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이건 너무 화려한데……?”
“악녀가 되고 싶으시잖아요?”
“그야 그렇지만…….”
“호호. 그러면 적어도 치마에 다이아몬드 정도는 달려 있어야겠죠.”
그렇게 말하면서도 제인은 방을 가득 채운 화려한 드레스와 장신구가 눈에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쓸만한 게 몇 개 없군요…….”
전혀 아닌데요. 미아가 질린 얼굴로 드레스를 보며 생각했다. ‘말을 놓으시라’고 말한 제인은 미아를 위해 제대로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섰다.
‘원작에서도 세레니티를 도와주긴 하지.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름만 등장하는 조연이라는 느낌이었는데. 전혀 다르잖아?’
눈앞의 인자한 시녀장은 괜히 시녀장이 아니었다. 하녀들은 그녀가 뭘 가져오라고 하든 냅다 대령했다.
금세 미아에게 화려한 검은 드레스를 입힌 제인은 보석함을 들어 올렸다.
“이제 반지를 골라 보시겠어요?”
달칵.
‘눈부셔!’
미아가 감탄사를 내뱉으며 보석함을 살폈다. 온갖 화려한 반지가 즐비했다. 미아는 그중 하나에 시선을 사로잡혔다.
“이건…….”
미아가 반지 하나를 들어 올렸다. 가운데에는 진주를 박고, 그 주위를 루비와 사파이어로 두른 반지였다.
“……안목이 높으시군요.”
그것을 본 제인의 얼굴에 놀람과 그리움이 떠올랐다.
“이건 레아 황비님의 반지랍니다.”
“그게 황가의 패물함에 있나요?”
“예. 잃어버린 몇 가지를 빼면, 다행히 그분의 장신구는 그대로 황가가 소유하게 되었답니다.”
“용케 없어지지 않았네요.”
크리소르가 가만 안 놔뒀을 것 같은데.
“레아 황비님은 좋은 분이셨어요. 덕분에 많은 이들이 물밑에서 그 분을 도우려 애썼죠. 이건 그때 황비궁에서 일하던 하녀가 숨겨 주었다고 들었습니다. 저희 시녀들은 기사들을 막느라 이런 걸 챙길 시간은 없었거든요.”
제인은 그렇게 말하고서 반지를 들어 올렸다.
“이걸로 하시겠어요? 미아 님께도 잘 어울릴 거예요.”
미아는 가만히 그녀의 침착한 밤색 눈을 마주했다. 그리고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뽀얀 진주는 아직도 영롱했다.
곧 미아는 아이처럼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제가 할 물건은 아닌 것 같아요!”
“하지만…….”
“이 페어컷 루비는 어때요?”
제인의 놀란 표정을 무시하고 미아는 다른 반지를 들어 올렸다. 제인 역시 금방 부드러운 미소로 되돌아왔다.
“잘 어울리시네요. 캐럿도 크니 세 보이는 걸 원하신다면 딱인 것 같군요.”
“그럼 이걸로!”
몇 가지 장신구를 더 고르자 치장이 끝났다. 제인은 사람을 시켜 드레스와 보석함을 물리며 말했다.
“그리고 나중에 폐하께 드레스와 보석을 좀 달라고 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런 말 하셔도 돼요?”
“어머나. 절 걱정해 주시는 건가요? 호호. 귀여우셔라.”
제인이 입을 가리고 미소 지었다.
“하지만 이 제인, 폐하께 그 정도 말은 할 수 있는 위치랍니다. 저는 그분의 코도 닦아드렸는걸요?”
우아한 중년 여성의 당당한 말에 미아가 조용히 감탄했다.
‘숨겨진 권력자……!’
후후 웃던 제인은 이내 눈꼬리를 휘었다.
“그래서 이렇게 꾸미시고 어딜 가실 생각이신가요?”
“음, 일단 귀족들이 있을 만한 곳으로 가려고요.”
“어머나. 다른 영애 분들과의 교류인가요?”
귀여워라. 황후 후보가 되셔서 각오를 새로 다지신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웃는 제인을 향해 미아 역시도 활짝 웃었다.
