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아딜. 근데 내가 절대 도망치려던 건 아니고……. 그렇다고 망명 시도하려던 것도 아니고……. 누구한테 아딜 얘기도 안 했고……. 진짜 그냥 놀러 갔던 거야.”
그 와중에도 그가 너무 걱정되어서 살펴보러 갔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아딜로트라면 그런 걱정 할 필요 없다고 말할 테니까.
하지만, 그게 아딜로트에겐 다르게 들렸다.
‘우리는 같이 놀러 갈 사이는 아니잖아?’
아딜로트의 입술 새로 절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제인에게 듣기로는 듀레인 남작 앞에서는 내 남자니 뭐니 했다던데, 사람을 이렇게 갖고 놀 수는 없는 거였다.
그는 저도 모르게 검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그래서, 재밌었어?”
“…….”
분명 거짓말을 해야 하지만, 바른 대로 고하지 않으면 더 혼날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미아는 슬쩍 눈을 굴렸다.
사람 복장 터지게 하는 선동꾼. 그 와중에 맛있었던 글렌켈란. 율리시즈의 비수 묘기. 그리고 감사 인사…….
‘처음엔 진짜 기분 더러웠는데, 시즈의 진심도 알게 됐고. 소득이 없던 것도 아니고.’
미아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 쪼끔은……?”
“…….”
대답을 들은 아딜로트는 평온한 얼굴로, 검 손잡이를 더 강하게 쥐었다. 그것을 발견한 미아가 헉 하고 입을 가렸다.
‘잠깐, 혹시…… 나 혼자 놀고 와서 삐졌나!?’
크게 엇나간 깨달음이 찾아왔다.
‘아딜은 분명 워크홀릭이었는데!? 이것도 원작하고는 다른 거야!?’
그제야 미아는 자기 혼자만 놀고 돌아왔다는 말을 들었을 때 아딜로트가 얼마나 속상했을지를 생각할 수 있었다.
‘그렇지! 화났겠지! 나도 미로미스 운영할 때 그랬는걸! 남들 다 놀러 나갔을 때 코피 틀어막으면서 예산안 살피고…….’
그랬구나. 너도 놀고 싶었구나!
거기까지 생각한 미아가 눈물을 참으며 외쳤다.
“아딜! 걱정 말아요. 다 끝나면 내가 펑펑 놀게 해 줄게! 수도의 모든 놀 거리를 다 공부해서 코스도 짜 줄게!”
하지만 아딜로트의 시선은 더 삐딱해졌다.
“그 공부는 그 암살자랑 하고?”
잠시 멈칫한 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시즈랑 할게!”
2인 이상 입장 가능한 곳도 있을 테니까 코스 짤 때 도움을 받으면 되지 않나?!
“…….”
그런데 왜 방이 추워진 거 같지.
미아가 주먹을 쥔 채로 식은땀을 흘렸다.
‘내 대답에 문제가 있나?’
하지만 그럴 리 없었다. 자신은 늘 아딜로트를 먼저 생각해서 대답하고 있으니까!
‘에잇! 진심은 통하는 거야! 눈빛 공격!’
미아가 애써 간절한 ‘알아주세요’ 눈빛을 보냈지만, 아딜로트에게 그건 ‘너는 내 세컨드지만 참아 줘’ 정도로만 보였다.
노는 건 시즈인지 뭔지 하는 놈이랑 놀고.
의식주는 황제인 자신에게서 해결하고.
배신감에 치가 떨린다.
그리고 그는 짧은 고민 끝에 이 감정을 없애는 방법은 딱 하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스릉―.
“으아아악!”
아딜로트의 검이 검집에서 빠져나오려는 순간, 미아는 이성보단 본능에 따라 몸을 날렸다.
“왜!? 검은 왜!? 나, 나 죽이려고!?”
미아가 아딜로트의 손을 붙잡은 채 외쳤다.
“네가 아니라 네 새 친구.”
“시즈는 왜! 아딜 얘기는 하나도 안 했다니까!?” (국가 기밀 아무 것도 발설 안 했어!)
“안 했으니까 더 문제란 생각은 안 해 봤고?” (둘이 오붓한 시간 보내야 하니까 내 얘기는 할 틈도 없었단 뜻인가?)
“……? ……!? 했어야 했나!?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않나……!?”
미아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외쳤고, 아딜로트는 칼날 같은 헛웃음을 흘렸다.
“애초에 왜 그렇게 몸을 던져서까지 막는데. 살아남는 게 제일 중요하다며.”
“중요하지만 이건 이성적으로 따졌을 때 말도 안 되는……!”
“아니면 그놈이 그렇게 잘생겼어?”
뭔 소리야.
난데없는 말에 미아가 동작을 멈췄다.
대체 어디서 이런 맥락에 안 맞는 말이 튀어나왔나…… 싶었지만, 아딜로트가 진지해 보여서 미아는 일단 정직하게 답했다.
“음. 못생기진 않았지……. 귀여운 타입? 끼 부리는 게 있어서, 누님들을 공략하기에 좋을 것 같은……. 근데 시즈 몇 살이더라?”
그 순간, 아딜로트가 불안할 정도로 아름답게 눈웃음쳤다.
“잠깐만 눈 감고 있어.”
그리고 다시 검을 뽑으려 들었다.
“으아앙! 안 감을 건데!? 안 감을 거야!”
미아는 이제 아예 아딜로트의 몸통을 붙잡고 늘어졌다. 평소엔 그렇게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 왜 갑자기 이런 식으로 나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미아는 일단 되는 대로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다음엔 아딜이랑 갈게! 아딜 데려갈게! 술 마실 때 부를게! 그리고 아딜이 더 잘생겼고 옴므 파탈이고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드시는 우주 최고 신랑감이고 내 남편 잘 하게 생겼고……!”
