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신관을 불렀다며?”
일하다 소식을 듣고 곧장 온 모양이었다.
늘 그를 휘감고 있는 나른함은 업무 때문인지 느슨한 피로에 가까워져 있었고, 그럼에도 미아를 내려다보는 붉은 눈은 예기를 잃지 않은 채 빛났다.
“으, 으응! 지나가다 ‘우연히’ 다친 사람을 만나서!”
“…….”
미아의 변명에 아딜로트는 매우 뚱한 얼굴을 하고서 그녀를 지긋이 응시하더니, 허리춤의 걸려 있는 단검을 툭 두드리며 한마디를 내뱉었다.
“귀찮아지면 말하고.”
무심한 그 말에 미아가 웃는 얼굴 그대로 침묵했다.
‘대신 죽여 준다는 뜻이겠지…….’
그녀는 재빨리 양손을 비비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응! 말할 테니까! 아딜은 일 열심히 하고!”
“안 말할 거면서.”
“히.”
미아가 혀를 내밀며 웃자 아딜로트는 어이없다는 듯이 코웃음 쳤다.
“너, 저번에도 말했지만 절대로…….”
“안 다칠게!”
“…….”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아딜은 일해!”
미아가 아딜로트의 등을 꾹꾹 누르며 그를 방 밖으로 밀어냈다. 아딜로트는 못마땅한 듯이 눈살을 찌푸리고서도 별말 없이 물러나 주었다.
‘다칠 뻔하긴 했지만, 안 다쳤으니까 됐지, 뭐!’
요제프에 대해 말하지 않는 건 조금 의외였지만, 아마 세레니티의 청혼 때문에 별거 아닌 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의외로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인 건 세레니티였다.
“미아는 알고 있었군요.”
모두를 내보낸 방 안에서 세레니티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반사 마법 브로치는 특별한 목적이 없으면 굳이 찾을 만한 물건이 아니에요. 미아는 릴레 양이 위험한 짓을 하리란 걸 알고 있었군요?”
평소와 다른 진중한 모습에 미아는 괜히 볼만 부풀린 채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음……. 화났어?”
“네. 화났어요.”
“…….”
미아의 뺨이 쏙 들어갔다.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자니, 세레니티는 조금 분한 듯이 말했다.
“일전에도, 위험한 행동은 하지 말아 달라고 했는데…….”
“……저기, 내가 당하고 싶어서 당한 게 아니라…….”
“미리 말해 줄 순 없었던 건가요? 저는 미아의 친구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세레니티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레, 렌?”
“이번에도 그래요. 어째서 저를 감싸는 거예요? 물론 그런 미아의 행동은 너무나 고맙지만, 마치 자기 목숨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차라리 저는 미아가 저를 방패로 삼았으면 좋겠어요.”
“무슨 말이야? 내가 어떻게 그래!”
당황한 미아가 외쳤으나, 세레니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럼 저는 어떻게 그러겠어요!”
힘없는 외침과 함께 맑은 눈물이 툭 떨어졌다.
“미아는 매번 제게 지켜 주겠다고 하고…….”
“…….”
그야 대책을 다 세워 놨으니까…… 하고 대답하면 세레니티에게 혼날 것 같아서, 미아는 얌전히 그녀의 말을 경청할 뿐이었다.
“서운해요, 미아. 저는 서운하다고요……. 제게도 미아는 소중한데…….”
뺨을 발갛게 물들인 채 서럽게 훌쩍이던 세레니티는 이내 뭔가를 결심한 듯이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황태후 폐하와 주기적으로 만나고 있으니 미아가 저를 믿지 못하는 것도 이해해요.”
“흐억.”
지금까지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적나라한 표현에 미아가 경악했다. 그리고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방엔 둘뿐이었다. 미아가 서둘러 대답했다.
“렌!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리고 그런 거 아니야!”
“들어 주세요, 미아.”
평소와는 다른 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미아의 두 눈이 흔들렸다.
입술을 꾹 깨문 세레니티가 말을 이었다.
“맞아요. 황태후 폐하는 미아에 대해 궁금해하세요. 그래서 제게 늘 미아에 관해 물으시죠.”
“렌!”