“네. 주먹이 오가는 교류를 해 보려고요!”
“……네?”
제인이 제 귀를 의심했다. 미아는 검은 새틴 장갑을 낀 손을 쥐락펴락하며 당차게 일어났다.
“이 구역에서 제일 미친년이 누군지 보여 줘야겠어요!”
* * *
미아가 중앙 뜰로 향했다. 불안해서 안 되겠다는 얼굴의 제인과 함께였다. 중앙궁 앞에 있는 대리석 뜰은 낮에 사람이 가장 많은 곳으로, 귀족이라면 누구에게나 개방된 곳이기도 했다.
미아의 눈에 삼삼오오 모인 귀족들이 보였다.
‘내가 제일 눈에 띄어!’
뿌듯해진 미아가 밝게 웃었다. 제인의 말을 믿고 최대한 화려하게 꾸민 보람이 있었다. 이제 계획대로 어지간히 개차반인 척 굴 차례였다.
‘권력 있는 놈 인성이 쓰레기면 어떤 일이 생겨나는지 보여 주마!’
그러면 상대적으로 아딜로트의 심성이 돋보이리라. 하지만 미아는 곧 난관에 봉착했다.
‘그렇다고 아무 잘못 안 한 사람한테 화를 낼 수도 없고…….’
고민에 빠진 미아가 주춤했다. 역시 악녀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도저히 상대에게 미안해서 시비를 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많지 않았기에, 미아는 빠르게 생각의 방향을 틀었다.
‘잘못한 놈한테 화를 내자! 아주 작은 거라도 좋으니까!’
큰 결심을 함께 눈을 부라리고 있던 미아의 눈에 때마침 한 남녀가 보였다.
“전 가야겠어요, 베버 자작 각하. 제발 놓아주세요…….”
“가겠다고? 흠, 별로 추천하진 않아! 그대 아버지가 우리 가문에 빚진 건 알고 있겠지?”
얼굴에 분위기는 없고 위기만 있는 마른 남자 귀족과, 난처한 얼굴의 여자 귀족이었다. 남자가 여자의 손목을 붙들고 실랑이하는 중이었다.
“그건 아버지와 해결하실 일이에요!”
“글쎄, 그대의 아버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던데?”
“네?”
“황궁의 관료 시험에 합격했다지? 포기하고 나와 결혼해. 그러면 너희 가문의 빚을 갚아 주지.”
“…….”
“어차피 좋은 가문으로 시집가는 게 여자로서는 최고의 성공이잖아?”
그렇게 말하며 남자가 비열하게 웃었다.
‘음. 구구절절 개소리군! 합격.’
더 들어 볼 것도 없었다.
함박웃음으로 종종걸음을 치며 다가간 미아는.
철썩!
일단 부채를 던져서 선빵부터 날렸다. 동시에 뒤에서 제인이 헛웃음을 치는 게 들렸다.
“어머! 내 부채!”
미아가 일부러 크게 외치며 다가갔다. 눈은 최대한 도도하게 치떴고, 턱은 오만하게 쳐들었다.
“뭐야! 어떤 새끼가 내게……!”
베버 남작은 다가오는 미아를 보고 말을 멈췄다. 바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혹시 숙녀분의 성함이?”
“너 지금 나한테 수작 부리는 거야? 폐하의 것인 나한테?”
“예?”
“제인, 받아 적어. 베버 어쩌고가 폐하의 애완동물인 나를 희롱함!”
“예, 미아 님.”
기대하지도 않은 제인의 호응에 미아의 어깨가 좀 더 으쓱해졌다.
“그러니까 사형!”
“예!?”
베버 남작은 기가 막힌 듯이 외쳤다.
“이게 뭐하시는 겁니까, 지금! 제가 뭘 잘못했다고!”
“그건 네가 생각해야지. 웃어른에게 책임을 전가하면 못써!”
“설마 지금 제가 이 여자를 협박하는 중이라고 생각하셔서 그러시는 겁니까?”
“아닌데?”
“그럼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내가 널 조지고 싶다는데 거기에 이유가 왜 필요해!”
