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네! 물어보세요.”
“왜 힐다를 도왔습니까?”
“네?”
미아 셀레스티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힐다가 레기아를 맞았을 때, 가장 먼저 물을 찾았던 게 당신이라고 들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덕분에 힐다의 상태가 예상만큼 심해지지는 않았지만, 당신은 그러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분홍색 눈이 깜빡였다. 그때마다 긴 속눈썹이 민들레 홀씨처럼 팔랑거렸다. 그 덕인지 그녀의 표정은 정말로 속을 알기가 어려웠다.
미아는 한참 뒤에야 주먹으로 입을 가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잘 모르겠는데요?”
“…….”
“그, 그냥?”
그 말에 고드릭 릴레는 어깨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눈살을 찌푸린 것을 보면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애초에 이런 질문을 받는 것 자체가 약간 당황스럽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릇 자체가 다르다 이건가.’
피식 웃은 릴레 후작이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딱 한 번, 제 의지와 관계없이 폐하를 지지하겠습니다.”
* * *
그로부터 하루 뒤. 매주 수요일 오전에만 있는, 오르퀘니나에서 가장 중요한 국정 회의.
긴장감이 감돌던 평소와 달리, 오늘은 당황과 혼란만이 감돌았다.
“……폐하.”
회의 참석자 중 한 명인 페르디안이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발언해. 키토 후작.”
“그…….”
페르디안은 좀처럼 알맞은 단어를 찾지 못했다. 그는 겨우 단어를 짜 맞췄다.
“……무릎에 있는 반려동물도 회의에 참석합니까?”
“응.”
아딜로트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고개 아래, 황제의 무릎 위에 앉아 있는 미아는 오만 가지 감정을 느끼는 중이었다.
‘숨지고 싶다.’
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
미아가 릴레 후작과의 대담까지 끝낸 이후를 떠올렸다. 미아는 아딜로트, 세레니티, 지로티 공작에게 차례차례 혼났다.
‘누가 해코지할 심산인 걸 알고 있었으면 얘기를 해.’
‘얘기하면?’
‘죽여 줄게.’
‘…….’
말하겠냐?
‘미아는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원래 세상은 혼자 사는 거 아닐까?’
‘…….’
‘미안합니다.’
침묵하는 세레니티는 잔소리하는 세레니티보다 무서웠다.
‘자네 때문에 내가 제 명에 못 살겠네! 그런 일이 있으면 마도구를 요청할 게 아니라 도와 달라고 해야 하지 않나!’
‘그치만 결국 해결했는데요!’
‘아이고, 자식새끼 낳아 봤자 소용없다더니!’
‘안 낳았으면서!?’
그런저런 사정 속에서 미아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다들 바쁘니까 남 일로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 말은 들은 아딜로트는 멈칫하더니, 불길할 정도로 수려하게 웃기 시작했다.
‘제인. 내일 얘 깨워서 데려와.’
‘네. 폐하.’
그렇게 끌려온 곳이 국정회의였다.
일전에 미아가 난입했던 작은 회의 따위가 아니었다. 오르퀘니나를 지탱하는 네 공작과 여섯 후작이 전부 모인 최고 회의.
지로티 공작, 키토 후작, 그라스 후작, 릴레 후작, 슐츠 공작과 호흐실트 후작 등등…….
내로라하는 이들이 모두 미아를 보고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네가 왜 거기 있니?
그러게 말입니다.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이 오갔다.
그러나 누구도 감히 말을 꺼내지 못했다. 책상 위에 떡하니 올라가 있는 ‘샹귀스-에키온’ 때문이었다. 그 의미는 명백했다.
시비 걸지 마라.
바로 그때였다. 누군가의 나직하고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폐하께선…… 쓰레기를 굳이 주워다 쓰시는 버릇이 있으신 모양이군요. 통탄스럽게도 말입니다.”
미아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곳에는 플로리안 크라우스 공작이 찢어진 녹색 눈을 건조하게 흘기며 말하고 있었다. 미아는 겁먹은 시늉을 한 채 그를 살폈다.
‘언제 한번 얼굴을 봐 둬야겠다고 생각은 했지.’
플로리안 크라우스.
지로티 공작과 더불어, 오르퀘니나의 가장 큰 세도가인 크라우스 공작가의 주인.
공격적인 가문 운영 탓에 사람들은 그가 건장한 호걸의 상일 거라고 예상하곤 했다. 하지만 그는 딱 그 정반대의 인물이었다.
크라우스 공작은 남들보다 말랐고, 예민한 인상에, 뺨이 푹 패인 얼굴에는 가늘고 섬세한 주름이 많았다.
깔끔하게 넘긴 흑발은 이마 윗부분만 희끗거렸고, 테가 얇은 안경은 가늘게 찢어진 그의 녹색 눈을 가려 주긴커녕 더 돋보이게 했다.
사람들의 머릿속 크라우스 공작과 실제의 크라우스 공작 사이의 공통점은 태도에서 배어 나오는 오만밖엔 없다고 해도 좋았다. 그는 현 황태후인 크리소르 크라우스의 친오빠이기도 했다.
“좋게 봐준다 해도 그것의 출신은 셀레스티얼……. 본디 이 자리에 참여할 수도 없는, 술이나 빚는 가문 아닙니까.”
메마른 녹색 시선이 미아를 향했다.
그때 아딜로트가 손을 들어 미아의 눈을 가렸다.
