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그건 확실히 좀 곤란하려나…….”
그가 검을 든 채 고민에 빠졌다. 그러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어때, 내 애완동물이 원하는 건데 들어줘야지. 자.”
아딜로트가 검을 내밀었다.
“이게, 그러니까, 이게 아닌데……?”
미아가 반사적으로 검을 받아든 순간이었다.
‘무거워!’
받자마자 팔이 아래로 훅 꺼졌다.
캉!
떨어진 검날은 바닥을 세차게 쳤다. 동시에 바닥의 석재에 세로로 금이 갔다.
“저, 저, 저 이거 안 받을래요…….”
미아가 울먹이며 아딜로트를 올려다보았다. 벌벌 떠는 토끼 같은 모습이었다. 아딜로트가 저도 모르게 풋 하고 웃었다.
“대신 쳐 줄까?”
“안 친다고요…….”
“말만 하면…….”
“아 안 한다니까요! 안 해! 안 해! 안 쳐! 폐하도 제 눈앞에서는 치지 마세요!”
미아가 사납게 울상짓고서 외쳤다. 아딜로트는 그러면야, 하는 표정으로 미아에게서 검을 받아들었다.
‘샹귀스―에키온’은 다시 쿠션 위에 올라갔다.
“재밌을 뻔했는데, 아쉽네.”
앉아 있던 귀족들의 등골에 땀이 흘렀다.
‘재밌냐? 이게?’
‘요즘 저 애완동물 때문에 그나마 미친 짓을 덜 하더니만.’
‘황제의 감찰부가 어디까지 조사한 거지? 나도 우리도 위험한가?’
‘뭐가 됐든 살았다…….’
‘저 여자 앞에서는 좀 순해진다 이거지?’
분위기가 소강되자, 눈치를 보던 귀족들이 조심스레 말했다.
“폐하. 폐하의…… 반려동물이 하시는 말씀이 매우 현명한 듯합니다.”
“그렇습니다. 때와 장소를 아는 그런 멋진…… 반려동물을 맞이하신 듯합니다.”
“그럼요. 천상배필입니다.”
“물 좀 엎지른 것으로 난동을 피우다니 험버트 백작이 정말 잘못했습니다.”
“예. 다 제 잘못입니다.”
“그래?”
아딜로트는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가 미아에게 눈을 빛냈다.
“잘됐네. 다음에 정무실 또 와.”
아딜로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귀족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예. 꼭 와 주십시오!”
‘와서 이 미친 황제 좀 말려 줘!’
귀족들의 기대 어린 시선을 받으며 미아는 정신이 혼미해졌다.
내 주가가 올라서 어쩌잔 거야.
* * *
“실패했어!”
“실패했군요…….”
세레니티가 떨떠름함을 숨기고 빙그레 미소 지었다. 두 사람은 한낮의 정원 벤치에 앉아 있었다. 햇빛이 강했지만 나무 그늘 덕에 피부가 따갑지는 않았다.
미아는 수를 놓는 렌 옆에 앉아, 풀이 죽은 채 테이블에 턱을 올렸다.
“있는 힘껏 이 구역 제일의 미친년이 되려고 했는데……. 평소 말하던 거랑 별로 다른 게 없었어. 나 연기 못하나 봐…….”
그렇게 말하는 얼굴이 시무룩했다.
‘정말로 될 거라고 생각했구나…….’
당황한 세레니티의 미소가 흔들렸다.
어딜 봐도 다람쥐, 토끼, 뱁새처럼 보이는 작고 말랑한 모습으로 나쁜 놈이 되겠다니.
‘자기를 잘 모르는 것도 귀여워…….’
본인도 모르는 콩깍지에 세레니티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큰일났네요. 미아의 계획이 어긋났군요.”
“응. 이대로 가다간 아딜이 정말 사상 최악의 쓰레기가 될 지경이야…….”
“폐하께서는 그런 분은 아니신데 말이에요.”
