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한참을 아딜로트와 티격태격하던 슐츠 공작은, 이내 미아의 얼굴을 보곤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궁금한 점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앗……. 네. 저기……, 이렇게 잘해 주셔도 되는지…….”
“됩니다.”
슐츠 공작이 쌈박하게 대답했다.
“일을 잘하시지 않습니까.”
“…….”
아. 그거였어?
“셀레스티얼 백작가의 재산을 환수했을 때, 서류 작업을 전부 미아 님께서 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랐습니다. 제 솔직한 의견을 말씀드리자면, 그냥 궁내부로 취직해 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얜 거기 안 가.”
“그럼 사직시켜 주십시오.”
“싫어.”
딱 잘라서 슐츠 공작의 사직을 윤허하지 아니한 아딜로트가 미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회의는 왜?”
“아.”
미아가 정신을 차리고 말을 이었다.
“제가 일단은 아딜의 애완동물이잖아요? 유력한 황후 후보이기도 하고.”
“그런데?”
“……후보답게 깽판 좀 쳐 보려고요?”
미아가 멋쩍게 뺨을 긁으며 말했다. 안 된다고 하면 설득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딜로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든가.”
미아가 당황으로 입을 벙긋거렸다. 그러곤 초조하게 손을 움찔거리며 신음을 흘렸다.
“아딜……. 다시 한번 말하지만 아무한테나 그렇게 날름 허락을…….”
“해 주진 않지. 당연히.”
아딜로트가 다시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그럼 저라서 허락해 주는 거예요?”
아딜로트는 코웃음만 쳤다. 멀뚱히 그런 아딜로트를 내려다보던 미아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아딜, 보석 사 줄래요?”
“그래.”
“드레스도 더 필요해요!”
“그래.”
“집 사 줘요!”
“좋아.”
“권력 남용하게 해 줘요!”
“맘대로 해.”
“황궁 나가도 돼요?”
아딜로트가 멈칫했고, 고개가 들렸다. 묘하게 언짢은 기색이 서린 얼굴이었다.
“그건 안 돼.”
미아가 멍해졌다. 곧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딜은…… 고양이나 거위를 키워야겠다. 걔네는 영역 동물이거든요.”
“동물이라면 공식적으로 이미 하나 있잖아.”
“저는 영역 동물이 아니라서…….”
“넌 나가 봐야 황태후 손에 죽는 게 전부야. 목숨이 아까우면 고쳐지게 되어 있어.”
‘맞는 말씀.’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그라스 후작의 뒷공작을 파헤치기 위해선, 언젠가 에트루리나 지역에 가 봐야 했다.
‘일단은 할 수 있는 일부터 하자.’
미아가 주먹을 쥐었다. 세상에는 로맨스를 글로 배우는 사람도 있으니, 악녀 짓쯤이야!
* * *
제인의 도움을 받아 화장을 진하게 했다. 허리도 꽉 조이고, 보석이 자르르 달린 드레스를 입었다.
‘지금의 나는 엄청! 악녀 같을 거야!’
남들 눈에는 조금 화려하게 치장한 토끼로 보였지만 미아는 알지 못했다. 그 상태로 미아는 정무실에 입성했다. 귀족들은 놀랐고, 아딜로트는 태연했다.
“시작하지. 트레베레움에서 기술 협정을 요청했다고?”
황제가 태연하니 귀족들은 어영부영 회의를 시작했다. 미아의 자리도 있었다. 아딜로트 옆에, 노란 벨벳으로 감싼 예쁜 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하지만! 악녀는 절대 자리 자리를 지키지 않지!’
미아는 거기에 앉지 않고 천천히 귀족들 뒤를 돌기 시작했다.
‘악녀 짓. 아딜의 평판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의 심한 짓.’
해 본 적은 없지만, 글로는 많이 읽었다. 미아가 부채로 얼굴을 가린 채 먹잇감을 물색했다. 시의적절하게 괜찮은 사냥감이 눈에 들어왔다.