“저는 그게 좋은 뜻이라고 느껴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늘 적당한 대답만 해 왔고요. 그러면서도 계속 황태후 폐하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하는 건…… 결코 제 안위 때문만은 아니에요.”
“…….”
“언젠가 분명, 미아의 싸움에 제가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어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미아의 입이 떡 하고 벌어졌다.
그저 황제와 황태후의 권력 싸움에서 새우 등 터지지 않게 외줄 타기를 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하지만 렌은…… 아딜을 지지하지 않는 거 아니었어?”
“네. 저는 폐하의 편이 아니에요. 황태후 폐하의 편도 아니고요.”
“그럼…….”
“저는 그냥 미아의 편이에요.”
세레니티는 그렇게 말하고서 눈물 젖은 금빛 눈을 휘어 싱긋 웃었다. 말문이 막힌 미아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그 모습을 지켜만 보았다.
“이 이야기가 밖으로 새어 나가면 저는 분명 위험해지겠죠? 하지만 괜찮아요. 저는 미아 혼자 위험해지게 두고 싶지 않아요.”
“렌…….”
“저를 미아의 진짜 친구로 받아 줘요, 미아.”
“…….”
미아는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금빛 눈을 응시했다. 간절함이 느껴졌고, 강인했다.
‘세레니티는 절대 무너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옳은 것과 선한 것을 좇는 사람이었다.’
원작에서의 세레니티처럼 말이다.
“…….”
미아가 진중한 눈으로 세레니티를 바라보았다.
‘난 여전히 렌이 위험하지 않은 곳에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그녀는 원작에서 너무 많은 고생을 했다. 지금도 가정 내의 불화는 여전했고 말이다.
그러니 세레니티가 행복하길 바랐지만…….
‘하지만 이렇게까지 나를 생각해 주는 렌의 마음을 무시하고 싶지도 않아.’
결국, 미아는 픽 웃고 말았다.
“알았어. 모두 말해 줄게.”
아무래도 못된 장난을 칠 동지가 한 명 더 생길 모양이었다.
* * *
미아는 세레니티와 침대에 누워, 저녁 시간을 모두 써서 그간의 일을 말했다.
힐데가르트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가 반역에 연루되었으며, 그 때문에 이중 첩자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까지도 말이다.
‘그라스 후작의 뒤를 캐고 있다는 건 역시 말 못 하겠지만.’
사정을 전부 들은 세레니티는 몹시 분노했다.
“전 미아가 그런 일을 당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그야 내가 말을 안 했고, 렌은 내 부탁으로 정보를 모아야 했으니까!”
거기까지 말한 미아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정보는 혹시 어떻게 됐어, 렌?”
묻기는 했지만 사실 기대하지는 않았다. 비밀 사교 모임이란 게 그렇게 쉽게 남에게 말할 만한 정보는 아니니까.
게다가 예의 사교 모임은 매우 저질스러운 모임이라고 알고 있으니, 귀족들로서는 입에 올리기도 꺼릴 법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세레니티는 당당하게 웃었다.
“당연히 알아냈어요, 미아.”
미아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짜?”
“네. 물론이에요. 미아에게 도움이 되면 좋겠어요. 이 일이 끝나면 알려 줄게요.”
“와! 고마워, 렌!”
“그리고 황태후 폐하는…….”
세레니티의 얼굴에 수심이 차올랐다.
“……당장은 지금 이대로가 최선이겠네요. 미아가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
“응! 자기편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까지는 나를 해치려고 하진 않을 테니까.”
“하지만 적으로 돌아서면, 제가 미아의 약점이 될 수도 있겠고요.”
세레니티의 말에 미아는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세레니티는 보다 진지하게 눈을 빛냈다.
“걱정하지 말아요, 미아. 제 나름대로 처신은 잘하고 있으니까요. 만에 하나 위험한 순간이 오더라도, 제 몸 하나는 제가 건사할게요.”
“응. 대신 무리는 하지 말고! 난 렌이 안전한 게 제일 우선이니까.”
세레니티가 달콤하게 웃었다.
“고마워요, 미아. 저도 같은 마음이에요.”
“히히!”
미아가 활짝 웃으며 세레니티를 끌어안았다. 세레니티는 뺨을 붉히며 미아의 등을 토닥인 다음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보다 미아, 그러면 혹시 요제프 백작 각하도 힐다 양의 계략이었던 건가요?”