“예!?”
“난 원래 아무나 조지고 싶은 사람이야! 성격이 아주 개차반이지!”
미아가 버럭 외쳤다. 베버 남작이 ‘허, 허, 허.’하고 헛숨을 내쉬었다. 미아는 그 앞에서 입을 가리고 요조숙녀처럼 웃었다.
“어쩔 건데. 때릴 거야?”
“이……!”
“큼.”
베버 남작이 눈을 부라리자마자 제인이 헛기침했다. 베버 남작은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황궁 레벤토르의 시녀장……!’
황제 아딜로트의 무한한 신임을 받고 있는 여자였다. 즉 여기서 그가 뭘 하든 황제의 귀에 바로 들어갈 게 뻔했다.
“뭘 원하시는 겁니까?”
“원하는 거 없는데? 그냥 나보다 더 인성이 개차반인 것 같은 사람이 눈에 보이길래 질투가 나서 그만.”
“그래서 제게 부채를 던지셨다 이겁니까?”
“응!”
베버 남작의 어이 없다는 듯한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미아는 해맑게 웃었다. 그러다 의아한 듯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근데 왜 평소에 말하는 거랑 비슷한 거 같지? 이 대사가 아닌가?”
“지금 사람을 두고…….”
“잠깐만 기다려 봐. 뭐가 잘못된 거 같아. 악녀 대사를 쳐야 하는데……?”
“대체……!”
“좀 기다리래도! 얼굴이 그 모양이면 인내심이라도 있어야 할 거 아냐!”
“뭐, 뭣…….”
미아의 말에 베버 남작이 울화통을 터뜨렸다.
“내 얼굴이 뭐가 어때서!”
“더러워.”
“……!”
미아는 충격받은 베버 남작을 두고 제인에게 소곤거렸다.
“제인. 나 지금 제대로 막말하고 있어?”
“……예, 상당히.”
“그래? 다행이다.”
평소에 어떻게 말하시는 거예요.
제인이 희미하게 앓는 소리를 흘렸다. 미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 뒤 다시 베버 남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다시 봐도 더러워…….”
“……큭.”
자존심이 구겨진 베버 남작은 사납게 미아를 노려보며 한 걸음 나섰다.
‘그래 봐야 여자지. 위협 좀 해 주면……’
하지만 미아는 시큰둥했다.
“너 뭐해? 너 어깨도 좁고 몸도 별로라서 하찮아 보이기만 하니까 그만해.”
눈앞의 분홍 머리 여자는 정말 안쓰럽다는 듯이 말했다. 겁에 질리긴커녕 경멸마저 엿보이는 그 모습에 베버 남작의 팔이 올라갈 듯 말 듯 움찔거렸으나, 미아는 변함이 없었다.
“때릴 거야? 때리든가. 때려 봐. 끝에 가서 웃는 게 너인지 나인지 한번 보자!”
사람도 아니고 하찮은 뭔가를 보는 듯한 눈빛. 그러면서 눈도 깜빡이지 않고 웃는 얼굴.
‘이 미친…….’
어쩐지 그 폭군 옆에 붙어 있더라니, 어지간히 머리가 돈 게 분명했다. 베버 남작이 이를 갈았다.
‘사람만 없으면 당장 패대기를 치는 건데…….’
그러기엔 보는 눈이 너무 많다. 어쩔 수 없다는 듯 베버 남작은 서둘러 외투를 추슬렀다.
“이번엔 그냥 가지만, 폐하의 총애가…….”
“그나저나 넌 이름이 뭐야?”
미아는 베버 남작의 마지막 말마저 무시하고 남작 뒤의 여자에게 물었다.
“이 예의라고는 모르는……!”
“큼.”
베버 남작이 재차 발끈했으나, 제인이 다시 한번 헛기침했다. 그녀의 밤색 눈은 싸늘했다.
‘좋은 말로 할 때 사라져.’
그런 노골적인 시선에 베버 남작은 분노만 머리끝까지 쌓인 채 퇴장했다.
“……이 일은 잊지 않을 것이오!”
“난 너 잊을 거야. 못생겼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