아힘이 말했다.

끔찍한 국정 회의에서 탈출한 뒤, 미아는 바로 요아힘을 찾아와 아딜로트의 이상 행동에 대해 물은 차였다.

“릴레 후작가에요? 힐데가르트 때문에?”

미아가 찻잔을 받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요아힘은 자기 몫의 찻잔을 들어 올리며 싱그럽게 미소 지었다.

“예. 미아 님께서 크네히트 백작께 청혼받았다는 소식을 같이 들었거든요. 정말 그때의 폐하를 말리는 게 얼마나 힘들던지…….”

“윽. 죄송합니당…….”

“미아 님의 잘못은 아니니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맞아요, 미아. 그냥 미아가 너무 귀여운 거니까 그건 미아의 잘못이 아니에요.”

옆에서 세레니티가 반짝이는 눈으로 거들었다. 경국지색인 여자주인공의 입에서 들으려니 듣기에 영 너무 거시기한데.

“어쨌든 힐데가르트는 무사한 거죠?”

“목숨은 무사합니다. 릴레 후작가의 영지에 내려가서 요양한다고 들었습니다.”

“요제프는요?”

문득 궁금해진 미아가 물었다. 요아힘은 잠깐의 침묵 후에 싱긋 웃었다.

“지금쯤 바다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요?”

“…….”

아딜이 그렇게까지 했다고?

당황한 미아의 표정을 보고 그녀의 생각을 짐작한 요아힘이 고개를 저었다.

“폐하가 아니라 릴레 후작입니다. 그는 호락호락한 자가 아니니까요. 미아 님이야 피해자라지만, 딸을 모욕한 크네히트 백작을 가만둘 이유는 없었겠죠.”

생각보다 더 무서운 아저씨였네…….

그래도 나름 백작가인데 쫄딱 망하고서 가주까지 처리하다니.

“그보다 미아 님?”

“네?”

요아힘의 부름에 미아가 생각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는 미아를 향해 우려 섞인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다.

“미아 님께서는 미아 님의 방식으로 폐하의 보위를 지키려 하신다는 것을 알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위험한 일을 하실 땐 꼭 남에게 말씀하시고 도움을 받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말에 옆에서 세레니티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재상님의 말씀대로예요, 미아. 그런 일이 있으면 꼭 말해 줘요.”

“아하항…….”

미아가 난처하게 웃을 뿐 확답하지 않자 요아힘이 이어 말했다.

“미아 님이 위험해지면 난처해할 분들이 많습니다. 특히 지로티 공께서 생각하시는 것보다 미아 님을 많이 아끼십니다.”

“할아버지가요?”

그러고 보면 지로티 공작은 처음에 만났을 때부터 자신을 꽤 아끼긴 했다.

미아가 재차 물었다.

“그러고 보니 할아버지는 왜 아직 후계자가 없어요?”

그 말에 요아힘이 멈칫했다. 세레니티 역시도 금빛 눈을 휘둥그레 뜨고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미아. 모르는 건가요? 꽤 유명한 사건이었는데…….”

“응?”

당황한 미아가 되물었다.

남들 다 아는 사건이건 말건 원작에 안 나와 있으면 알 리가 있나.

눈을 깜빡이는 그녀에게 요아힘은 부드럽게 대처했다.

“저희가 말씀드릴 문제는 아닌 듯합니다. 나중에 공께 여쭤보시지요.”

“움……, 넹!”

“그럼 저는 이만 업무를 보러. 듀레인 양은 다음 주까지 내어드린 과제를 잊지 마시고요.”

요아힘이 싱긋 웃으며 빠르게 자리를 빠져나갔다. 마지막까지도 세레니티를 향한 그의 시선에는 일말의 사감도 없었다. 그가 떠나는 것까지 확인한 미아가 재빨리 세레니티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보다 렌!”

“정보 말이죠?”

세레니티가 싱긋 웃고는 품에서 짙은 회색의 초대장을 꺼냈다.

