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폭풍 같던 티 타임이 끝났다.
미아는 멍하니 앉아 세레니티와 함께 마차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세레니티는 옆에서 연신 얼굴을 붉히고 안절부절못했다.
“미, 미안해요, 미아. 저도 모르게…….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아니야. 잘했어, 렌…….”
의외로 세레니티의 반격은 요제프에게 제대로 먹혔다.
‘크, 크윽! 여자까지 홀리시다니……! 과연 제가 반한 여자! 이번엔 물러나지만, 지지 않겠습니다!’
요제프는 그런 웃긴 말을 남기고 퇴장했다. 정말 보기 드문 미친 새끼였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들이 남녀를 가리지 않는 미아의 매력에 대해 궁금해하며 티 타임은 끝났다.
돌아가서 어떤 소문이 퍼질지는 뻔했다.
한숨을 내쉰 미아가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어차피 자신이 컨트롤할 수 없는 부분이니, 굳이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그보다 도와줘서 고마워, 렌! 덕분에 변태를 퇴치했어!”
“미아…….”
세레니티가 눈시울을 붉히며 미아의 손을 맞잡았다.
“역시 저랑 결혼해요!”
“난 남자가 좋아.”
“흑, 폐하는…… 비겁하게 남자여서 미아의 사랑을 받기나 하고!”
“……그런 말 내 앞에서만 해야 한다?”
그때였다. 헤롯 자작가의 시종 한 명이 다가와 비보를 알렸다.
“황궁 마차가 고장났다고?”
그의 말에 미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차가 고장나 있더라고요. 어, 어떡하죠? 대신 상업 마차를 불렀으니 그걸 타고 가시는 게…….”
뒤늦게 나타난 브리안느 헤롯 자작 영애가 눈치를 보며 말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그제야 미아도 요제프의 충격에서 벗어나 정신을 차렸다.
브리안느 헤롯에게서는 미아가 거절할까 봐 불안해하는 기색이 다분히 느껴졌다. 미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기울였다가, 세레니티를 돌아보았다.
“렌. 괜찮지?”
세레니티는 미아의 눈빛을 보고는 뭔가를 예상했는지 조금 긴장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미아가 함께 있는걸요.”
미아가 씩 웃고는, 브리안느 헤롯을 향해 말했다.
“좋아요! 대신 부탁할 게 있는데요!”
“부탁이요?”
잠깐 반색했던 브리안느 헤롯이 의아하게 되물었다. 그녀를 보며 미아는 지로티 공작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독한 액체가 몸에 튀었을 때 대처법? 뭐, 기본은 물이겠지? 잠깐, 그건 왜 물어보나?’
‘으힝!’
‘이보게 자네!’
‘으힝힝힝!’
미아가 명랑하게 외쳤다.
“물이 좀 필요한데요!”
* * *
브리안느가 마차를 준비하는 동안.
미아는 세레니티와 잠시 떨어져 나와 투왈렛 룸으로 향했다. 다행히 다른 이들은 모두 자기 마차를 타고 떠난 터라 투왈렛 룸에는 아무도 없었다.
“시즈.”
미아가 안심하고 이름을 부르자마자, 율리시즈가 안쪽 문을 열고 나타났다.
“미, 미아 님.”
태연한 그 모습을 보고 미아가 헛웃음을 지었다.
“대체 어떻게 그런 데서 나오는 거야?”
“비, 비밀이에요……. 그, 그보다 부르신 이유는요……?”
“아. 부탁 하나 하려고! 먼저 레벤토르에 가서 신관을 대기시켜 줄 수 있어?”
미아의 말에 율리시즈가 멈칫했다.
“신관이요……?”
“응. 누가 좀 다칠 거거든!”
“……미아 님이요?”
“난 아닐걸~?”
미아의 대답을 듣고도 율리시즈는 진실을 가늠하듯이 미아를 오래 응시했다.
그의 시선이 잠깐 미아가 차고 있는 브로치로 향했다. 곧이어 율리시즈가 좀 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냥, 제가 죽여드릴까요……?”
미아가 잠깐 멈칫했다.
“누굴?”
“힐데가르트 릴레요…….”
뜻밖의 제안에 미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흐음. 공짜로?”
율리시즈의 연한 갈색 눈이 다정하게 가늘어졌다.
“네……. 미아 님이라면, 공짜로요.”
“전문가는 잘하는 거 공짜로 해 주면 안 되는데?”
“하지만 미아 님인걸요……?”
“계약이랑은 관계없는데도?”
율리시즈는 눈을 내리깐 채 침묵하더니, 소매로 입을 가리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가 문제냐는 듯한 제스처였다.
‘흐음?’
뭔가를 깨달은 미아는 이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이런 데서는 안 죽어!”
“그게, 아니라…….”
“그보다 하나 더!”
그 순간, 미아가 율리시즈와의 거리를 훅 좁혔다.
“미, 미아 님……?”
율리시즈가 주춤거리며 벽으로 밀려났다. 그의 등이 벽에 닿아도 미아는 멈추지 않고 슬금슬금 율리시즈에게 다가갔다.
마침내 미아와의 거리가 한 뼘도 남지 않은 순간.
미아가 낮게 물었다.
“혹시 나한테 감시자 붙어 있어?”
“…….”
율리시즈가 멈칫했다. 그리고 삽시간에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는 허둥지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에. 하, 한 명……. 황제의…….”
“아. 역시?”
미아가 좀 더 몸을 가까이 붙이며 속삭였다.
