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구빈원을 중심으로 주변에는 동그랗게 기사단이 도열해 있었다. 황제의 호위를 위해서다. 그들 주변으로 사람들이 연신 마당을 기웃거리는 중이었다.
구빈원 마당의 잔디밭.
그곳에 철퍼덕 주저앉아, 미아는 억울한 얼굴로 풀을 뜯었다.
“연애…… 아닌데…….”
“대외적으로는 맞잖아.”
“‘대외적으로’잖아요…….”
옆에 앉은 아딜로트가 말없이 목덜미를 매만졌다. 태연해 보이는 아딜로트의 모습에 미아는 약간 마음을 놓았다. 적어도 아까 일을 입에 올리진 않을 것 같았다.
‘놀리는 건 익숙하지만 놀림당하는 건 익숙하지 않단 말야.’
아무리 그래도, 너무 당황했다.
고작 냄새 좀 맡는 일 가지고, 부끄러울 정도로.
‘아무리 그래도 여염집 처녀한테! 그렇게 갑자기! 그것도 그 미모로 들이대는 건 잘못됐지!’
풀을 뜯는 미아의 손길이 거세어졌다.
‘그 얼굴이 가까이 오는데, 어!? 안 놀라는 사람이 어딨어!’
미아는 손쉽게 아딜로트의 미모를 탓하며 마음을 방어했다.
미아가 진정된 듯하자 아딜로트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네가 원하던 결과는 나왔어?”
“……모르겠어요.”
미아가 우울하게 돌을 던졌다. 주변만 봐도, 사람들이 꽤 많이 몰려들긴 했다. 아딜로트의 행차를 널리 알렸으니 이야기도 꽤 많이 퍼질 것이다.
‘효과가 나쁘진 않을 거야.’
의외로 사람들은 착한 사람한테 박하다. 매일 집을 청소하는 착한 딸보다, 팽팽 놀던 아들이 설거지 한 번 하는 게 더 예뻐 보이는 것처럼.
물론 세레니티 같은 경우도 있지만, 그건 이례적 케이스다.
‘3초만 대화해도 선하다는 게 느껴지는 사람도 있는 법이니까. 미모도 미모고 말이야.’
미아가 할 일은 기다리는 거였다. 주기적인 대외 선전과 함께. 어차피 선전 효과란 바로 나는 게 아니다.
“선전 같은 것에 흥미가 있는 거면, 곧 요아힘이 돌아오니까 요아힘과 이야기해 봐.”
시무룩해져 있던 미아의 눈이 그 말에 반짝였다.
“요아힘 님이 돌아오시나요? 동부 해적 문제가 잘 처리된 거예요? 잘됐다! 안 그래도 이야기 좀 나눠 보고 싶었거든요!”
아딜로트가 약간의 침묵 뒤에 물었다.
“요아힘이랑? 왜?”
“이상적인 신랑감이라서요!”
무심한 빨간 눈에 묘하게 서늘한 기색이 스민 것을 미아는 눈치채지 못했다.
‘물론 나 말고, 렌 신랑감으로 생각 중인 거지만.’
미아는 세레니티의 행복을 바랐다. 남들이 갖고 싶어 하는 것, 특히 원래 가졌어야 했던 것은 전부 주고 싶었다.
‘그러니까 미남도 한 세 명은 안겨 줘야지.’
기본적으로 <장미 정원의 세레니티>의 서브남자주인공들은 능력이 출중하다. 아딜로트 못지않게. 그들을 전부 모아다 안겨 주면…….
“너, 나한테도 그 말 한 건 기억해?”
어쩐지 심통이 난 듯한 목소리에 미아의 생각이 끊겼다. 미아는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아딜로트를 보곤, 능청스럽게 놀란 척 했다.
“앗, 제가 그런 말을 했어요? 아아안 되는데! 그거 천기인데!”
고민 한번 없는 즉답.
입에 발린 말이란 뜻이다.
아딜로트의 눈이 게슴츠레해졌다.
“아직도 내가 널 죽일 것 같아?”
“……아뇨?”
