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초대장은 브리안느 헤롯 자작 영애에게서 온 것이었다. 미아는 초대장을 확인하자마자 세레니티에게 말했다.
‘렌. 나도 함께 가겠다고 연락을 넣어 줘.’
‘미아도요?’
‘응. 수락할 거야.’
미아의 예상대로 헤롯 자작 영애는 즉시 그것을 승낙했다.
그리하여 티 타임 당일.
미아는 세레니티와 함께 헤롯 자작저로 향하는 마차에 타고 있었다. 창밖을 내다보며 미아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분명 오늘이야. 원작의 그날.’
원래대로라면 세레니티가 레기아 용액을 맞아야 하는 날.
대비는 단단히 했다. 율리시즈에게 일러두기까지 했으니, 분명 별 탈 없을 터였다.
그래도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그리고 내내 입을 다문 채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세레니티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미아.”
“응?”
“뭔가 일어나는 거죠?”
움찔.
예상치 못한 질문에 미아가 딴청부리며 화사하게 웃었다.
“아, 아닌데!? 아무 일 없는데!?”
하지만 세레니티는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떴다.
“거짓말하지 말아요, 미아. 분명 이번 티 타임에서 뭔가 생기는 거죠?”
“왜, 왜 그렇게 생각하실까!?”
“왜겠어요?”
세레니티가 자신의 옷 구석구석, 심지어 주머니에까지 쑤셔박혀 있는 마법 도구들을 가리켰다.
“저번의 세크레 호수 야유회 때랑 같잖아요. 그때도 미아, 분명 뭔가를 대비하듯이 이것저것 챙겼었죠?”
“윽.”
“대체 이 마법 도구는 전부 뭔가요? 어떻게 들여온 거예요? 황궁은 마법 물품의 반입을 극도로 제한하고 있는데.”
“그, 그게, 마, 맘씨 좋은 할아버지가……?”
세레니티의 질문에 미아가 난처하게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녀에게 마도구를 전해 준 장본인인 지로티 공작도 세레니티와 비슷한 반응이었던 게 떠오른 것이다.
‘자네 혹시 위험한 짓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저번에도 뭘 가져가더니 폭발 사건에 휘말리질 않나!’
‘와! 그땐 진짜 감사했어요! 근데 안 도와주시면 저 더 위험해질 것 같은데!?’
‘이보게!’
‘까르륵!’
지로티 공작은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결국 미아가 원하는 마도구들을 전해 주었다.
세레니티의 말대로, 보통 사람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황궁에는 사사로이 마도구를 반입할 수 없으니까.
그야말로 라지푸트와 맞닿아 있는 북부 최전선 지로티령의 주인이자, 국방대신을 맡고 있는 지로티 공작이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나한테 이상하게 잘해 주시는 분이긴 한데, 내가 너무 알차게 이용해 먹나?’
하지만 그렇다고 상대가 몹쓸 짓을 하리란 걸 아는데 앉아서 당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혹시 몰라 세레니티에게도 단단히 대비를 시키자, 사정을 모르는 세레니티는 답답한 얼굴이었다.
“미아. 무슨 일인지 말해 줘요. 그때처럼 미아에게 도움만 받고 싶진 않아요.”
“으음…….”
“힐데가르트 릴레 양이 미아에게 뭔가를 하려는 건가요?”
계속해서 이어지는 질문에 미아는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말해 줄게! 휴……. 그러니까 말하자면, 오늘 나는 좀 위험해질 수도 있어!”
미아의 말에 세레니티의 얼굴이 굳었다.
“미아가요? 힐데가르트 릴레 양과 사이가 틀어진 건 들었지만, 이건 릴레 양의 초대도 아닌데…….”
“오히려 그래서야! 내가 남한테 수작을 부리고 싶을 때, 나라면 내가 연 파티에서 일을 터뜨리진 않을 거거든.”
“아…….”
“이 마법 도구들은 대비책이야. 렌에게도 준 건, 혹시 나랑 친한 렌을 노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고.”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예요? 미아는 어떻게 그걸……. 아니, 그 이전에 차라리 그럼 초대에 응하지 않는 게!”
“아니야. 렌. 어차피 일어날 일이야.”
미아가 고개를 살래살래 젓고는, 씩 웃었다.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 내 예상이 맞다면, 티 타임 자체는 문제없을 거거든.”
* * *
미아의 예상이 맞았다.
영애들이 매우 공격적으로 한마디씩 건네기는 했지만, 티 타임 자체에는 별일이 없었다. 세레니티와 미아를 초대한 브리안느 헤롯 자작 영애도 딱히 그들에게 해코지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디에도 힐데가르트 릴레는 없었다.
‘예상대로네.’
예상과 다른 건, 그렇게 적대적인 상황에서도 세레니티에게 다가오는 영애들이 있었다는 점이었다.
“저, 듀레인 양.”
“얀츠 양. 슈미트 양?”
주변의 매서운 시선에도 불구하고 몇 명의 영애들이 다가와 미아와 세레니티가 있는 테이블에 앉았다. 그전까지는 텅 비어 있었으니,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말이다.
세레니티 역시도 그 점이 걱정됐는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이곳에 계셔도 되는 건가요?”
그녀의 말에 한 영애가 주먹을 꼭 쥔 채, 주변의 눈치를 보면서도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저……, 듀레인 양이 좋은 분이라는 거 알고 있으니까요.”
“저도요. 사실 이렇게 말을 걸어선 안 되지만, 듀레인 양처럼 좋은 분이 이런 취급을 받는 건…… 너무하다고 생각해요.”
“슈미트 양…….”