“<발라뒤르 클럽>이라는 곳이에요. 한 달에 한 번, 달이 없는 밤에. <슈타인호프> 갤러리에서 열린다고 해요. 초대장이 없으면 출입이 어렵다고 해서 하나 구해 왔어요.”

“와! 진짜!? 고마워!”

신나서 대답한 미아가 멈칫했다.

‘<발라뒤르 클럽?>’

그 순간 쏜살같이 원작의 내용이 스쳐 지나갔다.

‘폐하의 명을 받아 <발라뒤르 클럽>을 조사 중이었다.’

그 내용에 미아가 당황을 드러내기도 전에 세레니티가 수줍게 웃었다.

“고맙긴요. 미아가 가고 싶어 하는 곳인걸요. 도움이 될 수 있다니 기뻐요.”

“아, 응! 고마워, 렌!”

“그러니까 미아.”

그 순간 세레니티가 빙그레 미소 지으며 미아의 손을 붙잡았다. 묘하게 압박감이 느껴지는 접근이었다.

“여자를 만족시켜줄 수 없는 남자 따위는 무시하고 미아의 행복을 찾길 바라요. 몇 명이어도 좋아요.”

“…….”

“여자여도 괜찮고요.”

“…….”

“남녀 혼성도 괜찮아요! 저는…… 다 이해해요!”

미아가 중얼거렸다.

아냐. 난 네 머리를 이해 못 하겠는걸.

* * *

도서관에 가겠다던 세레니티와 헤어진 미아는 복도를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어쩐지 요즘 페르 얼굴을 보기가 어렵더라니.’

근래 들어 페르디안이 바빠 보이긴 했다. 한동안 얼굴을 보기도 어려웠고, 국정회의에서 본 것도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그게 다 이유가 있었던 거다.

‘폐하의 명을 받아 <발라뒤르 클럽>을 조사 중이었다.’

<장미 정원의 세레니티>는 남자주인공 이외의 인물에게도 나름대로 적절한 분량을 배분한 소설이었다. 요아힘이 ‘블루문 축제’ 에피소드로 독자들에게 매력을 어필했다면, 페르디안은 ‘발라뒤르 클럽’ 에피소드로 독자들의 표를 모았다.

정확한 내용은 세레니티가 오랜만에 거리의 의료원에서 봉사하는 부분에서부터 시작된다.

밤늦게까지 약초를 손질하느라 바빴던 세레니티는 골목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에 그곳으로 향한다.

그리고 거기서 부상을 입은 페르디안을 발견한다.

페르디안은 비밀 임무 때문에 어떤 모임에 잠입한 상태였는데, 어쩌다 정체가 들통날 위기에 처해 부상을 입은 채로 뛰쳐나온 상태였다.

세레니티는 밤새 페르디안을 치료해 주고, 치료하느라 옷도 좀 벗겨 보고, 그러나 손이 미끄러지면서 가슴에 손도 얹어 보고, 그리고 새벽이 되어서야 지쳐 잠든 세레니티를 내려다보며 페르디안은 자신의 마음을 자각하고…….

“흠!”

미아는 얼굴에 변태 같은 미소가 떠오르려는 것을 깨닫곤 헛기침했다. 아무튼 원래라면 그래야 했다.

문제는…….

‘렌. 혹시 이번 그믐에 밖에 나갈 일 있어?’

‘아뇨. 다행히 폐하께서 의료원 예산을 늘려 주셔서, 제가 굳이 가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세레니티와의 대화를 떠올린 미아가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면 페르디안 소설 내용대로 그날 임무를 수행하다 다친다는 뜻이었다.

“…….”

괜찮을 거야. 설마 죽기야 하겠어?

‘어쩌다 이렇게 다치신 건가요? 당장 치료하지 않으면 큰일날 뻔했어요!’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죽기야 하겠…….

‘그런 말은 피가 멎은 뒤에나 하세요!’

“…….”

한참을 고뇌하던 미아가 결국 황제궁으로 향하던 걸음을 옮겨 연무장으로 향했다.

‘하! 이젠 진짜 위험한 곳엔 안 가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페르디안을 만나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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