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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애완동물이 되었다-67화 (67/193)

67화

미아는 쿨하게 대답한 뒤 다시 여자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름이 뭐냐니까?”

“저, 저요?”

미아에게 지목당한 여자가 퍼뜩 놀라 자신을 가리켰다.

“응, 너!”

“저, 전……, 크, 크리스티아네 포크트라고 합니다. 포크트 남작가의 셋째예요…….”

주워 들고 있던 미아의 부채를 내밀며 여자는 미아의 눈치를 보았다. 미아는 부채를 받아들고, 촥 소리나게 펼쳤다.

“좋아, 포크트 양. 넌 인생을 남이 조종하게 두는 게 취미야?”

세상에. 나 완전 악녀야!

그런 미아의 생각과 달리, 워낙 순한 인상 탓에 크리스티아네는 그것을 그저 질문으로 받아들였다.

“그런 건 아니에요. 하지만 가문의 빚이…….”

“네가 졌어?”

“아뇨. 아버지께서 무리해서 사업을 확장하시다…….”

“근데 그걸 왜 딸 인생으로 갚아?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아버지란 사람이 왜 그래!?”

미아가 생각하기에 치가 떨릴 정도의 패륜적인 대사였으나, 크리스티아네의 생각은 달랐다.

‘지금 날…… 걱정해서 화내 주시는 걸까?’

감동이 뭉클뭉클 차올랐다.

‘모두 가족이니까 참으라고 말했는데…….’

약혼자와 친구들도 그랬다. 어쩔 수 없으니 네가 참으라고. 미아처럼 말해 주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당연하지!”

“하지만 모두가 키워 준 은혜를 모른다고 말하는데…….”

“낳기 전에 낳아도 되냐고 물어보지도 않아 놓고!”

미아가 부채 너머에서 버럭 외쳤다.

“게다가 당신은 관료 시험도 합격했다며?”

“네. 비밀리에 공부해서 시험을 쳤는데, 운이 좋아서 합격했어요…….”

“열심히 한 거지, 운이 어딨어? 난 너처럼 자신감 없는 애들이 너무 이, 이, 이해가 안 돼!”

내가 이렇게 심한 말을 하다니!

미아는 일그러지는 얼굴을 부채로 가렸고, 그 바람에 크리스티아네의 눈에 생기가 도는 것은 보지 못했다.

“그럴까요……? 하지만 아버지께서 관료는 절대 안 된다고 하셨어요. 관료로서 일할 거면 가문에서 나가라고…….”

“그래서 가만히 결혼하겠다고?”

“그건, 아니에요……. 다만, 가문 없이 혼자 살아나가야 하는 게 두려워서…….”

“그 정도 각오도 없이 어떻게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려고 그래!”

“각오…….”

멍하니 중얼거리는 크리스티아네를 향해 미아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래! 들어 봐! 나는…… 인생을 날로 먹고 싶어!”

“……네?”

“난 그래서 날로 먹었다가 배탈 날 각오 정도는 하고 있어! 그런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만이 인생을 날로 먹을 수 있는 거니까!”

……무슨 소리야?

도저히 의미를 파악할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크리스티아네는 묘하게 설득되는 자신을 느꼈다.

미아도 그걸 알고 있었다. 원래 개소리일수록 은근히 설득력이 있다.

‘그리고 악녀는 개소리해도 돼. 악녀니까.’

미아가 부채 너머에서 목소리를 낮췄다.

“인생을 수동적으로 살지 마! 어느 쪽을 선택하든 네 의지로 하란 말야.”

크리스티아네의 얼굴이 멍해졌다.

부모님도 형제도 모두 ‘윗사람의 의견을 따르라’라고 말했다. 더 오래 살았으니 더 현명할 거라고 말하며.

누구도 크리스티아네 본인의 의견은 들어주지 않았다. 답답했다. 남들은 이게 옳다고 하는데, 그녀는 저게 더 옳은 것 같았다.

그런데 미아의 말을 들으니 갑자기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맞아요. 어느 쪽이든, 내가 선택하는 게 제일 중요한 거네요…….”

“당연하지. 그러면 적어도 후회는 안 하거든.”

크리스티아네가 심호흡한 뒤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아까와 달리 생기 넘치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감사해요. 저, 결심이 섰어요. 관료로서 일할 거예요!”

“정말? 잘됐…….”

미아가 재빨리 도도하게 표정을 바꿨다.

“……든가 말든가, 나한테 답답한 모습 비추지나 마!”

“아하하! 그럴게요. 감사합니다.”

크리스티아네가 수줍게 얼굴을 붉혔다.

“귀하신 분의 성함이…… 미아 님 되시죠?”

미아가 움찔했다.

“나를 알아?”

“유명하시니까요.”

크리스티아네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좋은 분이시라는 걸 알게 되어서 기뻐요.”

“으, 응?”

“베버 남작을 쫓아주셔서 감사했어요.”

크리스티아네는 거듭 감사하며 떠났다. 크리스티아네가 떠나자마자 미아는 충격 받은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나보고 좋은 사람이래…….”

“아랫사람에게 지지받는 것도 윗사람의 덕목이지요. 기쁘시겠어요.”

“응, 너무 좋아! ……가 아니라, 내 의도랑은 정반대인걸!”

“앞부분은 충분히 잘하셨습니다.”

“뒷부분은?”

“노력하신 것이 느껴지네요.”

“노력만 가상하다는 뜻이잖아!”

미아가 으앙 하며 부채에 얼굴을 묻었다.

제인은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왜 저렇게 안 어울리는 짓을 하시려는 걸까.’

사정은 모른다. 하지만 어지간히 성격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계속하시겠어요?”

“그래야지…….”

미아가 죽을상을 하고서도 부채를 착 펼쳤다. 전투 준비였다.