“그럼 혹시 그 사람 좀 잠깐 떼어 내 줄 수 있어? 나 돌아가는 동안만!”
“그, 그건 왜…….”
“아딜한테 보고가 들어갈 거 아냐! 분명 화낼 거 같다구!”
계획을 떠올린 미아가 울상을 지었다.
“응? 해 줄 거지? 할 수 있지?”
“하, 하지만…….”
“응? 응응?”
“……!”
좀 더 다가오는 미아의 얼굴에 율리시즈가 기어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미아의 눈앞에서 사라지더니, 투왈렛 룸의 문 근처에서 다시 나타났다.
“아, 알겠어요……! 해드리면…… 되잖아요!”
분홍색 머리카락만큼이나 달아오른 얼굴로 율리시즈가 외쳤다. 어지간히 울상이었다.
“그, 그렇게만 해드리면 되죠……!”
“응! 부탁해?”
활짝 웃는 미아를 원망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던 율리시즈는 이내 휙 사라졌다.
율리시즈가 사라진 뒤, 미아는 멋쩍게 한숨을 쉬며 괜히 뺨을 문질렀다. 정말로 당황한 듯이 흔들리던 율리시즈의 동공이 떠올랐다.
‘……착각이겠지? 설마 그러겠어!’
그녀는 이내 생각을 털어 내곤 몸을 돌렸다.
* * *
“오늘 초대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즐겁게 이야기 나눠 주세요!”
미아와 세레니티를 배웅하는 브리안느 헤롯의 얼굴은 만족스러운 빛을 띠고 있었다.
‘힐데가르트가 무슨 계획을 세웠는지 알면 그렇게 못 웃을 텐데.’
미아는 그런 생각을 하며 마차에 올라탔다. 브리안느가 부른 상업 마차였다. 물이 가득찬 물병 열다섯 개와 함께 마차는 곧 달리기 시작했다.
마차에 탈 때부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던 세레니티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긴장이 아예 풀린 듯했다.
“미아. 저희 아무 일 없이 빠져나온 게 맞나요?”
“아직까지는?”
“그럼 다 잘된 거죠?”
세레니티가 피어나는 작약처럼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안심한 모양이었다. 거기에 긍정의 대답을 들려줄 수 없는 게 미안할 정도로.
“아니. 아마 지금부터일 거야.”
“네?”
미아는 대답 대신 창밖을 턱짓했다. 세레니티가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금세 그녀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잠깐만요, 저희, 어디로 가고 있는 거예요?”
“그러게?”
“이건 황궁으로 향하는 길이 아니에요!”
“그러네!”
“이 방향은 유성구……!”
세레니티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유성구는 수도의 빈민가다. 당연하지만 범죄율도 높고, 거리는 지저분하며 치안이 좋지 않다.
“마차를 멈춰야 해요!”
“안 멈출 거야.”
“미아!”
지나치게 태연한 미아를 보고 세레니티는 발을 동동 굴렀다. 하지만 미아는 냉정함을 잃지 않은 채 원작의 내용을 떠올렸다.
‘개발이 다 이뤄지지 않은 유성구에는 작은 숲이 있다. 마차는 그 숲의 정중앙에 가서야 멈췄다.’
때마침 창밖 너머로 마차가 숲에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그제야 미아는 세레니티를 문과 가장 먼 곳으로 당긴 뒤, 품에 끌어안았다.
“미아! 무슨 일이……!”
“쉬! 괜찮아. 내가 지켜 줄게!”
뭔가를 예감하고 저항하는 세레니티와, 마차 안에서 출렁이는 물소리.
이윽고 마차가 갑자기 멈췄다.
‘왔다!’
미아가 눈을 부릅떴고, 곧이어 마차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복면을 쓴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
품 안에서 세레니티가 당황해 몸을 굳히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미아를 발견한 복면인의 눈이 사악한 빛을 띠고서 휘어지는 게 보였다. 그는 벼락같이 빠르게 품에서 유리병 하나를 꺼냈다.
‘레기아 용액!’
미아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복면인이 그녀를 향해 유리병을 휘두른 순간.
―파앙!
미아의 브로치에서 푸른 마력이 터져 나왔다.
* * *
미아의 품에 안긴 채, 세레니티는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뭐가 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마차가 갑자기 이상한 곳으로 향했고, 갑자기 나타난 괴한이 뭔가를 뿌렸고, 마력이 번쩍였고…….
“아아악!”
아직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그녀를 현실로 끌어 내린 것은 누군가의 비명이었다.
그제야 세레니티가 눈을 떴다. 미아는 어느새 마차에서 뛰어내리고 있었다.
마차 문 앞에서는 복면을 쓴 괴한이 땅을 뒹굴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세레니티는 저도 모르게 손을 입을 가렸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홱 돌리려던 순간, 그녀는 복면인의 얼굴을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분명 힐데가르트 릴레 양의 시녀였던 것 같은데…….’
살롱이 열릴 때 시녀들은 구석에서 대기 중이기에, 오다가다 세레니티 역시도 그녀를 본 기억이 있던 것이다.
‘설마 릴레 양이 미아를 해치려 한 거야?’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세레니티가 반사적으로 미아를 바라보았을 때였다. 미아가 외쳤다.
“렌! 물 좀!”
“네? 아……, 여기……!”
“그리고 안 다쳤지? 미안, 이게 좀 급해서!”
“네! 그렇긴 한데, 어떻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