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그, 그런 것치곤 사람이 많은데?”
“풋!”
지켜보던 사람들이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테레지아가 사교계에서 공공연히 ‘카르디날레의 멧돼지’라고 불리고 있다는 것을 떠올린 탓이다.
테레지아 역시 자신을 둘러싼 그 멸칭을 모르지 않았기에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야!!”
“우린 동물이라서 말이 잘 통하나 보다, 그치?”
“이, 이이……!”
“이이? 사? 이삼 육? 이사…….”
“이 미친……!”
테레지아가 손을 치켜들었다. 당장 미아의 뺨을 내려칠 기세였다.
주변 이들이 모두 입을 가리고 경악한 순간.
“……안 때리네요?”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테레지아의 팔은 내려오지 않았다.
표독스러운 눈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녀는 손을 치켜든 채, 입술을 깨물고서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미아는 어느새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세레니티를 뒤로 당기며, 천진한 얼굴로 물었다.
“때릴 거야?”
“……!”
싱그러운 미소에 테레지아의 얼굴이 보다 일그러졌다. 당장이라도 눈앞의 계집애를 패대기치고 얼굴을 으스러뜨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자신이 벌인 일 때문에 카르디날레 공작가는 무려 황제 시해의 누명을 쓸 뻔했다.
다행히 아버지인 카르디날레 공작이 황제와 뒷거래해서 보트 관리인의 단독 범행으로 끝낸 듯했지만, 큰 손해를 봤을 게 뻔했다.
‘더는 그 애완동물에게 손대지 마라! 무슨 치욕이냐, 이게 대체! 한 번 더 이런 일이 생겼다간 너는 파문이다!’
가주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공작의 말을 떠올린 테레지아가 눈을 질끈 감았다.
미아는 테레지아가 움직이지 않자, 재미없다는 듯이 심드렁히 한 걸음이 다가왔다. 그리고 테레지아의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적당히 하자. 응? 나 오늘은 진짜 놀러 온 거란 말이야. 너도 나랑 싸워서 손해 많이 보지 않았어?”
빠득.
테레지아가 어금니를 악물었다.
‘젠장……. 젠장! 젠장!!’
이를 악문 채 미아를 노려보던 테레지아가 고개를 휙 돌렸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인사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정원을 나가 버렸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황당해하고 있던 사람들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지금 카르디날레 양이 도망친 거예요?”
“그, 그런 것 같죠?”
주최자의 갑작스러운 퇴장으로 화원이 어수선해진 그때.
미아 셀레스티얼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짱을 해치웠으니 내가 이 구역 짱인가?”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하나만은 확실했다.
황제의 애완동물은, 미쳐도 보통 미친 여자가 아니었다.
* * *
곧 멈췄던 음악이 다시 연주되기 시작했다. 테레지아의 돌발 행동을 어떻게든 수습하려는 사용인들의 노력이 엿보였다.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영애들도 분위기를 전환하듯 조심스레 재잘대기 시작했다.
미아 역시도 사라진 테레지아에 대해 더는 신경 쓰지 않고 세레니티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럼 우리도 자리를 찾아볼까, 렌?”
그때,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미아 님.”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듯한 맑은 목소리였다.
미아가 움찔해 몸을 돌렸다. 그곳에는 눈의 여왕 같은 은발에 푸른 눈을 가진 여자가 미아를 향해 생긋 웃고 있었다.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 용기를 내 보았어요……. 폐가 되었을까요?”
힐데가르트 릴레 후작 영애였다. 미아가 움찔했다.
‘골치 아프네. 얘 상대할 시간 없는데.’
그렇다고 가만 놔두기엔 그녀는 너무 위험한 여자였다. 미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쩔 수 없네. 예정과는 달라졌지만 그라스 후작은 미뤄 두고 힐데가르트 먼저 처리하는 수밖에.’
다행히 세레니티에게는 오늘 미아가 어떤 정보를 찾고자 하는지 미리 일러둔 터였다. 정보 수집을 세레니티에게 온전히 맡기고, 자신이 힐데가르트를 상대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미아가 속을 숨기고 빙긋 웃었다.
“안녕하세요! 미아예요. 아름다운 숙녀분은 누구신가요?”
물 흐르듯 흘러나온 칭찬이 마음에 들었는지, 힐데가르트의 푸른 눈이 예쁘게 휘어졌다.
“어머……. 과찬의 말씀이세요. 저는 릴레 후작가의 힐데가르트라고 합니다.”
“아하! 소문의 힐데가르트 릴레 영애시구나! 엄청 예쁘시다고 들어서, 보자마자 혹시 릴레 후작 영애신가 했는데!”
“어머, 정말요?”
“그럼요! 이렇게 아름다운 은발을 가진 분은 흔치 않을걸요!”
“부끄럽네요. 그렇게까지 칭찬해 주시다니…….”
미아의 호들갑이 만족스러웠는지 경계심 가득하던 힐데가르트의 눈빛이 부드러워지는 것이 보였다.
“왠지 미아 님과는 잘 통할 것 같아요. 부끄럽지만 힐다라고 불러 주시겠어요?”
“얼마든지요!”
미아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방긋 웃었다.
이어서 힐데가르트가 세레니테에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 세레니티 듀레인 양?”
“네. 듀레인 남작가의 세레니티라고 합니다.”
백조처럼 우아하게 인사하는 세레니티를 보며, 힐데가르트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인형 같은 미소를 지었다.
“정말…… 미인이시네요.”
미아를 상대할 땐 맑고 영롱하던 그녀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미아는 착잡한 심정으로 원작을 떠올렸다.