“맞아…….”
“변태지만요.”
“…….”
‘그 오해 아직도 안 풀렸니.’
미아가 어색하게 하하 웃었다.
때마침 바람이 그들을 스치고 지나갔다. 눈앞에 바스락거리는 장미 정원이 보였다.
‘원래 두 사람은 저곳에서 만났어야 했지.’
미아가 들어온 소설의 제목은 <장미 정원의 세레니티>.
미아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렌.”
“네, 미아.”
“아딜에게 감정 있어?”
세레니티의 금빛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걸 어떻게…….”
‘있구나!’
미아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래, 이게 정상이다.
남자주인공과 여자주인공이 만났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게 이상한 거다.
미아가 원작을 벗어나 살아남은 건 정말 엄청난 행운이었던 게 분명했다. 미아가 혼란스러운 표정의 세레니티를 마주 보았다.
“솔직히 말해도 돼, 렌.”
“정말요……?”
“응. 난…… 다 이해해 줄 수 있어. 난…… 괜찮아!”
“미아…….”
“응!”
세레니티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긴장감이 맴돌았다.
“저는…….”
“응! 무슨 말인지 알아!”
“폐하를 한 대만 때리고 싶긴 해요…….”
“그래! 내가 조용히 사라져……, 응?”
당황한 미아를 두고 세레니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미아에게 변……, 음흉한 취향을 가르친 게 너무 얄미워서……. 딱 한 대만…….”
“…….”
“불충한 감정인 줄 알기에 숨겼는데, 미아는 정말 예리하네요…….”
“……아니, 감정이란 게 그런 감정이었어?”
“아니면요?”
반문하는 세레니티의 얼굴은 순진하고 맑았다. 아무 사심도 없어 보이는 그 모습에 미아의 긴장이 탁 하고 풀렸다.
미아는 원래 자신이 세레니티의 자리를 빼앗았다는 죄책감이 있었다.
하지만 세레니티는 모르고, 애초에 그건 여기서는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어쨌든 흐름은 아직 세레니티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 약간 억지스러운 테레지아의 노림수만 봐도 그렇다.
“렌.”
미아가 진중하게 입을 열었다.
“고의는 아니었지만…… 내가 네 기회를 빼앗았을지도 몰라.”
“기회요?”
“대신…… 내가 더 잘할게. 더 좋은 것으로 보답할게.”
어차피 곧 큰 사건이 일어난다.
‘슬슬 두 번째 악녀가 나와 줄 때거든.’
<장미 정원의 세레니티>에 나오는 악역 조연은 총 네 명. 그중 한 명은 최종 보스인 크리소르였고, 한 명은 테레지아 카르디날레였다.
이제 나머지 두 명이 등장할 차례였다. 그리고 그중 한 명에게 세레니티는 꽤 크게 다칠 예정이었다.
‘그런 일마저 없게끔 지키는 거야.’
미아가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를 바라보던 세레니티가 자수 바늘을 내려놓았다.
“미아. 미아는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어요.”
미아의 눈이 크게 뜨였다.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세레니티의 검지 끝이 미아의 굳은 미간을 톡 건드렸다.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우린 친구잖아요. 친구끼리는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아도 돼요.”
“…….”
“제가 잃은 기회는 중요하지 않아요. 그게 뭐든, 미아와 친해질 기회보다는 값지지 않을 테니까.”
미아가 머뭇거렸다.
“하지만 아주 중요한 것일 수도 있는데…….”
“전 지금 행복하니까 뭔지 몰라도 별로 중요하진 않았을 거예요. 게다가, 전 아는걸요. 미아가 절 위해 그랬으리란 걸.”
“……안다고?”
세레니티가 천사처럼 아름다운 얼굴로 은방울처럼 맑게 웃었다.
“미아는 늘 저를 따뜻하게 바라봐 주잖아요. 처음 만났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쭉.”
미아가 멍한 얼굴을 했다.
