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때마침 율리시즈도 보고를 위해 황태후에게 가 있었다. 세레니티는 의료원 일손을 돕는 중이었고, 아딜로트 역시 늦는다고 했다.
오늘이 제격이었다.
‘어디 보자. 예전에 꿍쳐 놓은 게…….’
미아는 어렵게 구한 낡은 후드를 뒤집어쓴 채 이동했다.
황제궁 2층 구석, 창고로 쓰는 방.
정면에는 여전히 푸른 옷의 귀부인 초상화가 크게 걸려 있었다.
미아가 지로티 공작의 행동을 떠올렸다.
‘푸른 옷, 녹색 옷, 검은 옷…….’
미아가 지로티 공작이 알려 준 순서대로 초상화 귀퉁이를 기울이자, 태엽 소리가 났다. 이윽고 거대한 천사 그림이 걸린 벽이 스르르 움직였다.
곧 벽이 가리고 있던 검은 통로가 빠끔 입을 벌렸다. 발목에 닿는 냉기를 느낀 미아는 옷자락을 꽉 쥐었다.
‘이런 건 아예 원작에 없었었지.’
어찌 보면 지금 처음으로 제대로 원작을 비껴 나가는 중이라 할 수 있었다.
긴장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손가락의 루비 반지를 쓸며 미아가 아딜로트를 떠올렸다. 이윽고 자신을 다잡은 미아는 어두운 계단을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 * *
계단 아래쪽에는 친절하게 마법으로 된 횃불이 있었다. 미아는 그것을 들고서 한참을 걸었다. 좁은 길이었지만, 다행히 잘 닦여 있었다.
계단 없는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을 오래 걷고 나서야, 다시 계단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끝에, 여기가 종점이라고 말하듯이 작게 빛나는 말 편자 모양의 걸이가 보였다.
‘여기에 거는 건가.’
횃불을 걸기 전, 미아는 벽에 귀를 가져다 댔다.
“잭슨! 농땡이 그만 피우고 내려와!”
“간다, 가!”
벽 너머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미아는 소리가 없어질 때까지 기다리다가, 걸이에 횃불을 걸었다. 들어왔을 때처럼 벽이 어슷하게 열리더니 통로가 생겨났다.
미아가 재빨리 사이로 빠져나왔다. 아래쪽에서는 시끄러운 말소리가 들렸다.
‘술집의 2층인가?’
보통 비밀계단은 지하랑 이어져 있기 마련인데. 신기한 구조였다. 미아가 계단에서 빠져나오자 벽이 다시 스르르 닫혔다. 통로는 감쪽같이 없어졌다.
벽에 걸린 초상화들은 모두 황제궁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돌아올 때도 문제없겠네.’
미아는 그런 생각을 하며 아래로 내려갔다. 계단을 찾아 아래로 내려가자마자, 왁자지껄한 소음이 가장 먼저 밀려들었다.
꽤 큰 술집이라서인지 소리가 웅웅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모두 신나서 뭔가를 떠들고 있었다.
미아가 후드를 더 깊게 눌러쓰고서, 바 앞에 자리를 잡았다.
“글렌켈란. 스트레이트로 하나.”
미리 준비해 간 동전을 내밀었다. 바텐더는 잠깐 미아를 흘끗거렸을 뿐, 바로 위스키 잔을 내어주었다.
미아는 가만히 주변의 소음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쓸모없는 내용만 들렸으나, 금세 미아가 원하던 화제가 귓가에 잡혔다.
“황제는 요즘 뭐한대?”
“여자한테 홀딱 빠져서 바쁘다던데?”
“…….”
아딜, 미안…….
양심이 찔린 미아가 허허 웃으며 위스키를 머금었다.
“그래도 여색에 빠져서 사람은 안 죽이니 다행이야.”
“그러게. 황제로 즉위하자마자 귀족을 목을 싹 쳐 버릴 땐 오금이 다 저렸지.”