그리고 그 아무 말의 끝자락을 들은 아딜로트는 멈칫했다.
“……약속한 거야.”
붉은 눈이 미아를 향했다. 여전히 온기는 없었지만, 그래도 무감정하지는 않았다. 약간은 심통난 듯 보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대체 왜!?’
억울하기 짝이 없었지만 상대는 황제였다. 미아가 냅다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약속!”
근데 내가 뭐라고 말했더라.
미아가 자기 발언을 되새김질하는 동안, 아딜로트는 미아를 떼어 내고 그녀를 소파에 앉혔다.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이윽고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내 쪽이 퍼스트지.’
‘혼자 놀지도 못 한다니 애완동물 팔자가 이게 뭐야!’
* * *
다음 날.
하녀복을 입은 미아가 알 없는 안경테를 치켜 올렸다.
“좋아! 가 볼까!”
오늘의 목표는 궁내의 분위기를 살피는 것이었다.
‘어제 그렇게 혼나긴 했지만, 여긴 궁 안이니까!’
게다가 궁 밖의 사정을 알고 나니 더 걱정이 커졌다. 평민들 사이의 소문이 그 모양인데, 귀족들이 멀쩡하게 아딜로트를 대우해 줄 것 같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황제의 애완동물이 주변을 들쑤시고 다닌다는 소문이 나면 곤란했다.
그래서 미아는 율리시즈를 통해 하녀복을 구해 입었다. 확실히 율리시즈가 있으니 전처럼 일일이 지로티 공작이나 제인을 찾을 필요가 없어 편했다.
다만 걱정되는 건 세레니티의 반응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세레니티는 하녀복을 입은 미아를 보자마자 몹시 너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요, 미아……. 폐하랑 장난치는 거죠? 저는 다 이해해요…….’
세레니티, 대체 어디까지 망상이 폭주할 생각인 걸까?
하지만 미아는 그녀의 오해를 고쳐 주지 않았다. 어차피 온갖 오해를 다 받고 있으니 고쳐 봤자 의미가 없었다.
어쨌든 세레니티는 둘만의 앙큼한 장난에 끼어들 생각이 없다며 황립 의료원으로 가 버렸다.
덕분에 미아는 맘 편히 주변을 살피러 나설 수 있었다.
‘좋아. 안경도 구해 썼겠다! 아무도 모를걸!’
중앙궁은 황제궁과 달리 모두에게 개방되어 있어 오가는 사람들이 많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어디 염탐을 시작해 볼까!”
“뭐하는 거지?”
“허억.”
미아의 자신감은 5초 만에 박살 났다.
기둥 구석에 숨어 있던 미아의 등 뒤에 어느새 페르디안이 서 있었다.
“뭐하는 거냐고 물었다.”
짙푸른 제복에 허리에는 장검.
긴 흑발을 단정하게 묶은 모습까지.
정탐 도중에 볼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런 상황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당황한 미아가 물었다.
“어, 어떻게……?”
“그럼 그런 수상한 동태를 못 알아볼 거라고 생각했나?”
“저 수상해요……?”
“하녀는 기둥 뒤에 숨지 않는다.”
아뿔싸. 재빠르게 기둥에서 나온 미아가 허리를 세웠다. 그리고 도도하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세 번째로 묻지. 뭐 하는 거지?”
그냥 보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미아의 어깨가 축 처졌다.
“그냥 폐하 주변을 살피려고요…….”
“이유는?”
아딜이 얼마나 개차반인 상황에 있는지 보려고…….
“폐하의 눈부신 용태와 통치자의 귀감이 되는 훌륭한 모습을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습니다.”
“거짓말이라는 건 잘 알겠군.”
“알면 모르는 척 해 주시는 게 기사의 미덕이 아닐지……?”
“폐하의 주변을 맴도는 수상한 자를 잡아내는 것이야말로 기사의 미덕이지.”
“와! 그거 엄청 섭섭……!”
미아가 억울한 얼굴로 고개를 쳐들었다.
하지만 올려다본 페르디안의 얼굴은 약간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다.
‘아. 농담한 거구나.’
원래 농담도 하는 애였나?
미아가 멍하니 생각했다.
그사이 페르디안은 언제 미소를 보였냐는 듯이 다시 차가운 얼굴로 되돌아와 있었다.
“아직 네 이름만 알고, 네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르는 자들이 많다.”
“눈에 안 띄게 다닐 거니까 괜찮은데요!”
“눈에 안 띌 거라고 생각하나?”
“제가 그렇게 눈에 띄는 외모는 아닌데요!”
“그건.”
페르디안이 말하다 말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가? 와 아닌데? 가 반씩 섞인 듯한 얼굴이었다.
“페르 님?”
“……아니. 생각 외로 자신감이 부족하군.”
“현실을 냉철하게 분석한다고 해 주시죠!”
미아가 엄지로 자신을 가리키며 당당히 말했다. 그 자신만만한 미소에 페르디안이 실소했다.
그는 곧 품에서 술이 달린 방패형의 물건을 꺼내, 미아에게 건네주었다. 테두리는 백금에, 날개 달린 말이 새겨져 있었다. 비싸 보였다는 뜻이다.
“이건?”
“키토 후작가의 문장이다. 누군가 시비를 걸거든 이걸 보여 줘라.”
“흐음! 후작가 사람이라는 뜻이에요? 이렇게 막 빌려줘도 되는 건가?”
“안 되지.”
“그럼 왜……?”
설마 빌려주고 돈이라도 받을 셈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