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율리시즈가 자연스럽게 미아 옆에 앉았다. 그는 긴 소매로 입을 가린 채 바텐더에게 말했다.
“맥주 하나요…….”
“여긴 왜 왔어?”
율리시즈가 미아의 시선에 수줍게 살짝 웃었다.
“도, 도망치신 줄 알았잖아요…….”
“도망쳐 봐야 잡힐 텐데 설마 도망칠까!”
“황궁에선 어떻게 나오신 거예요……?”
미아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했다. 말하기 싫다는 의미였다. 율리시즈가 키득거리며 바텐더에게서 맥주잔을 받았다.
“비밀이 참 많으세요……. 그렇죠?”
“비밀은 여자를 여자로 만든다고 누가 그랬는데, 누구더라.”
미아가 중얼거리며 아직 술이 남은 잔을 들어 올렸다. 꼴 보기 싫던 선동꾼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자리를 옮겨 다른 술집으로 갔을 게 뻔했다.
“시즈. 넌 어때?”
“뭐, 뭐가요?”
“아딜로트를 싫어해?”
율리시즈는 혀끝으로 맥주를 살짝 건드리더니, 바로 인상을 찌푸렸다.
“싫어하진 않아요……. 오, 오히려 황제는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많이 펼치고 있어서…….”
“그럼? 좋아?”
“네……? 사람을 그렇게 죽여 대는데 좋을 리가……?”
“맞는 말이긴 한데 암살자가 할 말은 아니다?”
“그, 그러는 미아 님은요…….”
“뭐가?”
“왜, 왜 그 남자를 좋아하세요?”
미아가 다시 어깨를 으쓱하고는 자기 잔을 내려다보았다. 옆자리에 사람이 있어서인지, 이번에는 술이 쉽게 줄어들지 않았다. 율리시즈는 미아의 대답 없이도 말을 이었다.
“별로 돈이나 권력 때문은, 아닌 것 같은데……. 왜 그렇게 위해 줘요?”
“그게 왜 궁금해? 혹시 질투해?”
“으악! 컵이 터졌어!”
“기다려, 닥칠게!”
율리시즈가 날린 비수가 뒤에 앉은 남자의 술잔을 터뜨리자 미아가 재빨리 손을 펼쳐 보였다.
“처음에는 그냥 내가 살기 위해서였는데……, 보다 보니까 안쓰럽잖아.”
그녀가 볼을 조금 부풀린 뒤 투덜대듯 말했다.
“동정인가요?”
“책임감이기도 하고?”
그녀는 원작의 흐름을 바꿨다. 살기 위해서.
덕분에 아딜로트와 세레니티 앞에 놓여 있던 해피 엔딩은 불확실해졌다. 그런데 미아에게는, 그걸 다시 해피 엔딩으로 이끌어 줄 힘이 있었다.
‘아주 어려운 일도 아닌데 무시하려니 찝찝하잖아. 전개가 어떻게 망할지 모르는데…….’
율리시즈는 미아가 생각에 잠긴 걸 보고 침묵했다. 그러곤 조금 뒤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게 황제가 아니었어도 그렇게 했을까요?”
“당연하지.”
율리시즈가 멈칫했고, 미아는 태연하게 위스키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
“나는 이기적이라서 엄청난 희생은 못 해. 나 죽을 거 같으면 도망갈 거야. 하지만 내가 손해 보지 않는 선에서, 도울 수 있는 게 있다면 도울 거야. 다들 그러잖아?”
“…….”
율리시즈의 갈색 눈이 깊어졌다. 볼에 떠올라 있던 홍조 역시 사라진 지 오래였다.
“……과연 그럴까요? 전 아니라고 생각해요…….”
소매로 가려진 얼굴 안쪽의 표정은 어딘지 씁쓸했다.
“셀레스티얼 백작가는, 가문이 부흥하고 나서부터 복지 사업에도 손을 대고……, 주변에 엄청난 기부금을 내기 시작했죠…….”
미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술을 마셨다.
“전……, 전 그 뒤에 미아 님이 있다는 걸 알았어요……. 세레니티 님 말고 그런 사람은, 처음 봤어요…….”
“…….”
“덕분에, 많은 빈민가 아이들이 살았고요…….”
율리시즈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미아와 율리시즈의 시선이 마주쳤다. 율리시즈의 눈빛에 아주 희미하게 따스한 기색이 스쳤다.
‘그래서 나를 찾아온 거였구나.’
뒤늦게 깨달은 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자신을 봐주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은 했었다. 이유를 몰랐을 뿐.
그걸 알게 되니 기분이 묘했다.
‘나도 이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이 세계의 인물이 맞구나.’
할 말을 잃은 미아를 묘한 눈으로 지켜보던 율리시즈가 이내 팔을 들어 자신의 눈을 가렸다.
“벼, 별거 아닌 이야기예요. 그보다 이제 돌아가요…….”
“시즈…….”
“황제가 예정보다 일찍 돌아왔어요. 미아 님을 찾던데…….”
“……미친! 그걸 먼저 말했어야지!”
쾅! 서둘러 술잔을 내려놓은 미아가 재빨리 황궁으로 내달렸다.
* * *
아딜로트는 자신의 침실에 있었다. 문 앞에서 아딜로트의 수석 시종인 올리버가 동정이 가득한 눈으로 미아에게 문을 열어 주었다.
‘……왜! 왜 그렇게 보는데요!’
미아가 비명을 삼키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 아딜……. 저 왔어요……?”
방은 어두웠다. 방을 밝히고 있는 것은 창으로 들이치는 별빛뿐이었다. 창가의 테이블에 걸터앉아 있던 아딜로트가 고개를 들었다.
‘깩.’