‘내가…… 그랬나?’
수틀을 내려놓은 세레니티가 먼 곳을 바라보았다. 온화하고 다정한 빛이 깃든 얼굴이었다.
“부끄럽지만요, 미아……. 저는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셨어요. 양어머니는 저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셨고요. 그래서 늘 애정이 고팠어요.”
세레니티의 과거 이야기에 미아가 숨을 들이켰다. 소설에서도 읽은 이야기였지만, 막상 본인에게 들으니 세레니티의 슬픔이 더 와닿았다. 세레니티가 잠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런 사람은 타인의 작은 관심도 예민하게 눈치채곤 하거든요…….”
그녀는 이내 눈을 들어 다정히 미아를 응시했다.
“그런 제가, 저를 바라보는 미아의 눈을 봤을 때 뭘 느꼈을까요?”
세레니티는 미아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그녀가 주기적으로 봉사활동을 해오고 있는 앙겔루스 구빈원.
그곳을 방문한 낯선 손님.
세레니티는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그런데 그녀보다 더 긴장한 것 같은 여자가 세레니티 앞에 나타났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미아라고 해요. 원래는 미아 셀레스티얼인데…….’
약간 허둥지둥하는 태도.
힘이 바짝 들어간 눈썹.
고운 얼굴과 부드러운 뺨.
미아는 세레니티가 원래 알던 귀족과는 달랐다. 오만하지도, 꿍꿍이가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미아는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너를 해치지 않아! 너랑 친해지고 싶어! 이상한 사람 아니야! 진짜 진짜!’
그걸 알아보지 못하면 바보다. 핑크빛의 작은 동물이 보내는 간절한 눈빛에 세레니티의 경계심은 순식간에 녹아 버렸다.
그래서였다. ‘궁에 들어오라’는 황태후 크리소르의 제안을 바로 승낙한 것은.
‘미아를 다시, 제대로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으니까.’
세레니티가 조용히 웃었다.
‘하지만 이 말은 하지 않을 거야. 미아가 부담이나 책임감을 느낄지도 모르니까.’
모르긴 몰라도 폭군이라는 황제가 미아에게 유독 무른 것도 비슷한 이유일 것이다. 그를 보는 미아의 눈빛 역시 따스한 애정이 잔뜩 깃들어 있었으니까.
세레니티는 떨리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미아의 손을 잡았다.
“그러니까 미아. 더는 그런 슬픈 얼굴 하지 않기예요? 미아는 웃을 때 제일 예뻐요.”
“렌…….”
미아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하지만 미아는 고개를 붕붕 젓고서 방긋 웃었다.
“렌! 렌은, 하고 싶은 거 없어?”
세레니티가 멈칫했다.
“하고 싶은 거요……?”
“응. 기왕 듀레인을 나왔으니, 렌이 하고 싶은 걸 했으면 좋겠어!”
‘내가 다 도와줄게!’
뒷말은 삼켰다. 세레니티의 말대로, 친구는 그런 게 아니니까.
세레니티는 놀란 얼굴로 한참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사실, 전 공부가 하고 싶었어요.”
“공부?”
“네. 단순히 책을 읽는 것에서부터…… 더 깊은 지식을 탐구하는 것까지요. 제 세계가 넓어지는 감각이 황홀하더라고요.”
그렇게 말하는 세레니티의 얼굴이 본 적 없이 아름답게 빛났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녀의 안색이 흐려졌다.
“아버지는 그걸 좋아하지 않으셨어요. 책을 빌리는 것도 어려웠죠. 그래서 받은 교육은 자수나 악기 연주가 전부고…….”
아.
미아의 가슴 속에서 뭔가가 울컥했다.
소설에도 나온다. 듀레인 남작은 세레니티에게 지식을 가르치지 않았다. 세레니티가 받은 교육은, ‘좋은 신부가 되기 위한 교육’이 전부였다.
이유?
세레니티가 예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