<장미 정원의 세레니티>는 분명 아름다운 로맨스 소설이지만, 때때로 아주 끔찍한 사건도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힐데가르트의 질투다.
힐데가르트는 세레니티가 자신보다 아름답다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다. 사교계에서 계속 세레니티와 비교당하는 일이 자주 생기자, 그녀는 결국 극단적인 일을 저지른다.
시녀를 시켜 세레니티에게 레기아 용액을 뿌린 것이다.
레기아 용액은 성분이 아주 독해, 세레니티는 크게 다치고 만다.
하지만 때마침 근처에 있었던 신관에게 치유를 받고 기적적으로 원래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한들 위험했던 것은 사실. 소식을 들은 아딜로트는 크게 분노해, 힐데가르트를 잔인하게 죽여 버린다.
그리고 힐데가르트의 죽음은 중립파 귀족이었던 릴레 후작을 아딜로트에게서 완전히 돌아서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원작대로 가는 것만은 절대 막아야 돼.’
그라스 후작을 좇는 건 언제라도 할 수 있다.
하지만 힐데가르트 릴레를 내버려 두면 그녀는 반드시 세레니티에게 화를 입을 터였다.
다행히 테레지아를 통해 원래는 세레니티에게 향해야 할 증오를 자신이 받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아냈으니, 최대한 힐데가르트의 시선을 끌면 될 것 같았다.
미아가 노선을 정했을 땐 세레니티와 힐데가르트가 이미 인사를 마친 뒤였다. 힐데가르트는 한 떨기 은방울꽃처럼 청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두 분, 혹시 저희 테이블에 앉으시겠어요?”
독을 숨긴 뱀 같은 제안이었다. 미아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활짝 웃었다.
“전 좋아요! 고마워요, 힐다 양! 렌은 어때?”
“전 미아가 좋다면 다 좋아요.”
힐데가르트는 싱긋 웃고서 그들을 테이블로 인도했다. 그러나 힐데가르트가 이끌고 간 곳에 남은 자리는 딱 한 자리였다.
“어머, 자리가 모자라네…….”
힐데가르트가 난처한 양 말끝을 흐렸다.
‘다 알고 데려왔을 거면서.’
미아는 심드렁한 얼굴로 발을 동동 구르는 힐데가르트를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다른 테이블에서 영애 한 명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힐데가르트 양. 괜찮으시다면 듀레인 양은 저희 테이블로 초대해도 될까요?”
“어머. 그래도 괜찮을지…….”
힐데가르트가 세레니티에게 물었을 때였다.
세레니티와 미아의 눈빛이 잠깐 마주쳤다. 미아가 고개를 끄덕였고, 세레니티 역시 단아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운 인연을 맺을 기회라면 저는 어디든 좋답니다.”
그 말과 함께 세레니티는 다른 테이블로 향했다. 미아는 힐데가르트가 입을 가리고 미안해하는 척 하면서 미소 짓는 것을 모른 척 했다.
힐데가르트 릴레의 계획이 뭔지는 뻔했다.
자신을 세레니티에게서 떨어뜨려 놓고, 선동과 이간질로 세레니티를 고립시키는 것.
그래서 완벽하게 사회적으로 말살한 뒤, 레기아 용액을 이용해 세레니티의 미모를 상하게 하는 것.
자신이 가장 주목받기 위해서 말이다.
그것 말고도 힐데가르트는 지독한 일을 많이 저질렀다. 수법이 워낙에 음습하다 보니 소설이 연재될 때 정말 많은 독자들이 힐데가르트를 욕했다. 미아 역시 힐데가르트 때문에 혈압이 올라 위험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실시간으로 읽을 때고.
지금의 미아는 그 모든 내용을 알고 있는 상태였다.
“반가워요. 미아라고 해요!”
‘그래 봐야 내 밥이지.’
미아가 활짝 웃으며 테이블에 앉았다.
* * *
힐데가르트 릴레는 테이블에 앉은 미아를 가만히 살폈다. 경계심이라곤 없이 헤실헤실 웃는 꼴이, 조금만 꼬드기면 금방 자신의 편으로 넘어올 것 같았다.
미아의 파악을 마친 힐데가르트가 옆 테이블을 흘끔 넘겨보았다. 세레니티 듀레인이 온화하게 미소 지으며 차를 마시는 모습이 보였다.
‘쯧. 예법 선생은 변변찮은 작자였던 걸로 아는데…….’
하지만 세레니티는 빌어먹게도 아름다웠다.
찻잔을 내려놓는 각도, 동작, 몸짓, 손짓. 어느 한 군데도 흠잡을 구석이 없었다. 빛나는 금발은 태양을 녹인 듯 찬란했고, 상앗빛 피부는 상처 하나 없이 매끈했다.
지켜보고 있을수록 힐데가르트의 마음 속에 분노가 치밀었다.
힐데가르트 역시도 항상 미모를 칭송받으며 자랐다. 하지만 세레니티가 사교계에 등장한 이후, 자신은 항상 이인자였다.
‘예쁘긴 한데, 역시 제일 예쁜 건 세레니티 듀레인 양이지.’
어딜 가든 그런 말이 들려왔다.
‘용납할 수 없어. 그까짓 남작가 계집애가 대체 뭐라고?’
힐데가르트가 보기에 세레니티는 그냥 얼굴이 조금 예쁠 뿐, 다른 건 아무것도 없었다. 가문도 자신보다 딸렸고, 늘 허름한 차림새로 다녔으며, 귀족답지 않게 거리에서 봉사나 하고 있었다.
그런 여자에게 밀렸다는 것 자체가 수치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