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그래, 뤽 베르주앙. 이제 네가 누구를 건드렸는지 알 거 같아?”
“무무무물론입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알긴 아네.”
아딜로트가 빈정거렸고, 뤽 베르주앙이 입술을 깨물었다.
‘……설마 이 여자가 그 소문이 무성한 셀레스티얼 백작 영애일 줄은 몰랐는데.’
반역자의 딸 주제에 황제의 애완동물로 신분 상승한, 소문의 황후 후보! 분홍색 머리카락이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설마 하면서도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황후 행세를 하고 다닐 줄 알았지, 설마 하녀 옷을 입고 있었을 줄이야.’
황제의 취향이 고약하다던 소문이 사실인 모양이었다.
“그럼 물러가서 내가 어떤 처분을 내릴지 기다리고 있어.”
“……예.”
뤽 베르주앙은 입술을 깨문 채 뒤로 물러났다.
‘수도에서 도망치자!’
후다닥 달려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아딜로트는 그제야 대신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난 얘기 좀 하다 갈 테니까 먼저들 가 있어.”
“폐하, 국정이…….”
“미아. 사람 머리로 공놀이해 볼래?”
“말씀 나누시지요.”
빠르게 태세를 전환한 대신들이 뒤로 물러났다. 어쨌든 그들의 황제는 충성스러운 기사단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자신도 뛰어난 검사였고, 허리춤에 검이 있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정어리 떼처럼 사람들이 빠져나가는 도중이었다.
“누구 씨인지도 모르는 게…….”
무리 중의 누군가가 속삭였다. 즉각 미아의 고개가 돌아갔다.
“지금 너 뭐라고 지껄였어?”
하지만 나서려는 미아를 아딜로트가 가로막았다.
“가자. 시간 없어.”
아딜로트가 그렇게 말하며 미아의 손을 잡았다.
미아는 아딜로트의 손에 끌려가면서도 버럭버럭 외쳤다.
“야, 너 얼굴 봤거든!? 밤길 조심해라!?”
그렇게 두 사람이 정원의 파고라에 다다랐을 때, 그제야 아딜로트는 미아를 놓아주었다.
먼저 입을 연 건 미아였다.
“아딜. 사람들이 떠드는 거, 왜 화를 안 내요?”
“하루이틀도 아닌데 새삼스럽게.”
“아무리 그래도 황제 알기를 너무 우습게 알잖아요!”
미아가 버럭 외쳤으나 아딜로트는 여전히 시큰둥했다.
“한꺼번에 치우려고 놔두는 중이야. 그리고 오늘 유난히 궁에 귀족파가 많았을 뿐이고.”
“싹 다 죽이고 갈아 치우죠, 그냥!”
미아가 엄지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험악한 몸짓에도 아딜로트는 심드렁히 어깨만 으쓱했다.
“다 죽이면 일은 누가 하고.”
“재상님이 하겠죠!”
“요아힘 없다고 막말 한다 너?”
“뭐든 간에! 난 그런 거 별로예요. 제 속이 다 터진다고요!”
아딜로트가 실소를 흘렸다. 미아는 다시 속이 터질 것 같았다.
“어디가 웃긴 거예요? 저는 하나도 안 웃긴데요!”
“신기해서.”
“신기하다고요?”
“그냥, 누가 그런 걸로 날 걱정해 주는 게 신기하잖아.”
다시 입을 열려던 미아가 멈칫했다. 자꾸 마음 짠해지는 말 한다, 얘…….
“그보다.”
울상 짓는 미아를 보고 아딜로트가 화제를 바꿨다. 새빨간 눈이 일순 반짝였다.
“벌 받아야지.”
“……네?”
“여유시간이 20분 정도밖에 없어. 곧 가봐야 해. 벌 주려면 시간이 모자라겠네.”
“……그럼 그냥 가지 꼭 벌을 줘야겠다고요?”
“응.”
“진짜?”
“진짜.”
