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그라스 후작이 분통을 터뜨렸으나, 미아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것을 말끔히 무시했다.
‘그라스 후작을 족치고 그 공이 아딜로트에게 돌아가게 하면 되겠구나!’
율리시즈는 그라스 후작이 광산 사업 비리로 빈민 구제 지원금을 착복하고 있다고 했다. 그걸 대대적으로 고발하면 율리시즈와의 계약도 해결되고, 서민층의 지지도 얻을 수 있다.
‘더군다나 그라스 후작은 뼛속까지 태후파지!’
그를 쳐낼 수만 있다면 태후파의 세력은 크게 줄어들 것이다.
즉 후작 하나로 고민 중인 문제를 셋 다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어떡해! 나 진짜 천잰가 봐! 아하하!”
“이봐!”
“사노라면~ 언젠가는~ 밝은 날도 오겠지!”
미아는 콧노래를 부르며 자신의 침실을 향해 발걸음을 놀렸다.
“저……, 저……!”
홀로 남겨진 그라스 후작만이 뒷덜미를 잡고 한참 동안이나 복도에 서 있을 뿐이었다.
* * *
“아딜. 에트루리나 광산에 들르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쾅!
아딜로트의 개인 집무실에 찾아간 미아가 대뜸 책상을 내려치며 말했다. 서류를 보고 있던 아딜로트가 고개를 들었다.
“네가 개발했던?”
“네! 잘 운영되고 있는지 궁금해서!”
“흠.”
아딜로트가 미적지근하게 반응하자, 미아가 쪼르르 다가가 아딜로트 옆에 앉았다.
“지금은 나라에서 갖고 있으니까, 혹시 제가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아딜한테 도움도 되고!”
“그쪽은 그라스 후작이 맡고 있는데. 에트루리나 상단은 갑자기 왜?”
“잘되어 가고 있는지…….”
“너 그런 거 신경 안 쓰잖아?”
“워, 원래 미로미스 상회의 총책임자는 저였어요! 뭔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글쎄. 거기 네 도움이 필요할 만한 일이 있던가?”
뜨끔.
‘예리해!’
미아가 허둥지둥 손을 내저었다.
“그런 게 아니라! 아딜한테 보탬이 되고 싶어서요! 물론 아딜의 신하들이 잘하고 있겠지만!”
“누가 너한테 일하라고 협박이라도 해?”
“이잉, 누가 그러겠어요? 감히 폐하의 ‘애완동물’한테!”
“그럼 그냥 놀고먹어. 그게 지금 네 역할이니까. ‘애완동물’ 좋다며.”
“그치마안…….”
미아가 의자 옆에 폭 주저앉아 울상을 지었다. 아딜로트는 조금 복잡한 마음으로 시선을 피했다. 그는 요즘, 자신이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이 눈에 약하다는 걸 슬슬 깨닫고 있었다.
“이대로 살면 빈대로 진화할 것 같고……, 아무 일도 안 하니까 우울증도 생길 것 같고…….”
“…….”
“무엇보다 아딜은 바빠서 나랑 잘 못 놀아 주잖아요!”
“애완동물이면 네가 나랑 놀아 줘야지.”
“맞는 말이지만 개는 산책을 시켜 줘야 하는 거예요!”
“무슨 산책을 마차 타고 보름은 가야 나오는 지역까지 해?”
“아딜의 애완동물은 영역 동물이 아니라서 어쩔 수 없어요!”
미아는 아딜로트의 묘하게 경멸 비슷한 시선을 꿋꿋히 이겨 냈다. 아딜로트가 한숨 쉬며 말했다.
“알겠어.”
“정말요!?”
“그래. 나도 한 번쯤은 가야 했…….”
“역시 취소할게요. 집이 좋죠. 집 나가면 개고생이야~”
빠른 태세 전환에 아딜로트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미아는 뻔뻔하게 그것을 무시했다.
‘절대 아딜 데리고는 못 가지.’