“폐하, 제가 발언해도 되겠습니까?”
“해 봐, 험버트 백작.”
미아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험버트 백작! 나중에 어쩌고 죄목으로 처형당하는 놈!’
너 잘 걸렸다.
미아가 뭔가를 열렬히 발언하는 험버트 백작 옆에 다가갔다. 백작 옆에 물이 담긴 크리스탈 잔이 보였다. 빨간 눈이 번득였다.
‘악녀라면 응당!’
미아가 번개같이 손을 움직였다.
‘물을 엎질러 줘야지!’
촤악!
“윽!? 이게 뭐야!”
“어라, 실수!”
“이게 뭐하시는……!”
“실수했어!”
“예!?”
당황한 험버트 백작과 달리 미아는 태연했다.
“실수라고 했잖아!”
그녀가 미안하다는 기색 하나 없이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실수라고요?”
험버트 백작의 얼굴이 구겨졌다.
“응. 아닌 거 같아? 근데 옷 많이 젖었다?”
미아가 까르르 웃었다.
“허. 하. 지금 대체……?”
험버트 백작이 욱했다. 장소가 달랐다면 한 대 때리기라도 했을 얼굴이었다. 그때 아딜로트가 이쪽을 보았다.
“험버트 백작. 발언은?”
“예? 폐하, 지금…….”
“발언은?”
마냥 심드렁한 시선이었다. 미아를 제지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이는. 험버트 백작은 동요를 숨기지 못했고, 미아는 다시 손을 움직였다.
촤악!
“으악!”
“앗! 또 실수!”
“이 여자가 진짜……!”
험버트 백작이 가까스로 뒷말을 삼켰다.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그가 아딜로트의 눈치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실수라잖아. 왜 자꾸 말꼬리 잡고 늘어져? 사람이 그 정도 도량밖에 없어?”
미아가 그렇게 말하면서 컵을 들었다. 다시 엎을 생각이 만만인 자세였다.
“이보십시오!”
“뭐가 불만이야? 설마 내가 미안하다고 하길 바라는 거야? 그건 아니지? 네가 거기 있던 게 잘못이잖아.”
“하……! 와……!”
험버트 백작은 시시각각 어처구니가 없어지는 느낌을 경험했다. 미아 역시 자신의 말에 감탄했다.
‘내가 어떻게 이렇게 뻔뻔한 말을!’
어쨌든 일하러 온 사람인데 여기 있는 게 잘못이라니. 애완동물 흉내를 많이 내서인지 개소리가 는 모양이다.
‘정말 악녀 같다! 소설 속 악녀들은 어떻게 이런 논리 없는 대사를 당당하게 말하는 거지?’
역시 악녀도 보통 심줄로 할 만한 게 아니었다. 험버트 백작은 눈을 사납게 부라리더니, 아딜로트에게로 고개를 휙 돌렸다.
“폐하, 귀한 반려동물은 궁으로 들여보내시는 게 어떠실지요?”
물론 미아는 여기서 아딜로트가 개입하는 걸 원하지 않았다. 아딜로트의 입술이 움직이기도 전에 그녀가 재빨리 부채를 펼쳤다.
“너 왜 나랑 얘기 안 하고 폐하한테 얘기해? 지금 나 무시하는 거야?”
“예?”
“내가 가진 것도 없이 예쁘고 똑똑하고 귀엽고 깜찍하기만 하다고 무시하는 거지!”
“예?”
“폐하! 쟤가 저를 무시해요!”
미아가 흐느끼는 척 하며 아딜로트에게 달려갔다.
“저보고 예쁘기만 하고 실수마저 매력적이라 가슴이 동요하니까 여기서 썩 꺼지래요!”
“제가 언제 그랬습니까!?”
“맘속으로 말했잖아!”
일갈한 미아가 아딜로트에게 고개를 홱 돌렸다. 슬슬 악녀 짓에 재미를 붙인 분홍색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목을 쳐 주세요!”