“그런데 왜 아부를 해?”
“권력도 뒷배도 없는 소시민의 본능……?”
“나는 뒷배 아닌가?”
“그러니까 그 뒷배한테 잘 보여야죠? 혓바닥 한번 잘못 놀려서 팽 당하고 싶진 않으니까요!”
“내가 널 팽할 것 같다는 뜻이야?”
미아가 짧은 고민 끝에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뭐, 진짜 황후를 들이시면 황후 폐하 눈치도 봐야 하니까요!”
그 말에 아딜로트가 스르르 팔과 무릎 사이에 머리를 묻었다.
“……너랑 대화하면 좀 짜증나…….”
“꺼질까요?”
“가만 있기나 해.”
“넵.”
이후 화를 진정시키는 듯한 숨소리가 들렸다. 미아는 개의치 않고 생각에 잠겼다.
세레니티가 해피 엔딩을 맞길 바라는 마음은 변함이 없다. 문제는 세레니티가 과연 그걸 원할까 하는 것이었다.
‘특히 서브남주를 포획해서 던져 주는 방식은, 왠지 렌이 원하는 게 아닐 것 같아.’
세레니티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뭔가를 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없다. 게다가, 이미 자신이 행복하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으으음! 그치만 그 말만 믿고 손을 놓기엔, 세레니티는 듀레인 남작가에서 완전히 벗어난 게 아니니까…….’
미아도 그를 따라 스르르 고개를 내려 무릎에 뺨을 기댔다. 아딜로트는 어느새 시큰둥한 얼굴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아가 물었다.
“폐하는…… 뭘 하고 싶으세요?”
“뭐?”
“황제로서 말고, 아딜로트로서 하고 싶은 일이요. 그런 거 없나요?”
“그런 걸 가져선 안 되니까 황제인 거야.”
“에이! 말 정도는 할 수 있죠! 혹시 알아요? 어딘가의 예쁘고 똑똑한 애완동물이 그걸 들어줄지!”
미아가 우쭐거리듯 말했다. 반쯤은 분위기나 띄워 보려 한 말이었다. 의외로 아딜로트는 진지하게 답했다.
“둘만 있을 땐 애완동물이 아니어도 돼. 말했잖아.”
“그치만 전 ‘애완동물’인 거 좋은데! 아무도 저한테 일 안 시키고! 제가 좋으면 그만 아니에요?”
방실방실 웃는 미아를 보며, 아딜로트는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어차피 난 오래 못 가.”
“네?”
“아까 물어본 거 말이야. 하고 싶은 거.”
아딜로트가 무릎에 팔꿈치를 얹고 턱을 괴었다.
“남의 피를 봐 가면서 이 자리에 올랐으니 내려갈 때도 피가 흐르겠지. 제대로 된 퇴장은 아닐걸.”
“…….”
“그런 상황에서 하고 싶은 게 생길 리 없지.”
“노, 노력하면 돼요! 제 머리는 이런 게 한계지만, 요아힘 님이 기가 막힌 방안을 생각해 줄 거예요!”
“글쎄…….”
기분 탓일까, 아딜로트는 별로 의욕이 없어 보였다. 미아가 입술을 깨물고서 눈을 부릅떴다.
“그럼 넋 놓고 앉아서 황태후가 칼 들고 찾아오길 기다리겠다고요?”
“그런 건 아니지만, 내가 굳이 황제 자리를 고집할 이유가…….”
“폐하!”
아딜로트의 말이 다 이어지기도 전, 미아가 벌떡 일어났다. 분홍색 눈에 억울함이 그득했다.
“그렇게 말랑말랑한 각오로 뭘 하려고요! 그럼 폐하를 따르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데요!”
아딜로트는 멍하니 미아를 올려다보았다.
“그 사람들도 다 폐하가 자랑하는 넓은 교수대에 목이 걸릴 텐데, 그걸 내버려 둘 거예요!?”
“물론 노력은…….”
“그리고 폐하 죽으면 저는요!”
