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그 덕에 반역자의 딸을 싸고도는 게 도마에 오르지 않았으니 어찌 보면 다행이었다.
“그럼 이렇게 귀족들이 몰려드는 건, 황제의 애완동물에게 아첨 좀 떨어 보려는 거겠네요!”
“그럴 거다.”
“그래서 그렇게들 보석을 갖다 주나? 폐하께서 제게 특별히 시키신 역할은 없고요?”
페르디안은 망설이다가 한숨과 함께 말했다.
“맘대로 해 보라고 하더군.”
그 말을 들은 미아의 눈이 반짝였다.
“맘대로요?”
“그래. 그리고 청탁을 거절하는 게 어렵다면 방문 자체를 거절해도…….”
“응? 어렵긴요?”
페르디안의 말허리를 자른 미아가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오히려 더 많이 받아야겠다 싶은데! 성심성의껏 부탁도 들어주고!”
“……그걸 들어주겠다고?”
페르디안이 얼굴을 찡그렸다. 약하게 실망감이 비춘 듯도 했다.
하지만 미아는 까르르 웃고서 엄지로 가슴을 척 가리켰다.
“어쨌든 아딜한테 ‘말을 잘 전해 주면’ 되는 거잖아요?”
* * *
그날 저녁.
정무를 마치고 평소보다 이르게 아딜로트는 침실에 들어서자마자 멈칫했다. 기분 나쁜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근래 느껴지던 것으로, 별다른 뜻은 없어 보여 내버려 뒀던 건데 미아 쪽에 붙어 있었다니.
하지만 눈앞에서는 미아가 멀쩡히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황태후가 보낸 줄 알았는데, 오해였나.’
바닥엔 보석이 한가득이었다. 미아는 그 앞에서 분홍색 머리카락을 바닥까지 늘어뜨리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잠시 아딜로트가 멈칫했다.
……토끼 같아.
“뭐해?”
“아! 아딜!”
아딜로트를 발견한 미아가 고개를 돌렸다. 밝다 못해 신나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이거 봐요!”
“이 보석들은 뭐야?”
“글쎄 앉아 보시라니까!”
미아가 아딜로트의 팔을 잡아끌어 옆에 앉혔다.
“집중해서 잘 들어요!”
“응.”
미아는 손가락으로 자기 앞에 놓인 보석들을 가리켰다.
“이 루비 귀걸이는 론도 자작이 줬는데요, 세금이 너무 높대요! 아딜한테 잘 말해 달래요!”
“…….”
난데없는 조세 제도 하소연에 아딜로트가 고개를 갸웃했다. 미아는 거침없이 다음 보석을 가리켰다.
“이 사파이어 반지는 살리카 백작이 준 건데, 시녀 좀 괴롭힌 거 가지고 벌금은 너무 과하대요. 저더러 아딜한테 잘 말해 달래요.”
“……그래?”
“그리고 황궁에서 쫓겨나면 자기한테 오래요. 예뻐해 주겠대요.”
아딜로트의 입가에 삐딱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저거는 오팔인데…….”
미아는 낮에 그녀를 찾아온 귀족들이 한 말을 그대로 읊었다.
‘잘 좀 말해 주십쇼.’
‘잘 말해드릴게요!’
‘이건 약소한 성의입니다.’
‘고맙습니다!’
‘폐하께 얘기 좀 잘…….’
‘해드립니다!’
정말로 ‘그대로’ 말이다. 실제로 이 상황을 귀족들이 본다면 뒷덜미를 잡고 쓰러질지도 모를 광경이었다.
“좋아! 전달 완료!”
선물 받은 것들에 대한 소개를 마친 미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에 손을 얹었다.
그 뿌듯한 얼굴에 그녀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아딜로트가 미아를 올려다보았다.
“그래서 지금 뭐한 거야?”
“아니 글쎄, 저한테 이런 예쁜 걸 주면서 아딜한테 잘 좀 말해 달라잖아요!?”
“그래서.”
“그래서 말 그대로, 잘 좀 말해 달라고 말했다고 말하는 거예요!”
“그러라고 준 보석이었을까?”
“제 알 바일까요?”
미아다운 대답에 아딜로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 제정신 아니야.”
“실례거든요?”
미아가 볼을 부풀리며 눈을 흘겼고, 아딜로트는 픽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엔 더 비싼 거 달라고 해. 들키기 전까지 잘 뽑아먹어.”
그러면서 하는 말에 미아 역시도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말하는 아딜도 영 제정신은 아닌 것 같은데!”
경쾌하고 명랑한 웃음소리에 아딜로트의 입매가 느슨해졌다.
“그래서 듀레인 남작은?”
“왔다 갔어요!”
“그자는 별말 안 해?”
재차 이어지는 아딜로트의 물음에 미아가 멈칫했다.
“아딜. 혹시 세레니티한테 마음 있어요?”
그 순간, 웃옷의 커프스를 풀던 아딜로트가 동작을 멈췄다.
“왜?”
“있으면 제가 방해 안 되게 빨리 물러나 주게요.”
“…….”
정말 우습게도,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름 좋았던 아딜로트의 기분은 그 말을 듣자마자 순식간에 추락했다.
미아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는 게 굉장히, 몹시 기분이 나빴다.
“없다고 말했을 텐데.”
“그래도 세레니티는 엄청 예쁜데.”
“눈만 아파.”
예쁘다는 건 알고는 있군…….
아딜로트가 눈이 없나 의심하고 있던 미아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난 그런 타입 별로 안 좋아해.”
“그럼 무슨 타입 좋아하는데요?”