“아! 아니야. 걔는 힐데가르트한테도 상정 외였을 거야!”
“그렇군요. 그럼 결국 미아가 릴레 양의 계략을 피한 거네요?”
“그렇지!”
“릴레 양 성격상 가만있진 않을 테고요.”
“아마도!”
미아의 맞장구를 얌전히 듣고만 있던 세레니티가 눈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겼다.
“미아 말대로, 판을 깔아 주는 게 더 낫겠네요.”
그녀는 그렇게 말한 뒤 잠시 나갔다 돌아왔다. 다시 돌아온 세레니티의 손에는 초대장 하나가 들려 있었다.
“마침 저한테 무도회 초대장이 왔어요. 중립 귀족의 초대장이에요. 여기에 미아도 함께 참여하겠다고 전달하면, 분명 릴레 양도 오겠죠?”
“그렇겠지?”
미아는 순간적으로 마지막에 힐데가르트가 보였던 태도를 떠올렸다.
그녀는 분명 예니를 이용할 것이다. 자신에게 수를 쓴 게 들키지 않으려면, 최대한 빨리 역으로 쳐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 무대는 세레니티의 말대로 아마 무도회가 될 것이다.
힐데가르트가 세도가인 릴레 후작가의 영애인 이상, 관객이 많을수록 자신이 더 유리할 거라고 생각할 테니 말이다.
‘뭐가 됐든 나는 힐다가 깔아 준 판을 이용만 하면―.’
그때, 미아의 생각을 끊고 세레니티가 말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면 어떨까요?”
“다른 사람?”
“네. 이런 건 주변의 호응도 중요하니까요.”
세레니티의 말에 미아는 애매하게 웃었다.
‘호응이라……. 그런 거 해 줄 사람은 없을 것 같은데.’
세레니티야 자신을 좋게 봐주고 있지만, 사교계 전반에서 미아의 평가는 그리 좋지 않았다. 중립 귀족의 무도회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그래서 미아는 논리적 적합성으로만 힐데가르트를 이길 생각이었다.
“내가 반역자의 딸인 건 기억하고 있지, 렌? 그리고 황제에게 총애 받는…….”
하지만 세레니티는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그건 걱정하지 말아요. 그동안 저도 놀고 있지만은 않았거든요.”
“응?”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미아의 반문에 세레니티는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보여 줄게요. 제가 왜 미아와 함께 사교 모임에 나가기로 했는지.”
* * *
그날 밤, 예니는 밤에 삯마차를 타고 릴레 후작저로 돌아갔다.
‘얼굴 느낌이 이상해.’
그녀가 연신 자신의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신관의 힘으로 이미 반 정도는 치유된 상태였다. 미아는 그 상태에서 브로치 하나를 내밀었다.
‘얼굴을 흉측하게 보이게 하는 마법이 걸려 있어. 네가 실패했단 걸 알았을 때, 힐데가르트가 널 진심으로 걱정해 줄지 한번 시험해 봐.’
괘씸한.
예니가 문득 든 생각에 지레 놀라 주변을 살폈다.
후작저는 조용했다. 그녀는 로브를 더 깊게 눌러쓰고서 다시 걸음을 옮겼다.
내딛는 발걸음마다 황제궁에 있을 ‘그 여자’의 말이 떠올라 걸음이 무거웠다.
‘미아 셀레스티얼…….’
반역자의 딸이자, 황제가 극진히 아끼는 그의 애완동물.
‘정말로 아낌받고 있는 것 같았지.’
미아는 그 넓고 화려한 황궁 레벤토르가 제집처럼 익숙해 보였다. 입고 있는 실내복은 최고급이었고, 그녀의 옆에서는 황제의 최측근 시녀인 제인 고트샬크가 미아의 시중을 들었다.
‘나…… 생각보다 무서운 사람을 해치려 한 건 아닐까?’
계단을 오르며 예니는 불안에 휩싸였다. 하지만 이내 주먹을 꼭 쥔 채 망토를 단단히 여몄다.
‘아니, 난 우리 아가씨를 믿어. 분명 힐데가르트 아가씨는 날 도와주실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