“그게 사람이냐, 정말? 쯧.”
이어진 말에 울컥한 미아가 저도 모르게 잔을 꽉 쥐었다.
그들이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아딜로트가 황제에 즉위하고 죽인 귀족들은 전부 나쁜 놈들이었다.
문제는 그걸 말을 안 했다는 거다.
‘아딜 바보!’
미아가 위스키를 단번에 들이켠 뒤, 잔을 탕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한 잔 더! 같은 걸로!”
괜히 화가 났다. 기껏 열심히 조사해서, 죽이고, 기록만 해 놓아도 의미가 없었다. 백성들은 아무것도 듣지 못했으니까.
‘내가 얘를 이러저러해서 죽였다! 얘가 이렇게 나쁜 새끼다! 왜 말을 못 해!’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아딜로트는 그렇게 무자비하지 않았다.
게다가, 나쁜 짓을 한 자들에게 항상 한 번 이상은 기회를 주었다. 반성하고, 새사람이 될 수 있게 말이다.
대부분은 그걸 걷어찼다. 아딜로트는 그런 사람들에게까지 자비를 베풀진 않았다.
그는 황제니까.
의지할 사람 없이 자랐기 때문인지, 아딜로트는 과하게 독립적이었다. 남에게 상담하지 않는다. 행동의 이유를 설명하지도 않는다.
남들 눈에는 그게 오만으로 비치겠지만, 미아의 눈에는 달랐다.
‘말할 필요성을 못 느끼는 거야. 어차피 혼자 모든 걸 해야 했으니까…….’
그래서 아딜로트는 고고하다. 그리고 고고한 것들은, 괜히 꺾어 보고 싶어지기 마련이다.
‘아딜은 너무 선전이 부족해!’
미아가 다시 나온 위스키를 재차 한 번에 들이켰다.
“한 잔 더!”
동전 하나가 더 테이블 위에 올라왔다. 바텐더는 슬슬 질린 표정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술은 다시 내어주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튜린은 아이를 가졌다더라?”
“들었어. 아이를 낳으면 혜택이 좋다며.”
“전쟁이나 수탈이 없으니 팔자도 폈고, 슬슬 다 정착할 시기 아니겠어?”
“하기야 옛날보다 살기 좋아지긴 했어…….”
그 말에 미아가 안심했다.
‘그래도 백성들이 살기에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는구나. 다행이야…….’
미아가 헤헤 웃었다. 그때였다.
“그래 봐야 살인자 새끼지.”
살얼음 같은 비난이 공기를 갈랐다. 술집 구석에서 덩치 큰 남자가 거들먹거리듯이 말했다.
“황제가 사람을 얼마나 죽였는데? 벨뷰트 자작가가 하루아침에 참수당한 거 기억 안 나? 그분이 얼마나 좋은 분이었는데!”
“그런 일이 있긴 했지……?”
“어휴, 역시 황제는 무서워.”
“한 잔 더!!”
미아가 분노 섞인 고함을 내질렀다. 바텐더는 이제 감탄이 섞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알 바 아니었다. 그야말로 술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벨뷰트 그거! 뒤로 백성들이나 수탈하던 새끼인데!’
그때, 남자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돌아가신 태자님이 황제가 됐으면 좀 달랐을 텐데…….”
미아의 눈초리가 순식간에 예리해졌다.
‘일반 백성이 아니야. 귀족파에서 고용한 사람이구나.’
보통 사람이라면, 아딜로트가 황제가 된 지 한참도 지난 지금 클라우디오를 언급할 이유가 없었다.
미아는 남자를 노려보지 않기 위해 위스키 잔을 꽉 쥐었다.
“게다가 솔직히 선황제 폐하는 이미 돌아가셨잖아? 지금 황제가 진짜로 선황제 폐하의 핏줄일지는 어떻게 알아?”
“이봐. 그건 좀…….”