그 순간 아딜로트가 입을 다물었다. 새빨간 눈에 망설임과 혼란이 스쳤다. 미아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소리쳤다.
“애완동물? 무조건 죽는다고요! 1순위 처형! 난 아딜만 믿고 가고 있는데, 주인이 이래도 되는 거예요!? 한번 기르기 시작했으면 책임을 져야지!”
“누가 안 진대? 책임은 질 거야.”
아딜로트가 약간 울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사람이 그렇게 말해요!? 내 인생 완전히 망했어! 기껏 따라왔더니!”
“누가 따라오래?”
“따라오라고 했잖아요! 이거! 반지!”
미아가 척 하고 반지 낀 손을 내밀었다.
“거의 유사 청혼까지 해 놓고! 이제 폐하가 내 거고 내가 폐하 거나 다름없는데! 자기 소유면 좀 챙기든가 해야죠!”
아딜로트의 귀 끝이 살짝 붉어졌다.
“소……유 같은 저열한 감정 아니거든?”
“그게 왜 저열해요! 소유욕이 얼마나 멋진데! 갖고 싶은 건 갖는 패기! 너무 짜릿해!”
뭐.
아딜로트의 말문이 막혔다.
“……짜릿하다고?”
“당연하죠! 집착과 소유욕! 왕도이자 진리! 집착 안 하는 남주……가 아니라 남자는 남자도 아니지!”
“…….”
“물론 다른 사람이 그러면 당장 목을 따고 싶겠지만, 아딜이니까!”
“……너 지금 그 말, 무슨 뜻인지 알고 하는…….”
“모르겠고 책임지시라고요! 갈데없는 미아가 불쌍하지도 않아요!? 폐하는 바보야! 잘생기면 뭐해, 이렇게 무책임한 남자가 어딨어!?”
대화가 원점으로 돌아왔다. 다시 정신을 차린 아딜로트가 벌떡 일어났다.
“그러니까 책임질 거라고!”
“그래요! 책임져 달라고요!”
“알았다니까! 네가 싫다고 해도 평생……!”
“두 분.”
그때, 다시 한번 싸늘한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갈랐다.
‘아차.’
미아가 고개를 돌렸다. 얼굴을 붉히고 콧김을 뿜는 구경꾼들이 보였다.
그리고…… 차가운 미소를 짓고 있는 세레니티도.
“프로포즈는 구빈원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해 주세요.”
* * *
“들으셨어요? 폐하께서 앙겔루스 구빈원에서 소문의 그 영애에게 프로포즈 하셨다는군요.”
“당연히 들었죠. 정말 놀랍지 않나요? 그 냉엄한 분께서……?”
“상황은 모르지만 낭만적이네요…….”
“어쩜! 꼭 소설 같아요, 후후.”
간단한 가십 이후 이야기는 좀 더 깊어졌다.
“몰락한 셀레스티얼의 영애가 온 이후로 조금…… 분위기도 달라졌죠?”
“네에, 확실히.”
“그날 이후로 국가 복지 사업도 재정비했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맡았어요. 관리직 말고 실무자의 의견을 더 수렴한 정책으로 바뀌었죠.”
“저도 들었답니다. 기부금에 따라 세금 혜택을 준다기에 저희 가문에서도 기부 행사를 열까 해요.”
“저희도요.”
“그래선지 뜻밖에도 빈민층 사이에서 평판이 올라가고 있다고 하더군요…….”
“흠, 그래 봐야 빈민층 아닌가요?”
“어머, 아니에요. 복지 혜택은 평민들에게까지 확장했어요. 그리고 학업의 기회도 더 많아졌고요.”
“예산을 어디서…….”
“셀레스티얼 백작가를 삼켰는데, 그 정도 여유금은 있었겠죠.”
“저도 폐하의 지지층이 넓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잠시 속닥거림이 멈췄다.
“그 ‘애완동물’이 이걸 노렸을까요?”
부인들의 부채 너머에서 작은 소곤거림이 물결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누군가가 오만하게 말했다.
“글쎄요. 하지만 확실한 건,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봐야 할 때가 온 것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