야 너 그렇게 살지 마라…….
미아가 차마 욕은 하지 못하고 시선만으로 불만을 표출했으나 아딜로트는 태연히 그것을 무시했다.
“벌은…….”
그가 슬쩍 팔짱을 풀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손잡고 있기.”
“네?”
대답 없이, 미아의 눈앞에 손이 불쑥 내밀어졌다. 미아가 연신 두 눈을 깜빡이며 아딜로트의 손과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
차라리 정말 괴롭히는 시늉이라도 할 것이지. 약간은 머쓱해 하며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 모습에 미아는 농담도 칠 수 없었다.
망설이던 미아가 머뭇거리며 아딜로트의 손을 잡았다. 일전에도 분명 잡아 본 적이 있는 손인데, 묘하게 간질간질했다.
‘……뭐야. 괜히 이상하게.’
그 순간 아딜로트가 좀 더 힘을 주었다. 미아의 힘으로는 절대 뺄 수 없을 만큼 강하게.
“…….”
“…….”
“……이게 무슨 벌이야.”
미아가 작게 투덜거렸다. 아딜로트는 의외로 선선히 답했다.
“그냥 뭘 좀 확인해 보고 싶어서.”
“…….”
“뭔지 안 물어봐?”
“안 궁금한데요.”
“안 듣고 싶은 건 아니고?”
미아의 입이 조개처럼 딱 닫혔다. 당황한 얼굴로 침묵하는 그녀를 보며 아딜로트는 낮게 웃었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도망치려 드니까 더 쫓아가고 싶은 거야.”
그의 말이 끝나자, 침묵하는 미아 대신 호응하듯 바람이 불었다. 나뭇잎 스치는 소리 끝에, 미아가 띄엄띄엄 입을 열었다.
“그럼…….”
“…….”
“……안 도망치면…….”
미아가 한 글자, 한 글자, 힘겹게 말했다. 속을 내뱉는 일이 아주 낯선 사람처럼.
“글쎄…….”
아딜로트가 의미 없이 정원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겼다.
그 순간 미아는 자신의 손을 잡은 아딜로트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잡아먹나.”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온 중얼거림이었다.
다시 바람이 불었고,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아딜로트는 딱 20분 동안 미아에게 ‘벌’을 준 뒤, 집무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인적 드문 열주랑 사이를 걸으며 그는 마지막으로 본 미아의 모습을 떠올렸다.
‘나, 나는 할 일이 있어서 이만!’
미아는 대뜸 그렇게 외친 뒤 인사도 듣지 않고 어디론가 뛰어가 버렸다. 얼마나 긴장한 건지, 달려가는 동작이 인형처럼 뻣뻣했다.
아딜로트는 픽 웃고는 팔짱을 낀 채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몇 걸음도 가지 않아 웃음기는 사라지고, 갸름한 얼굴에는 서늘한 냉기가 떠올랐다.
“베일리.”
아딜로트가 작게 속삭이자마자 수풀이 흔들렸다. 검은 그림자가 풀숲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부르셨습니까.
“누굴 말할지는 알겠지.”
―뤽 베르주앙 말씀이십니까.
“그래.”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아딜로트가 말했다.
“처리해.”
―예.
아딜로트는 그대로 물러가라고 손짓하려다가 멈칫했다.
뒤에서 속닥대던 귀족을 상대로 싸움이라도 걸 기세였던 미아가 떠올랐다. 그 이후의 속상해하던 얼굴도 함께.
‘걱정받는 건 좋지만…….’
그런 얼굴을 보고 싶진 않다.
“…….”
생각을 마친 아딜로트가 그림자를 향해 말했다.
“오늘 미아가 따라다닐 때 떠들어 댔던 놈들은 전부 죽여. 그냥 이참에 처리하는 게 낫겠어.”
―존명.
그림자가 흩어지듯 사라졌다. 아딜로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걸음을 옮겼다. 뒤에 남은 것은 폭군이라 불리는 젊은 황제의 그림자뿐이었다.