“‘그래도 걔보단 낫더라’의 ‘걔’가 되어 주려면, 열심히 해야지! 아딜을 위해!”

“어머나…….”

제인이 깨달음의 감탄사를 흘렸다. 발상은 의외지만, 어쨌든 의도는 황제를 위해서란 뜻이다.

‘좋은 짝을 찾으셨네, 우리 폐하.’

물론 아딜로트는 황제이니 정략결혼을 할 확률이 높다. 당장은 미아를 황후 후보로 두었더라도, 나중에 바뀔 수도 있다.

‘……하지만 기왕이면 이 영애가 우리 폐하 옆에 계셨으면 좋겠네.’

제인은 남몰래 그렇게 생각하며 인자하게 미소 지었다. 물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비밀이었다.

“가시죠, 미아 님.”

“좋아, 좀 더 개차반으로!”

* * *

곧 궁내에 새로운 소문 하나가 떠돌기 시작했다. 황제의 애완동물이 황궁 이곳저곳을 쏘다니며 밉상들을 격퇴해 준다는 소문이었다.

소문의 발원지는 귀족과 하인을 가리지 않았다. 한 빨래방 시녀는 동료들과 키득거렸다.

“참! 나 그 유명한 ‘애완동물’이 구해 줬어!”

“진짜? 무슨 일 있었어?”

“귀족들 알잖아, 시녀라고 하면 만만하게 생각해서 성희롱하는 거. 그때 나타나서 도와주더라고?”

“진짜? 실제로 보니까 어때?”

시녀가 빨래 바구니를 든 채 고개를 갸웃했다.

“와, 생긴 건 귀엽게 생겼는데 웃으면서 막말하니까 장난 아니데?”

“그 정도야?”

“어. 그런데 엄청 속 시원하더라. 상상에서만 하던 말을 남이 해 주니까 속 엄청 시원해!”

“주방에서 일하는 엘리도 그 얘기 하던데! 가려운 곳 긁어 줘서 속이 다 시원하다고.”

“응. 도와줘 놓고서 딱히 착한 척도 안 하고.”

“좋은 사람인가?”

시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모르겠는데 좀 불쌍하긴 해. 가문이 망해서 애완동물이 된 거잖아? 그런 사람이 왜 하필 황제한테 잡혔는지…….”

“이랬는데 의외로 황제가 좋은 사람이라거나?”

하녀들이 까르르 웃었다.

“말도 안 돼. 그런 게 어딨어?”

“아니, 그렇잖아. 원래 현실이 더 말도 안 되는 일투성인데…….”

그녀들의 웃음소리가 공기 중에 흩어졌다. 소문은 바람을 타고 더 널리 널리 퍼져 나가고 있었다.

* * *

자신이 없는 곳에서 어떤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미아는 타깃을 바꿨다.

‘좀 더 핵심 인사에게 다가가야겠어. 황제랑 가까운 사람들.’

그들이야말로 아딜로트가 얼마나 착하고 선량한지 실감해야 한다. 특히, 황제파도 황태후파도 아니면서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는 귀족들 말이다.

미아는 아딜로트를 찾아갔다.

“아딜. 혹시 정무실 같이 들어가도 돼요? 너무 중요한 회의 말고, 대귀족 없고. 그런 회의!”

미아의 질문에 대답한 건 아딜로트가 아닌 궁내관인 슐츠 공작이었다.

“내일 오전 회의가 그렇습니다. 한데 무슨 일이십니까?”

“앗…….”

슐츠 공작에게서 답변을 들을 줄은 몰랐던 미아가 당황해 말을 잊었다. 그녀의 신분 때문이었다.

대외상 반역자의 딸인 미아를 슐츠 공작은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굴어 왔었다.

그래서 미아도 굳이 그에게 아는 척을 하지 않았었는데, 그런 그가 갑자기 너무나 자연스레 말을 걸어온 것이다.

왜 갑자기?

“어, 제가 거기 참관을…… 해 볼까 하고…….”

“어떠십니까, 폐하?”

“나야 상관없지.”

아딜로트가 그 와중에도 서류 하나를 옆으로 넘기며 답했다. 몹시 바쁜 것 같았다.

“그럼 참관할 수 있게 자리를 마련해 놓으라고 하겠습니다.”

“정말요……? 그, 그래도 되는 건지…….”

그 순간 슐츠 공작의 다정한 녹색 눈이 서늘하게 번쩍였다.

“아무 상관 없습니다. 미아 님. 어디 사는 어느 분이 청소를 어찌나 열심히 하셨던지, 밑에 있던 관원들을 대거 승진시켜서 자리를 채우느라 어차피 정신이 없…….”

“큼.”

아딜로트가 갑자기 헛기침했다. 그러자 슐츠 공작이 한숨을 폭 쉬고는 눈을 흘겼다.

“폐하께서 하시는 일엔 늘 이유가 있었으니 말리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미리 예고는 해 주시지 그랬습니까. 이러다 재상께서 폐하 멱살을 잡으러 달려오시겠습니다.”

“……진짜 그러면 사형시켜.”

분명 농담일 텐데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 말에 미아는 멍하니 둘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그러자 슐츠 공작이 미아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미아 님. 지금까지는 그냥 늙은이의 투정이었으니 듣고 넘겨 주십시오.”

애쉬 베이지의 머리를 깔끔하게 넘긴 미중년의 미소에 미아는 저도 모르게 뺨을 붉혔다.

“그, 아니에요……. 갑자기 쳐들어와서…….”

“그 부분은 괜찮습니다. 그나마 미아 님이 계셔야 폐하께서도 쉬시니 말입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그럼 사직시켜 주십시오.”

“싫어.”

……세종이랑 황희 정승 같은 관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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