“아니, 들어보란 말야. 레아 황비가 사실은 젠타리아 출신인 자기 호위 기사랑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는 소문도 있었잖아. 알지?”
“그야 그렇지만…….”
“진짜 그런 사이였으니 선황제 폐하가 교수형 시킨 거 아니었겠어?”
“험…….”
“또 모르지! 우리 폐하가 알고 보니 오르퀘니나 핏줄은 하나도 안 섞였을지도.”
“한 잔 더! 아니, 그냥 병으로 가져와!”
미아가 금화를 카운터 위에 쏟아부었다.
사람들이 슬슬 저 여자는 뭔데 저렇게 술을 찾나 하는 시선을 보냈지만, 아랑곳하지도 않았다. 지금 미아는 속이 드글드글 끓는 중이었다.
‘이렇게까지 야비하게 나온다 이거야?’
선황제 루드비히와 레아 황비는 갈수록 사이가 안 좋아지긴 했다. 전부 크리소르의 이간질 때문이었다.
내용은 저 바람잡이가 말한 대로, 레아 황비가 사실은 부덕하다는 것이었다. 자민족에 대한 자부심이 큰 오르퀘니나의 특성상 이는 굉장히 치명적인 추문이었다.
하지만 레아 황비는 현명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언젠가 자신과 아딜로트에게 그런 일이 생길 줄 알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받아놓았다.
공증을.
아딜로트가 선황제 루드비히의 친아들이자, 황가 슈뢰더의 적통이라는 사실을, 대신관의 인증까지 받아서 말이다.
그리고 이를 백성들도 소문으로 들어 알고는 있는 상태였다. 주정뱅이들 중 한 명이 손을 들어 말했다.
“그렇지만 대신관이 인정했다고도 하던데…….”
그 말에 바람잡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손뼉을 쳤다.
“증거가 없잖아, 증거가! 그놈의 공증 서류는 있다고만 하고 밝혀지진 않는구만! 그리고 정말 선황제 폐하의 핏줄이 맞으면 다시 신전을 통해 인증을 받았겠지. 그걸 안 하는 걸 보면, 보나마나 적통이 아니라서 아니겠어?”
“한 병 더.”
미아는 이제 바텐더의 경외 어린 시선을 받으며 병을 손에 쥐었다.
크리소르도 그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레아 황비를 잡아들인 날, 그녀의 궁을 쥐 잡듯이 뒤졌으나 서류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공증은 지금 세크레 호수 바닥에 있지.’
세크레 호수에 빠졌던 야유회 날.
호수 바닥에서 보았던 반짝이는 것.
그게 아마 대신관의 공증 서류를 담은 상자일 것이다.
레아 황비에게 사변이 있던 날, 그녀는 크리소르가 그것을 찾지 못하게 시녀를 시켜 빼돌리게 했다.
시녀는 호수 근처까지 갔으나 더는 도망치지 못하리란 것을 예감하고 상자를 호수에 던졌다.
원작에서는 물에 빠졌던 세레니티가 그것을 발견했다.
미아는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그걸 꺼내 아딜로트는 슈뢰더 황가의 적통이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냐.’
그건 좀 더 결정적인 순간에 드러나야 했다.
더 확실하게 크리소르를 무너뜨릴 수 있는 순간에.
미아가 생각에 잠긴 동안, 주변 사람들은 서서히 바람잡이의 말에 동조하고 있었다. 미아는 한숨과 함께 남은 금화를 바 테이블 위에 올렸다.
“한 잔……!”
그때, 누군가 금화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미아 님. 그만 마시세요…….”
후드를 쓰고 있었지만, 약간 더듬는 말투와 수줍은 목소리는 명백했다. 율리시즈였다. 미아가 놀라 입을 벌렸다.
“시즈?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
“차, 찾으면 금방이죠……. 제 앞마당인데……. 그, 그보다 이거 글렌켈란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