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그 와중에도 그걸 굳이 깨물어 보고 있는 미아를 보고 페르디안은 저도 모르게 실소를 흘렸다. 그리고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의 손은 어느새 미아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
“…….”
페르디안은 1초 뒤에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 굳었다. 큰 실수였다. 성인 여성의 머리를 함부로 쓰다듬다니. 상대가 성희롱으로 느껴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페르디안의 생각과 달리, 미아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뭐지. 개 키우나?’
개 키우는 사람은 쓰다듬는 게 습관이라던데.
미아가 싫은 기색 하나 없이 눈만 깜빡이자, 페르디안은 망설이는 듯하면서도 좀 더 미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미안하군.”
그리고 조금 뒤, 복잡해 보이는 얼굴로 손을 떼어 냈다.
“다 쓰다듬어 놓고요?”
“…….”
“농담이에요!”
미아가 하녀용 헤드드레스를 고쳐 쓰며 씩 웃었다.
“대신 다음에 소원 하나 들어주시기!”
가지런한 흰 치아가 드러나는 환한 웃음이었다.
“……그러지.”
페르디안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아는 신나는 얼굴로 페르디안의 주변을 폴짝폴짝 맴돌다가, 다시 임무를 수행해야겠다며 손을 흔들고서 떠나갔다.
“…….”
미아가 떠난 이후, 페르디안은 말없이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다 불현듯 걸음을 멈추고,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부드러운 분홍색 머리카락의 감촉이 손가락 사이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
한참을 그대로 서 있던 페르디안은, 주먹을 쥐고서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 * *
페르디안은 다른 좋은 정보도 알려 주고 갔다. 바로 아딜로트가 일하는 모습을 어디서 몰래 지켜볼 수 있는지 말이다.
‘물론 폐하께선……, 아니. 내키는 대로 돌아다녀 보도록.’
‘좋아! 후작이 그러라고 했으니까 이제 뭘 해도 합법이야!’
무슨 일이 생기면 페르디안에게 누명을 씌우고 도망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미아는 은밀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무실 안쪽은 당연하지만 미아가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러므로 아딜로트가 이동하는 복도를 노리기로 했다.
올리버를 통해 시간을 미리 파악한 덕에, 얼마 안 가 아딜로트가 정무실을 나왔다. 미아는 창문을 닦는 하녀인 척 하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폐하. 이나자르크바흐 변경백에게 국경을 지키도록…….”
“아니, 그는 수도로 불러들인다.”
“폐하. 동부에 파견된 키르히 재상의 판단은 도를 넘었습니다. 생 드나르 제도의 야만인들은…….”
“또 전쟁인가? 그대들 전쟁 참 좋아하는군. 직접 할 거 아니면 그만 말해.”
그는 고위 귀족 십수 명과 시종들을 뒤에 이끌고, 그야말로 황제처럼 오만하고 나른하게 걷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미아는 새삼 감탄했다.
‘이렇게 보니까 새삼스럽게 남주라는 게 실감이 나네.’
진줏빛 은발도, 둥근 루비 같은 붉은 눈도 아름다웠다. 아딜로트 혼자만 있을 땐 ‘와, 엄청 잘생겼다.’ 수준이었다면, 남들과 같이 있으면 ‘같은 인간 맞나?’가 되는 것이다.
미아는 최대한 몸을 숨긴 채 아딜로트와 12인의 무말랭이가 지나가는 것을 관찰했다.
“…….”
그때였다. 아주 잠깐 아딜로트가 걸음을 멈춘 것도 같았다. 그러나 착각이었는지 그의 발이 다시 움직였다.
“폐하…….”
“기각.”
몇몇 안건을 단칼에 잘라 내는 아딜로트의 모습에 귀족 몇 명이 더는 그를 따르지 않고 떨어져 나왔다. 그리고 뒤에서, 절대 안 들릴 수 없는 목소리로 비야냥거렸다.
“하. 출신이 더러워서 그런지 말이 안 통하네.”
그 말을 들은 미아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이게 뭐지? 설마 아딜한테 하는 소리야?’
그녀가 약간의 분노를 느끼며 몸을 돌렸다. 아딜로트가 빨리 저 건방진 무말랭이들을 쓱싹하길 바라며.
하지만, 아딜로트는 그러지 않았다. 태연했다. 그는 그 모든 말이 들리지 않는 듯이 시큰둥했다.
그리고 그저 황제가 입는 멋스러운 코트를 어깨에 걸친 채, 팔짱을 끼고 느긋이 걷기만 했다.
하찮은 것들의 말소리에 일일이 반응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
귀족들의 투덜거림은 이내 잦아들었다. 미아는 복잡한 기분으로 그 뒤를 따랐다.
이후는 앞서 있던 일의 반복이었다.
아딜로트가 지나갈 때, 앞에서는 굽신대던 사람이 뒤에서는 인상을 썼다. 아딜로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지만, 반대로 미아의 입안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사람 좀 죽인 걸로 황제 자리에 오르다니, 세상이 어찌 되려고…….”
그리고 어느 귀족 한 명이 그렇게 중얼거린 순간.
“이것들이 진짜……!”
더는 참지 못하고 나서려는 미아의 어깨를 누군가 잡아챘다.
“안녕하신가, 귀여운 아가씨?”
“뭐야 이 정신 나간 인사말은…….”
미아가 반사적으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눈앞에는 촌스러운 옷을 입은 중년 남자가 얼굴을 굳히고 있었다.
“지금 내게 정신 나갔다고 한 게냐?”
“됐고 왜요?”
미아는 웃음기 하나 없이 짜증스럽게 답했다. 평소대로라면 웃으며 빠져나왔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그 말에 중년 남자가 충격받은 듯이 눈을 부릅떴다.