* * *
황제궁으로 돌아온 미아는 세레니티를 찾아갔다. 세레니티는 볕이 드는 정원에 앉아 수를 놓고 있었다. 엠브라도 함께였다.
“미아 아가씨!”
미아를 발견한 엠브라가 손을 붕붕 흔들었다. 그때마다 초록색 단발머리가 찰랑거렸다.
“딱 맞춰 오셨네요! 제가 새릴 초콜릿을 가져왔어요! 같이 드시죠!”
“미아. 잘 왔어요.”
세레니티도 수바늘을 놓고 미소 지었다. 미아는 종종걸음으로 다가가 그들 옆에 앉았다. 곧 엠브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가씨? 얼굴이 빨개요. 열이 있으세요?”
그녀의 말에 미아가 허둥지둥 손을 내저었다.
“아냐! 그냥! 별일 없었어!”
“폐하를 보러 가신다고 하셨잖아요. 혹시 무슨 문제라도…….”
세레니티가 말하다 말고 얼굴을 굳혔다.
“혹시 미아의 하녀복 차림을 보고 과한 요청을……!”
“아니야!”
미아가 깊게 숨을 내쉬며 자신의 얼굴에 손부채질했다. 그제야 좀 아딜로트 생각이 가시는 듯했다.
“그게 아니라, 앞으로의 일이 걱정돼서 그래.”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귀족들의 태도를 떠올렸다. 전체적으로 오만방자했다. 아딜로트가 너그러운 것을 핑계로 머리끝까지 기어오르고 난리도 아니었다.
미아의 안색이 순식간에 침울해졌다.
“사람들이 아딜한테 피 냄새나 시체 냄새 난다고 비야냥거리더라고…….”
그녀의 말에 엠브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뭘 말씀하시는지 알겠어요. 귀족들을 만나고 오신 모양이죠?”
미아가 고개를 끄덕였고, 엠브라는 혀를 찼다.
“원래 귀족들은 황궁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사람 취급 안 해서 아무 말이나 하거든요. 의료원에 온 귀족들도 그래요.”
“거기서도요?”
“네. 치료받는 동안 떠드는 거죠. 폐하가 어떠네, 요즘 누가 어떠네.”
“아…….”
“저번에도 폐하의 평판에 대해 물으셨죠, 미아 님?”
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엠브라는 씩 웃으며 미아의 입에 초콜릿을 넣어 주었다.
“폐하께선 선정을 펼치고 계시지만, 그건 잘 드러나지 않고 있죠. 게다가 정책이 워낙에 평민 친화적이라, 반감을 갖고 있는 귀족들도 많아요.”
“그리고 워낙에…….”
세레니티가 말을 받았으나 더 말하기를 멈췄다. 세 사람이 동시에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가차 없으시니까요, 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
아딜로트 겐첸 슈뢰더는 황권에 반기를 드는 자에게 자비를 베푼 적이 없었다.
정확히는, ‘공식적으로’ 반기를 든 사람들을.
그래서 다들 시키면 하고, 명령은 듣고, 다만 뒤에서 꿍얼거리기만 하는 거다. 정말로 나섰다간 칼 맞으니까.
그걸 다 일일이 잡고 억누르면, 오히려 어디서 어떻게 터져 나올지 모른다.
“알지만…….”
시무룩해진 미아가 말끝을 흐렸다.
“미아. 사람들은 그냥 두려워할 뿐이에요.”
수틀을 집어넣으며 세레니티는 부드럽게 말했다.
“하지만 난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딜이 얼마나 착한데.”
엠브라는 자기 주군이지만 그 말에는 약간 동의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세레니티의 얼굴에 다정한 미소가 떠올랐다.
“조금만 기다리면 사람들도 알게 될 거예요. 폐하의 치세는 아직 4년밖에 되지 않았잖아요.”
“그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