“……허?”
“무슨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지켜보던 귀족들이 헛웃음 쳤다.
‘어때! 악랄하지! 재수 없지! 오금이 저리지! 근데 못 개기겠지!’
느낌이 좋았다. 미아가 방실방실 웃었다.
‘그러니까 빨리 아딜을 예뻐하라고!’
그때, 아딜로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치자.”
“……네?”
“치자고, 목. 거기 너, 내 방에서 ‘상귀스―에키온’을 가져와.”
“……예?”
미아가 목을 빼며 재차 물었다.
‘샹귀스―에키온’은 아딜로트의 검 이름이다. 워낙에 대단하신 검이라 이름까지 붙었다. 당연히 아딜로트는 그 검을 들고 전쟁도 하고, 사람도 죽이고, 목도 치고…….
‘뭔가 잘못됐다!’
시종이 정무실을 나가자마자 미아는 아딜로트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아딜! 사람은 목을 치면…… 죽어요?”
“죽지.”
“사람을 함부로 죽이면 될까요, 안 될까요!?”
“널 무시했다며.”
“맘속으로 했겠죠!”
“하긴 했네.”
“그걸 공식 문서에 뭐라고 설명하게요!”
“험버트 백작이 황제의 소유물에 대해 감히 불민한 사상을 가지고 행동함.”
“안 했잖아요!?”
“마음으로 함.”
미친 걸까? 미아가 잠시 불민한 생각을 떠올렸다.
“그렇다고 해도 이런 즉결처분은 좋지 않아요!”
“저번이랑은 다르네.”
“메어리야 잘못을 했으니까 그렇죠!”
게다가 험버트가 나쁜 짓을 저지를 예정이라는 건 알지만, 아직 정말로 그랬는지는 모르고!
아딜로트가 고개를 갸웃하고서 턱을 쓸었다.
“잘못했으면 상관없는 거야?”
“물론이죠!”
“예를 들어?”
“살인, 방화, 폭행 등등! 그런 놈들이야 ……를 세로로 쪼개 버려도 싸지만!”
그 순간, 험버트 백작이 움찔했다. 아딜로트의 시선이 그에게 돌아갔다. 입가에 묘한 조소가 떠올라 있었다.
“안 그래도 최근 감찰부의 보고가 있긴 했는데…….”
“네?”
“어차피 뒤로 하나 정도는 하고 있지 않겠어? 만들기 나름이고 조사하기 나름이지.”
세상에 정말 악당 같은 대사다.
역시 원조 폭군은 따라 할 수 없군요.
미아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확실히 밝혀진 게 아니니까 참아야죠! 무죄 추정의 원칙 몰라요!?”
“목을 치자고 한 건 너야.”
“저지만!”
그때 때마침 시종이 검을 가져왔다. 긴 쿠션 위에 놓인 검을 본 미아가 움찔했다. 이렇게 제대로 본 건 처음이었다.
새까만 날에는 복잡한 흰 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그립은 검고, 폼멜에는 붉은 보석이 빛났다. 그리고, 이름이 붙은 검답게 음산한 기운이 흘렀다.
‘이걸 진짜로 보게 될 줄이야…….’
아딜로트는 그것을 가볍게 들고서, 손잡이를 미아에게 내밀었다.
“줄게. 날 잘 들어. 치고 싶은 사람 있으면 쳐 봐.”
정말 미친 걸까? 미아가 부채를 두 손으로 부여잡고 움찔거렸다.
“제, 제가 누구 목을 칠 줄 알고!”
“험버트.”
“불쌍한 험버트에서 벗어나요, 우리!”
아딜로트가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그 태연함이 더 소름 돋았다.
“나중엔 그 말 못 할 텐데. 그래서 누구 목을 칠 건데?”
“여, 여긴 없지만 그라스 후작님이라든가!?”
그라스의 이름이 나오자 아딜로트는 약간 놀란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