세레니티는 감동한 얼굴로 눈시울을 붉혔다. 두 영애는 배시시 웃고는 미아를 향해 말했다.
“그리고 듀레인 양이 미아 님에 대해 좋은 말을 많이 하셨어요.”
그 말에 미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레니티가?’
하지만 세레니티는 부끄러운지 볼을 붉히곤 손을 파닥파닥 내저었다.
“저, 저는 그냥 미아가 너무 좋은 마음에…….”
늘 어른스러운 그녀의 허둥지둥하는 모습에 다들 조금 웃음을 터뜨렸다.
“알아요. 듀레인 양이 그렇게 말할 정도면 미아 님도 좋은 분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마, 맞아요. 저, 저희도 처음엔 남의 말만 듣고 미아 님에 대해 안 좋은 생각을 하긴 했지만…….”
그녀들은 천천히 미아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전부 오해였던 것 같아요.”
입술을 꾹 다문 모습에서 정말로 미안해하는 것이 느껴졌다. 미아는 그런 두 사람을 보며 활짝 웃었다.
“괜찮아요!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요!”
이후 두 사람은 사람들의 눈총을 받으면서도 꿋꿋이 미아와 세레니티 옆에 있었다.
원래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번 티 타임엔 전부 힐데가르트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이들만 초대받았으니까. 주최자인 브리안느 헤롯도 조금 당황한 눈치였다.
그렇게 티 타임이 끝나갈 무렵.
미아마저 예상치 못한 손님이 쳐들어왔다.
“미아 님이 여기에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 * *
예고도 없이 헤롯 자작저에 쳐들어온 사람은 요제프 크네히트였다. 그는 자기 몸통보다 큰 꽃다발을 품에 안은 채 살롱에 난입했다.
“크, 크네히트 백작 각하! 이게 무슨 무례한 행동이시죠!”
브리안느 헤롯 자작 영애가 당황해 나섰지만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 보였다. 요제프 크네히트는 힐데가르트 릴레의 약혼자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미아는 거대한 분홍색 꽃다발을 보며 격한 불안에 휩싸였다.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야……. 아니라고 해라…….’
숙녀들이 눈살을 찌푸리고 부채 너머로 쑥덕댔지만 요제프는 그것 무시하고 힘찬 기세로 주변을 살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아를 찾아낸 요제프의 낯에는 진한 환희가 떠올랐다.
“미아 님!”
망설임 없이 미아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온 요제프가 무릎을 꿇었다.
“저는…… 미아 님을 처음 본 순간 사랑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저와 결혼을 전제로 교제해 주십시오!”
“어머!”
“세상에!”
숙녀들의 눈이 번득였다. 요제프가 힐데가르트의 약혼자라는 사실은 주지의 사실이었다.
‘치정 싸움!’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게 남의 집 불구경인 법이다.
부채 너머로 입술을 숨긴 사람들 사이에서 미아는 한동안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멈춰 있었다.
그리고 한참 뒤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
“크네히트…… 백작 각하……?”
“네!”
“청혼할…… 대상이…… 잘못된 것 같은데요……?”
그러자 요제프 크네히트의 눈이 우수에 젖었다.
“다정하시군요……. 과연 제가 반한 여인답습니다…….”
죽일까?
미아가 포크를 움켜쥐는 사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연극을 하듯 가슴에 손을 얹었다.
“물론 저는 현재 힐다의 약혼자입니다.”
“…….”
“하지만…… 저는 미아 님을 본 순간, 첫눈에 반한다는 게 뭔지 깨달아 버렸습니다.”
미아의 머릿속이 하얗게 표백됐다.
‘받는 사람의 입장은?’
굳은 미아를 두고 요제프는 모두를 향해 호소하듯 외쳤다.
“물론 릴레 후작 각하께서 불같이 화를 내시겠지만! 저는 미아 님께 사랑을 느꼈습니다. 저 맑고 천진한 눈, 고양이 앞발 같은 부드러운 손…….”
요제프가 꿈꾸듯 말했다.
“미아 님 같은 분껜 황궁보다 더 넓은 세상이 어울립니다. 저의 가슴처럼요.”
“하하!”
칼. 칼 없나? 미아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동안, 요제프는 착잡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미아 님이야말로 제가 찾던 이상형이십니다. 힐데가르트는 분명 아름답지만…… 그녀의 아름다움은 만들어진 가짜니까요.”
“가짜라고요?”
누군가 은근슬쩍 물었다. 모르는 체하며 상황을 부추기고 싶은 게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요제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질문에 대답했다.
“그녀는 하루에 다섯 시간씩 피부 미용에 매달리곤 합니다. 전 머릿속에 치장밖에 없는 여자와는 결혼하고 싶지 않습니다. 외모는 중요한 게 아니니까 말입니다!”
그는 그렇게 말한 뒤, 미아에게 다시 무릎을 꿇었다.
“물론 미아 님은 아름다우시지만요…….”
그윽한 그의 두 눈을 마주한 미아는 아무 행동도 할 수 없었다. 많은 경우의 수를 예측했지만 이것만은 상정 외였다.
한편 요제프가 등장한 이후에도 계속 미아의 상태를 주시하고 있던 세레니티는 그것을 바로 눈치챘다. 미아의 손이 포크를 역수로 들려고 하고 있다는 것을 가장 먼저 눈치챈 것도 세레니티였다.
‘살인은 안 돼요, 미아!’
어느새 요제프는 품에서 작고 네모난, 딱 반지가 들어갈 것 같은 상자를 꺼내는 중이었다.
결국, 다급해진 세레니티가 외쳤다.
“아, 안 돼요! 미아는…… 저랑 결혼할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