“그래서?”
머리 위에서 크라우스 공작 못지않게 건조하고, 더불어 섬뜩하기까지 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실을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늘 그렇듯이, 모든 결정은 폐하께서.”
“공은 좀 눈치가 없군. 이 자리에 데려온 걸 본 순간 내 결정은 이미 끝났다는 것 정도는 짐작했었어야지.”
도발적인 말에도 크라우스 공작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고개를 까딱했다.
“이런……. 그렇군요. 사죄드리지요.”
그 모습을 보며 미아는 감탄했다.
‘조용하게 사과하는데도 저렇게 안 미안해 보이는 것도 재주다.’
그 순간 미아와 크라우스 공작의 눈이 마주쳤다.
잠시 멈칫한 미아는 활짝 웃었고, 그러자 크라우스 공작의 눈매가 움찔했다. 그는 이내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그 반응에 미아는 확신했다.
‘내가 태후파가 아니라고 의심하고 있네.’
그게 아니라면 나한테 굳이 저렇게 적대적으로 나올 이유가 없잖아?
‘시즈가 커버해 주는 것도 슬슬 끝나겠어.’
미아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가라앉은 분위기 때문인지 누군가 쾌활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분위기가 너무 심각해졌는데요?”
리누스 호흐실트 후작.
잔뜩 힘을 준 잿빛 머리카락에 보라색 눈을 가진 그가 미아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폐하께서도 생각이 있으시겠죠. 무엇보다 저는 저 숙녀분이 꽤 마음에 듭니다.”
“호흐실트 후작! 사람도 아닌 짐승에게 숙녀라니!”
당장 그라스 후작이 눈살을 찌푸렸지만 호흐실트 후작은 코웃음만 쳤다.
“눈 가리고 아웅 하지 마시죠, 그라스 후작. 공께서도 최근에 사람들 사이의 소문은 들으셨을 거 아닙니까? 폐하께서 사랑을 알게 되었다느니, 그 덕에 광증이 가라앉았다느니. 실제로 그녀가 황후가 된다고 한들, 백성들은 기뻐할걸요?”
“무슨! 규범에 어긋나오!”
“그 말이 맞지!”
카르디날레 공작이 탁자를 내려치며 난입했다.
“애초에 반역자의 딸에게 황후라니 가당치도 않은 소리!”
“모든 결정은 폐하께서 하십니다. 그게 폐하의 결정이라면 따르는 것이 신하의 도리입니다.”
그 와중에 가만히 있던 페르디안까지 인상을 쓰고 끼어들자 정무실은 걷잡을 수 없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슐츠 공작이 한숨 쉬었고, 릴레 후작은 이 개판에 끼고 싶지 않다는 듯이 꿋꿋이 정면만 바라보았으며, 지로티 공작은 킬킬 웃으며 주섬주섬 술병을 꺼냈다.
‘개판이네.’
미아는 작게 감탄했다. 평소에 아딜로트가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했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아딜로트는 처음엔 그들의 말을 가만히 들어주는 듯했다. 그러다 점차 의견이 격해지고 인신공격으로 주제가 넘어가자, 잠자코 ‘샹귀스-에키온’을 향해 손을 뻗었다.
“…….”
“…….”
“회의나 하지.”
그러자 주변이 알아서 조용해졌다. 순식간에 아딜로트의 말을 끝으로 서류가 팔랑팔랑 넘어가는 소리만이 남았다.
‘죽인다, 폭군…….’
잠깐 감탄했던 미아가 뒤늦게 제정신을 차리고 꼼지락거렸다.
‘그보다 난 이대로 있어야 하는 거야?’
자신을 꼭 끌어안고 있는 아딜로트의 몸짓을 보면 순순히 놓아줄 것 같진 않았다.
‘그래! 차라리 방해하자! 방해해서 쫓겨나는 거야!’
고민 끝에 미아가 보고를 듣던 아딜로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폐하?”
아딜로트가 바로 미아를 쳐다보았다.
“배고파? 아니면 심심한가?”
대신들을 볼 땐 차갑고 시큰둥하기만 하던 얼굴에 희미한 염려가 엿보였다.
‘잘생기긴 진짜 잘생겼……, 이게 아니지.’
잠시 얼굴에 홀렸던 미아가 헛기침하며 마음을 다잡은 뒤, 활짝 웃었다.
“네! 미아는 이런 거 너무 재미없고 짜증나요!”
“쿨럭.”
“흡.”
난데없는 3인칭 화법에 대신들이 제각기 기침하는 것이 들렸다. 죄송한데 저라고 좋은 줄 아시나요.
“미아는 여기 너무 재미없고 심심해요! 나갈래요!”
미아가 꺄르르 웃으며 외쳤다.
‘이쯤 했으면 보내 주겠지!’
그러나 다음 순간, 아딜로트는 무심한 얼굴 그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아딜도 나갈래.”
“뭐, 예?”
“사실 아딜도 이거 재미없어.”
“―그런 거 따라하지 말라고!”
미아가 수치심에 얼굴을 가린 사이, 아딜로트는 미아를 번쩍 들어 올린 뒤 정무실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나가는 게 아니라 나가라고 하란 말이야아아아……!”
공주님처럼 안긴 미아의 절규가 길게 이어졌다.
* * *
쾅.
정무실의 문이 닫혔다.
미아를 데리고 나온 아딜로트를 근위병들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폐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딜이…….”
“으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