“혼자 외로워 보여서 말 걸어 줬더니 이게 감히……!”
“외로운 건 너겠지. 집에 가서 혼자 발 씻고 잠이나 자.”
“이, 이게 정말 미쳤……!”
“헉. 이동하잖아!”
미아는 뒤에서 왁왁대는 중년 귀족을 무시하고 아딜로트의 뒤꽁무니를 쫓아 내달렸다.
‘별 거지 같은 놈 때문에 놓칠 뻔했네!’
그렇게 미아가 다시 통유리로 된 정원의 만찬실 안에서 대신들과 식사하는 아딜로트를 감시하고 있을 때였다.
“아름다운 아가씨, 여기서 뭘 찾고 있지?”
짜증난다…….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미아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참았다.
‘이번이 몇 번째야, 대체!’
하지만 미아는 마음속 깊은 곳의 사랑과 박애를 끌어모아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일단 그쪽은 제가 찾고 있는 분이 아니신 듯한데, 무슨 일이세요?”
“그쪽? 당돌한 호칭이군. 마음에 들었어.”
그렇게 말한 남자는 상태가 심각한 이목구비를 가진 젊은 남자였다. 아딜로트를 보다가 눈앞의 남자를 보니 차원이 두 단계 낮아진 느낌이 들 정도였다.
너무 충격적인 외모 차이에 미아가 약간 비틀거렸다. 그러자 남자가 득달같이 미아의 어깨를 붙잡았다.
“오, 아름다운 아가씨! 이 뤽 베르주앙의 기개에 정신이 아찔해진 모양이지?”
“끔찍해…….”
미아가 부지불식간에 중얼거렸다. 남자는 그걸 듣고도 다른 생각을 했는지 한 톤 높아진 음성으로 말했다.
“오! 무엇이 그리 끔찍하지? 하지만 안심하도록. 그 어떤 악몽이든 이 뤽 베르주앙에게 걸리면 아무 힘도 쓰지 못할 테니!”
그렇게 말하며 남자의 손이 스르르 미아의 허리로 내려갔다. 척추에서부터 소름이 돋았다.
“미, 미친놈!”
미아가 비명을 내지르며 남자를 미쳤다. 그 바람에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물건 하나가 땡그랑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본 남자가 소스라치게 놀라 외쳤다.
“이건 키토 후작의 신분패……!?”
“……!?”
미아도 덩달아 놀랐다.
‘그냥 가문 문장이 아니었어?’
남자가 질겁해 뒷걸음질 쳤다.
“설마 키토 후작이 하녀와 정을 통하고 있었던 건가……?”
아. 이건 좀 곤란하다.
“그런 게 아니라……!”
미아가 서둘러 변명하기 위해 입을 열 때였다.
“흠.”
심드렁한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가로질렀다. 키토 후작의 신분패를 주워 든 것은 미아도, 남자도 아니었다.
“페르가 줬어?”
언제 만찬실에서 나왔는지 아딜로트가 신분패를 들고서 앞뒤를 살피고 있었다. 그 뒤로는 대귀족들과 수행원들이 가득했다.
“폐, 폐하!”
뤽 어쩌고 하는 남자가 잽싸게 엎드렸다. 그리고 아직도 몸을 조아리지 않은 건방진 하녀를 흘끗거렸다. 미친 건가?
하지만 미아는 약간 울상을 지은 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폐하…….”
“뺏지는 않았을 테고.”
“제가 어떻게 페르 님한테서 그런 걸 뺏어요? 그냥 시비 걸렸을 때 쓰라고 하면서 주셨어요.”
미아의 투덜거림을 들은 아딜로트가 흐응, 하고 감탄사를 흘렸다.
“그래?”
그리고 묘하게 서늘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이내 그는 그것을 다시 미아에게 돌려주었다.
“잃어버리지만 말고.”
미아가 신분패를 챙기며 입술을 삐죽였다.
“폐하는 제가 애인 줄 아세요?”
“아니면 내 걸 줄까?”
“네?”
“그리고 왜 자꾸 폐하라고 해?”
아딜로트가 미아에게 약간 고개를 숙이고서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섭섭하네.”
……내 심장!
미아가 속으로 단말마를 내질렀다. 그러나 곧 침착하게 마음을 다잡았다.
‘맞다. 내가 아딜로트의 방패잖아. 연인 같은 분위기를 연출해야 하는 거지?’
다음 순간, 미아가 수줍게 웃으며 아딜로트의 옷자락을 꼭 쥐었다.
“그럼 저는 아딜을 섭섭하게 만들었으니, 이따 혼나나요……?”
애교가 담뿍 배어 있는 목소리에 순간이지만 아딜로트가 약간 덜걱거렸다. 바닥에 엎어져 있던 뤽 베르주앙과, 뒤에 도열해 있던 귀족들도 동시에 멍한 표정을 지었다.
“……혼? 나고? 싶어?”
뒤통수를 한 대 맞은 얼굴로 아딜로트가 입을 열었다. 이상한 곳에 물음표가 들어간 말에도 미아는 애교 있게 웃었다.
“아딜이 하는 건 다 좋죠! 뽀뽀면 더 좋겠는데!”
아. 뽀뽀…….
아딜로트가 멍하니 눈을 흐렸다.
“너……. 너야말로 진짜 어디 가서 그렇게…….”
“네?”
“……아니다.”
아딜로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깊게 한숨을 쉰 뒤, 여태 바닥에 절하고 있던 남자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래서 넌 뭐야?”
“뤼, 뤽 베르주앙입니다, 폐하!”
갑자기 화살이 자신에게로 날아오자 뤽 베르주앙이 눈치 빠르게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