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그럼에도 소설에서 세레니티는 너무나 행복하게 그려졌다. 그녀는 가진 것에 만족하는 성품이었으니까.
‘……그래서 전혀 몰랐어.’
아름다운 세레니티.
수를 잘 놓고, 춤을 잘 추고, 노래를 잘 부르고, 몸짓이 아름답고, 누구나 원하는 신붓감인 세레니티.
하지만 사실은 공부가 하고 싶었던 세레니티.
미아가 눈을 부릅떴다.
“하자, 공부.”
“네?”
“내가 도와줄게. 나, 이래 보여도 셀레스티얼 백작가를 일으켰는걸. 실전이라면 알려 줄 수 있어. 언젠가 네가 듀레인 남작가의 주인이 되더라도 문제없을 만큼은!”
“제가…… 듀레인가를요? 미아, 저희 가문엔 이미 후계자가 있어요.”
“사람 일은 모르는 거야. 나중에 렌에게 기회가 왔을 때,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그걸 놓쳐 버릴 수도 있잖아.”
확신이 담긴 듯한 미아의 말에 세레니티는 크게 당황했다.
‘내가 가문의 주인이……?’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 순간, 그녀의 가슴 한구석에서 열기가 피어올랐다. 그녀의 세계를 이루고 있던 막이 쨍그랑 소리를 내며 깨져 나간 듯했다.
‘미아는…… 어떻게 내가 절대 생각지도 못할 길을 제시하는 걸까.’
세레니티가 저도 모르게 속삭였다.
“하지만 저는 미아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없는데…….”
“친구는 그런 게 아니라며!”
“하지만…….”
“음, 그럼 렌은 나한테 렌이 가진 재주를 알려 줘! 어디 보자……, 악기라든가?”
미아가 세레니티의 손을 잡고 싱그럽게 웃었다.
“다른 기술들도 배우고 싶어! 렌의 손끝에서 예술이 피어나잖아. 그게 얼마나 대단한 건데?”
“미아…….”
“그러니까 앞으로 같이 도서관에 가는 거야? 매일 조금씩 공부하자! 봉사는 조금 줄이고!”
눈을 반짝이며 말하던 미아는, 곧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였다.
“난 렌이 봉사 같은 거 안 해도 렌을 좋아할 거야.”
세레니티가 멍하니 미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속에서 치밀어오르는 감정을 삼키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들고 있던 수틀을 내려놓았다.
“……고마워요. 미아.”
후련해 보이는 세레니티의 미소에, 미아 역시 환하게 웃었다. 세레니티가 마음을 추스른 뒤, 그녀는 조금 미안하단 듯이 말했다.
“하지만 역시 저만 뭔가를 받는 것 같아요. 미아를 돕고 싶은데, 폐하의 평판은 아쉽게도 제가 도울 수 없는 부분이고…….”
“으응…….”
그 말에 미아는 단숨에 풀이 죽었다.
“원래도 폐하의 평판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최근 들어 급속도로 나빠진 것도 같고요.”
“그러게 말이야……. 어쩐다.”
미아가 피휴 하고 입술을 내밀었다. 크리소르는 막강하다. 자본도 있고 권력도, 사람도 있다. 반면 미아는 여론전은커녕 정치도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
‘여론 하면 원작의 세레니티가 또 알아줬는데.’
거기까지 생각한 미아가 멈칫했다.
‘잠깐만. 세레니티라면…… 여기도 있잖아?’
거리의 천사, 세레니티 듀레인.
세레니티의 평판은 지금도 꽤 높다.
‘렌이 그 평판을 어떻게 얻었지?’
세레니티는 원작과 달리 아딜로트와 엮일 일이 줄어들었다. 그 덕에 세레니티는 더 많은 시간을 봉사활동에 쓸 수 있었고…….
“그거다!”
미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미아?”
“사랑해, 렌! 넌 내 천사야!”
* * *
미아는 아딜로트가 밤에 침실로 돌아오길 기다렸다. 아딜로트의 불면증 때문에 어느새 두 사람은 다시 같은 침실을 쓰고 있었다.
정무를 보고 돌아온 아딜로트를 미아가 침대에 앉혔다.
“아딜! 우린 대화가 필요해요!”
순순히 끌려온 아딜로트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면서 훌훌 옷을 벗기 시작했다.
“무슨 대화?”
“옷은 저 없을 때 갈아입으시고!”
“올리버도 퇴근해야지.”
그제야 미아는 소리없이 서 있는 전담 시종인 올리버의 존재를 눈치챘다.
“전 괜찮습니다. 편히 대화하시지요.”
그는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한 걸음 물러났다. 올리버의 허락까지 받은 미아가 외쳤다.
“우선 정무실에서 말예요! 그러는 게 어딨어요! 거기선 말리는 거죠!”
“왜? 깽판 친다며. 잘하던데.”
별로 어울리진 않았지만, 하고 아딜로트가 덧붙였다.
“제 목적은 그게 아니었다고요!”
“그럼?”
“제가 악녀가 되어서 아딜로트를 빛내려고 했는데!”
뒤에서 아딜로트가 작게 웃었다.
“무슨 생각을 하나 했더니.”
“아딜, 우린 좀 더 부드러운 이미지가 필요해요. 아딜에 대해 나쁜 소문을 퍼뜨리고 있는 걸 알잖아요.”
“흠.”
“어느 정도는 전시 행정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게 그냥 ‘보이기 위한’ 것이더라도요…….”
미아는 그 이상 말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황제는 아딜로트고, 아딜로트는 충분히 노력하고 있다. 거기다 대고 미아가 훈수 두듯 하는 것은 월권이었다.
사실 지금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조마조마했다. 다행히 아딜로트는 샹귀스―에키온을 꺼내오진 않고, 조용히 턱을 쓸었다.