아딜로트가 에트루리나 광산에 도착해서 사업이 제대로 되고 있지 않은 것을 보면, 그걸 바로 해결해 버릴 테니까.
‘임팩트가 필요하거든. 그렇게 깔끔하게 끝내 줄 수는 없단 말야.’
그렇다면 역시 정보를 긁어모아서 정탐하는 수밖에 없을 모양이었다.
“앗? 쿠키 먹을 시간이당!”
미심쩍어 하는 아딜로트의 시선을 무시한 채 미아는 산뜻하게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참, 아딜! 저 용돈 좀 주면 안 돼요?”
아딜로트의 어이가 없다는 얼굴에도 그녀는 당당했다. 곧 아딜로트가 곧 한숨을 쉬었다. 그는 책상 서랍을 열고, 쪽지로 쓸 종이를 꺼냈다.
“얼마?”
“되는 대로 많이?”
“……어음을 내주라고 지시할 테니 재무부에 가져가.”
“이잉. 어음은 안 되는데…….”
“왜?”
“자금 추적이 쉽잖아요……?”
미아가 머리카락을 X자로 만들어 얼굴을 가리며 말했다. 아딜로트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러나 이내, 종이 위에 다시 글자 몇 줄과 서명을 휘갈겨 썼다.
“전액 현금. 됐어?”
멋들어진 필기체 쓰인 종이가 미아의 손바닥 위에 올라갔다.
‘일, 십, 백, 천, 만, 십만, 백만……. 0이 몇 개야…….’
아딜로트는 다시 서류 작업을 시작했다. 방금 지갑에서 성 한 채를 꺼내 준 사람답지 않은 태연함에 미아는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어디다 쓸지는 안 물어요?”
“용돈이라며? 과자나 사 먹겠지.”
“오……. 이 정도 돈으로 과자를 사 먹는단 말이죠……. 황궁에 요리사도 있는데…….”
서류 위에서 움직이던 펜이 멈췄다. 아딜로트가 심드렁히 물었다.
“의심해 달란 거야?”
“그, 그건 아니고…….”
“됐어. 안 그래도 의심할 사람 많은데 너까지 의심할 시간 없어.”
다시 서류에 집중하는 아딜로트를 보며, 미아는 묘한 기분이 되었다.
‘죽이겠다고 칼 들이밀던 게 엊그제 같은데. 약간 감동일지도.’
미아가 배시시 웃었다.
“알았어요! 비싼 과자 사 먹을게요!”
“그러든가.”
곧 미아는 팔랑거리는 걸음으로 집무실을 나갔다.
그녀가 나가자마자, 아딜로트의 펜이 뚝 멈췄다.
“베일리.”
집무실 구석에 그림자가 하나 너울졌다.
―부르셨습니까.
“에트루리나에 무슨 일이 있는지 알아봐.”
―존명.
* * *
미아는 재무부로 향했다. 재무부는 중앙 궁에 있고, 보안이 엄중하다. 원래대로라면 미아도 들어갈 수 없다. 하지만 황제의 서명이 쓰인 종이를 내밀자 일사천리였다.
재무부에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입구 쪽의 말단 직원이 미아의 분홍색 머리카락을 보고 흠칫 놀랐다.
“……혹시, 미아 님?”
끄덕.
우당탕!
소란 끝에 재무부 부장이 나왔다. 돈만 가지고 나르려 했던 미아는 졸지에 부장에게 차를 대접받아야 했다.
“실례했습니다. 귀하신 분이 이런 누추한 곳에 오시리라고는 생각지 못해서…….”
“누추하긴요! 오르퀘니나에서 가장 바쁘게 일하시는 분들이 계신 곳인걸요!”
미아가 활짝 웃었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미소였지만 부장은 방심하지 않았다. 그는 눈앞의 토끼 같은 여자가 정무실에서 귀족 하나를 잘근잘근 밟아 버렸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게다가 최근 들어 귀족들의 의문사가 잦아졌다. 미아 셀레스티얼에게 노여움을 사서 그렇게 되었다는 소문도 암암리에 돌고 있었다.