붉은 눈이 그야말로 피처럼 빛났다. 그는 아직 옷도 갈아입지 않은 정복 차림이었다. 온갖 술과 장식이 달린 코트를 어깨 위에 걸친 채, 팔짱을 끼고서 미아를 응시하는 것이다.
어마어마한 압박감에 미아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아, 아딜,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나, 난 오늘 늦게 온다길래!”
그때, 아딜로트가 미아의 말을 자르고 물었다.
“도망치고 싶어?”
“아뇨!”
미아가 고함을 내질렀다. 그리고 부랴부랴 반지 낀 손을 내밀었다.
“어, 어차피 이거 있으니까 위치는 알 거라고 생각해서! 또 정말 도망칠 거였으면 벗었을 테고……. 그쵸!?”
“그래. 그것도 두고 나갔으면 당장 기사단을 풀어서 끌고 왔을 거야.”
너무 선선한 대답에 미아는 도리어 식은땀이 흘렀다.
‘차라리 화를 내든가!’
이건 마치 폭풍 직전의 고요 같지 않은가.
‘나…… 인생 조졌나? 꿀 바는 애완동물 인생 끝나나!?’
미아의 생각과 달리 아딜로트의 내면은 평온한 편이었다. 살짝 미친 채로 평온한 것도 평온하다고 할 수 있다면 말이다.
물론 미아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땐 그렇지 못했다.
―미아 님이 궁을 나가셨습니다.
‘뭐?’
―그 암살자의 기척도 같이 사라졌습니다. 죄송합니다. 잠시 감시자를 교체하는 동안 놓친 모양입니다.
미아가, 그것도 예의 신경 쓰이던 인기척과 함께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은 순간.
아딜로트는 순간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반지에 걸린 추적 마법은 유효했다. 그러니 아직 이어져 있었고, 미아도 그를 알고 있을 테니 도망은 아닌 게 확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 분 일 초가 영원 같았다. 온갖 생각이 머릿속에서 뒤죽박죽으로 엉켰다.
‘정말로 도망간 거면?’
‘내가 짐작도 못 할 방법으로 감시를 피해 달아난 거면?’
‘뭐가 부족해서?’
‘바로 기사단을 푸는 게 나았을까?’
거기까지 생각한 그는 칼날 같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고작 집 나간 애완동물을 찾겠다고 기사단을 풀 생각을 하다니.
내가 미쳤구나.
미친 걸 인정하니 다음은 오히려 쉬웠다.
일단은 기다렸다.
그리고 기다려도 미아가 오지 않으면, 사람들이 말하는 ‘미친 황제’가 뭔지 정말로 보여 줄 생각이었다.
“…….”
하지만 어쨌든 미아는 돌아와, 그의 눈앞에 있었다. 아딜로트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제 발 저린 미아는 땀을 뻘뻘 흘리며 손을 내저었다.
“저, 저기, 저 정말 얌전히 놀다 오기만 했고, 안 돌아올 생각도 없었고…….”
“그래?”
“네! 당연하죠! 내가 갈 데가 어디 있다고…….”
“그럼 갈 데가 있으면 가겠단 건가?”
“그, 그런 뜻이 아니라! 내 말은! 그러니까, 잠깐 기분 전환만 할 생각이었는데……!”
미아는 말까지 더듬으며 울상을 지었다. 다급한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아딜로트는 가만히 턱을 괴었다.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땐 늘 태연하고 당찬 데다 어디 가서 지고 올 것 같지도 않은데, 미아는 유독 자신에게는 약했다.
분명 다른 사람이 이런 식으로 추궁했다면 “내가 놀려고 나갔다는데 니가 어쩔 건데?”하고 천연덕스럽게 말했을 게 뻔했다.
“…….”
그리 생각하니, 기분이 풀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 암살자는, 뭐, 호위도 겸하는 것 같았으니…….’
아딜로트는 나직하게 한숨을 쉬고서 몸을 일으켰다.
“됐어. 대신 다음부턴 말하고…….”
그리고 미아에게 다가가려던 순간.
코를 찌르는 냄새에 아딜로트가 멈칫했다.
“너 술 마셨어?”
“깩.”
미아가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마셨다는 걸 잊었어!’
조금 풀어졌던 아딜로트의 얼굴이 싹 굳었다. 미아는 그의 섬세한 얼굴에 희미한 잔인성이 떠오르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논다는 게 술 마시는 거였어?”
“그, 그게…….”
“그것도 굳이 밖에서, 밤에?”
“시, 시간은 그러니까 의도치 않았고……, 그리고…….”
“수도가 얼마나 위험한 줄은 알아?”
“그치만 시즈도 같이 마셨……, 헙.”
“아. 같이 마셨어?”
X발…….
자충수도 이런 자충수가 없었다. 미아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술은 그냥 어쩌다…….”
“그것도 꽤 독한 술 같은데.”
“도, 독하긴요!? 그, 그냥 물 같은……!”
“술을 물처럼 마셨다?”
“그 정도까진 아니었……!”
반박하려던 미아의 머릿속에 자신이 마신 술병의 개수가 떠올랐다.
“……던 건 아니지만…….”
너무 서늘한 기백에 거짓말도 못 한 채, 미아는 입술만 깨물었다.
‘아니 그런데 내가 대체 왜 눈치를 봐야 해!?’
……같은 오기도 잠깐 들었지만, 앞에 있는 아딜로트의 허리춤에 있는 칼을 보곤 반항할 마음을 접었다.
‘응. 뭐든 간에 칼 든 사람 말이 다 옳지.’
게다가 어쨌든 미아는 황제의 소속이었다. 그것도 국가 기밀을 꽤 많이 알고 있는. 아딜로트 입장에서는 신경 쓰일 수밖에 없으리라.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자신의 행동을 검토한 미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