“요아힘도 그 말을 하긴 했지.”
“역시!”
미아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몸을 돌렸다. 어느새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아딜로트가 미소를 마주하고 멈칫했다. 그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래서 어떡하자고? 방법은?”
“제가 살던 곳에서는 이런 선전 방법이 있어요. 대박이 나려면 미녀, 아기, 동물을 이용하라!”
“그래서?”
“때마침 제가 미녀와 동물을 맡을 수 있으니!”
“발언에 양심이 없네.”
아딜로트의 중얼거림을 미아는 가뿐히 무시했다.
“아기가 남았어요!”
그 순간, 아딜로트가 쿨럭거렸다. 아딜로트의 옷을 들고 나가던 올리버도 그것을 떨어뜨리곤 자리에서 굳었다.
한참을 침묵한 아딜로트는 아주아주 당황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만들자고?”
“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
그리고 격추당했다.
눈을 또랑또랑 뜨고서 미아가 하는 말에 올리버는 떨어뜨린 옷을 들고 나가며 속으로 아딜로트를 응원했다. 폐하, 파이팅.
올리버가 나가고, 묘하게 허무한 눈을 하고 앉아 있는 아딜로트에게 미아는 씩씩하게 말했다.
“사람은 애 낳기까지 10개월이나 걸리는데 그걸 어떻게 기다려요?”
그 말에 아딜로트는 다시 움찔했다.
“그건 기간이 짧으면 괜찮다는…….”
“짧아도 안 되죠. 임신이 장난인가.”
“당연히 장난은 아닌데, 그보다 좀 더 중요한 문제가 있지 않아?”
“뭐요?”
“…….”
결혼이라든가 결혼이라든가 결혼이라든가?
“아. 애기 신분이 애매하면 소용이 없나?”
그거 말고…….
“아딜 닮았으면 귀여울 테니까 미모로 승부하면 되지 않을까요?”
너 닮은 딸이 나을 것 같은데…….
“안 낳을 거지만.”
“…….”
치명적인 일격에 연달아 당한 아딜로트는 공허한 눈을 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든 맘대로 해…….”
“진짜요!? 신난다! 그럼 제가 슐츠 공작 각하랑 얘기해서 미리 준비해 놓을게요!”
까르륵 웃는 미아를 보며 아딜로트는 허탈한 웃음만 흘렸다.
* * *
미아는 세레니티에게 영감을 얻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렌! 그러니까 렌의 방식이 왕도일 거야!’
아딜로트의 승낙을 받은 미아는 바로 세레니티에게 달려가 생각을 전했다. 세레니티는 놀랐지만, 한번 운을 띄워 보겠다며 나서 주었다.
그리하여, 지금.
“지고하신 오르퀘니나의 달을 뵙습니다……. 앙겔루스 구빈원의 원장, 지그 에리히만입니다…….”
에리히만 원장이 벌벌 떨며 절했다. 편한 옷을 입은 아딜로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하루 부탁 좀 하지.”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들이 있는 곳은 앙겔루스 구빈원. 세레니티가 봉사활동을 하는 구빈원이다. 그곳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싶다는’ 황제의 요청을 지그 에리히만 원장은 감히 거절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딜로트를 직접 모시는 건 늙은 에리히만 원장의 심장에 좋지 않은 일이었다. 하여, 세레니티가 자진해서 나섰다.
“오늘 구빈원에 봉사활동을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귀족들의 본보기가 될 거예요.”
금빛 머리카락이 반짝거렸다. 편한 옷을 입었어도 세레니티에게선 광채가 흘렀다. 그건 아딜로트도 마찬가지였다.
‘눈부셔…….’
똑같이 편한 옷을 입은 미아가 두 사람의 미모를 감상했다.
여자주인공과 남자주인공.
어쩌다 미아가 사이에 껴 있긴 하지만, 미모로는 따라올 사람이 없다.
‘어쩐지 황새 사이에 낀 뱁새 기분?’
하지만 아딜로트와 세레니티의 눈빛이 마주친 직후.
“혹시라도 이런 곳에서까지 미아를 괴롭히진 않아 주셨으면 합니다, 폐하.”
“내 머리가 너처럼 이상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줄 알아?”
‘……가 아니라 고래 싸움에 낀 새우였구나.’
미아가 한숨을 쉬며 나섰다.
“봉사하러 온 거니까 봉사만 하고 가자고요, 두 사람!”
미아가 말리자 두 사람이 겨우 떨어졌다. 세레니티는 엄격한 얼굴로 구빈원의 구조를 소개해 주었다. 의외로 아딜로트는 흥미롭다는 듯이 구빈원을 살폈다.
‘혹시 이게 서민의 생활인가 어쩌고 하는 대사는 안 하겠지?’
약간 걱정도 들었지만, 아딜로트가 그러진 않을 것이다. 아딜로트 본인도 전쟁터에서는 엄청 험하게 굴렀다고 들었으니까.
대신 아딜로트는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꽤 좁네.”
뒤에서 에리히만 원장이 “송구합니다아아아.”하고 울부짖는 것을 세레니티가 안 보이도록 가려 주었다.
“그래도 앙겔루스 구빈원은 수도에서 가장 큰 구빈원이랍니다.”
“예산이 그렇게 부족한가?”
“그렇다기보다 그만큼 빈곤층이 많을 뿐입니다. 전쟁이 끝난 지 몇 년 되지 않았으니까요.”
황태후의 명령으로 전쟁의 최전방에 끌려다닌 아딜로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레니티가 분위기를 전환하려 방긋 웃었다.
“두 분, 아이들을 돌봐 주신 적이 있으신가요?”
“없어.”
“나도 없어…….”
“그럼 제가 유아들을 돌보는 동안 아이들과 놀아 주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