물론 죽은 이들은 전부 뒤가 구린 귀족들이었기에, 더러는 오히려 미아 셀레스티얼에게 호감을 갖는 경우도 있었다.
부장도 굳이 따지자면 미아가 싫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호감은 호감이고, 영향력은 영향력인 법.
‘여기서 비위를 맞추지 않으면, 폐하께서 무슨 일을 벌일지 몰라.’
자동적으로 부장의 손바닥이 싹싹 비벼졌다.
“그래서 무슨 일로……?”
“용돈 좀 타려고요!”
미아가 쪽지를 내밀었다. 찍어 낸 듯 아름다운 필기체로 쓰인 내용은 지극히 간결했다.
전액 현금.
600,000,000 G
내역: 과자값
아딜로트 겐첸 슈뢰더
부장은 쪽지를 떨어뜨릴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6억? 6어어억? 과자값으로 6어어어어억!?’
하지만 그는 노련한 사회인이었다. 부장이 빙그레 웃었다.
“메, 크흠, 메달을 준비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황제가 까라는데 까야지.
부장이 비틀거리며 나간 뒤, 미아는 약간 머쓱해졌다.
‘생각해 보니 아딜을 여자에 빠져서 흥청망청하는 황제로 만들면 안 되는데…….’
미아는 나중에 괜찮은 사업 아이템이나 하나 넘겨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에트루리나 일이 해결되려면 시간이 좀 있으니까, 그사이에 요아힘을 꼬셔서 뭔가를 더 해야겠어.’
기다린 지 얼마 안 되어서 부장이 아닌 다른 직원이 들어왔다. 부장은…… 지쳤는지 비틀거리며 어디론가 나가고 있었다. 직원이 든 상자 안에는 반짝이는 메달이 하나 있었다.
“제국 어디에서든 은행에서 현금 인출이 가능한 메달입니다.”
“아! 감사합니다!”
미아가 그것을 집어 들려는 순간이었다. 직원이 상자 문을 살짝 닫았다.
“……미아 님!”
그는 터질 듯 새빨간 얼굴, 억울하고 강직한 시선으로 미아를 응시했다.
“이게…… 제국 백성들의 세금이라는 건 알고 계십니까?”
허억.
멀리서 재무부 직원들이 바짝 긴장하는 소리가 들렸다. 미아 역시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배시시 웃었다.
“네!”
“……그러십니까…….”
직원은 힘이 탁 풀려 상자를 다시 열었다. 씁쓸한 표정이었다.
우리 폐하는 사람은 좀 잘 죽여도 일 처리는 공정하고 엄격한 분이셨는데……, 같은 속마음이 들리는 듯했다.
미아가 직원의 명찰을 흘끗거렸다.
아르민 슈라이버.
‘좋은 사람이네. 정직한 인재 봤다고 아딜한테 찔러 줘야지.’
그렇게 아르민 슈라이버는 한 달 뒤, 자신이 의문의 승진을 당하리란 것을 까맣게 모른 채 비틀거리며 몸을 돌렸다.
* * *
미아는 메달을 가지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시즈.”
그녀가 이름을 부르자마자 율리시즈가 뒤에서 나타났다.
“어, 언제 불러 주시나 했어요…….”
“응? 나랑 얘기할 거 있었어?”
의아해하는 미아를 향해 율리시즈는 소매로 입을 가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황태후가…… 미아 님을 의심하는 것 같아요…….”
“으음, 그럴 만도 하지.”
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사실상 그녀는 마지막에 황태후에게 시비를 건 것과 같았다.
클라우디오 황태자와 아딜로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으니까.
‘내가 아딜로트에게 물들고 있다고 생각해도 이상할 것 없지.’
게다가 미아는 반역을 저지른 셀레스티얼 백작가의 딸이다. 재판을 열어서, 그게 황태후의 짓이라고 주장하면 황태후의 입지는 크게 좁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