놀란 듯한 물음에 아딜로트가 잠깐 침묵했다.
“……귀여운 타입.”
그는 또 한 번, 말하자마자 후회했다.
그러나 그 순간, 미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응? 그럴 리가요! 아닐 텐데?”
“……왜?”
“귀여운 걸 좋아하는 거면 저를 좋아했겠죠!”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런데 아니니까!”
내려앉았던 심장이 이번엔 패대기쳐졌다.
“에그, 아딜! 자기 취향도 모르는구나!?”
이번엔 약간 난자당하는 기분이었다.
“…….”
미아는 가끔, 아니 종종 일부러 그러나 싶을 정도로 눈치가 없었다. 아딜로트는 답답함에 한숨을 쉬면서도 화제를 돌리는 쪽을 택했다.
“아무튼, 듀레인 남작의 이야기는 뭐야?”
미아가 손뼉을 짝 치곤 방글방글 웃었다.
“아! 세레니티를 폐하 침실에 넣어 달래요!”
명랑한 말투에 그렇지 못한 내용이었다.
“할 생각은 아닐 테고.”
아딜로트는 동요하지도 않았다. 그도 어느 정도는 미아의 성격에 대해 파악을 끝마친 상태였다. 꽤 냉정하고 호승심이 강하다는 것까지도 말이다.
“당연하죠!”
“그건 다행이네. 그 여자한테도 고역일 테니까.”
“으음. 그야 좋아하지 않는 남자랑 같은 방에서 지내면 고역이긴 하겠죠?”
그렇게 말하며 미아는 고개를 갸웃했고, 아딜로트는 아까 난자당했던 심장이 다시 갑자기 되살아나 펄떡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넌?”
그가 부지불식간에 물었다.
말이 끝나자마자 약속이라도 한 듯이 후회가 밀려들었다. 근래 들어 이런 식으로 되는 대로 뭔가를 내뱉는 일이 너무 잦았다. 주로 미아에 관해서만.
“저요?”
미아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나랑 같이…… 쓰잖아.”
“저야 아딜 좋아하니까 상관없고!”
“…….”
너무나도 확고한 대답에 아딜로트는 저도 모르게 어깨에서 힘을 뺐다.
어떻게 저렇게 명쾌하게 대답할 수 있는 걸까.
아딜로트가 새삼 감탄했다. 그리고 탄식했다.
그녀의 말이 ‘그런’ 의미가 아니란 걸 알면서도 괜히 뭔가를 기대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어쩐지 굉장히 꼴사나웠다.
“어련하시겠어.”
그 이상 대화하면 말하고 후회하는 일이 한 번 더 생길 것 같아, 아딜로트는 웃옷을 벗으며 대화를 차단했다.
“힉.”
맨몸이 훅 드러나자 미아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뒤로 돌아앉았다. 그 탓에 아딜로트는 기분이 아주 조금, 좋아졌다.
“어차피 너 말고 날 좋아해 줄 사람이 세상에 더 있을 것 같지도 않으니, 그런 청탁이 오면 무시해.”
“무슨 말이에요! 아딜이라면 벗고 걷기만 해도 여자들이 줄줄이 사탕처럼…….”
“그래서 나더러 벗고 걸으라고?”
“그건 아니지만, 폐하 몸이 정말……. 씁.”
침 삼키는 소리가 들린 거 같은데. 아딜로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보다, 폐하를 좋아해 줄 사람이 없을 것 같다뇨!”
미아가 뒤늦게 발끈한 듯이 말했다.
“제정신인 사람은 사람 죽이는 게 특기인 황제한테 접근을 안 하니까.”
“그렇다곤 해도! 전에도 그렇고 아딜은 정말이지 맨날 그런 식으로…….”
미아의 말이 잦아들었다. 목소리에는 약간이지만 속상한 기색이 섞여 있었다.
실내용 가운으로 갈아입은 아딜로트가 조용히 미아에게 다가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또 남 일에 화내네.”
“……화 아니거든요.”
미아는 뾰로통한 얼굴이었다.
그녀는 본인이 욕먹는 것에는 눈 하나 깜짝 안 하면서, 자신이 이런 말을 할 때면 놀라울 정도로 시무룩해지곤 했다.
“그리고 아딜이 남인가, 뭐…….”
서운하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소리에 아딜로트의 기분이 다시 좋아졌다. 그는 손을 뻗어, 여전히 혼란스러운 눈을 한 미아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나에 대한 건 됐으니까, 귀족들 청탁이 불편하면 말해.”
“말하면요?”
“죽여 줄게.”
“큰일날 소리를…….”
미아가 볼멘소리하며 볼을 부풀렸다. 아딜로트는 실없이 웃고는 다시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래도 정말로 나를 이용해 먹을 줄은 몰랐는데. 대단하네.”
“히.”
“칭찬 아니거든? 암살자라도 보내면 어쩌려고.”
옷을 다 갈아입은 아딜로트가 소파에 앉았다. 그는 잠시 말이 없다가, 허리춤의 단검을 만지작거렸다.
내내 신경을 거슬리던 게 있었는데, 더는 못 봐 줄 수준이었다.
“지금처럼.”
“헉.”
‘설마?’
미아가 재빨리 아딜로트의 손을 잡았다.
“자, 잠깐만요! 아니에요! 잘못 안 거예요!”
“잘못 알았을 리가. 최근 들어 계속 주변을 맴돌던 게 느껴졌는데.”
“그, 제 친구예요! 치, 친구가 됐어요!”
“친구?”
아딜로트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미아에게 잡힌 손을 내려다보았다.
“네! 그, 저한테 전할 말이 있어서 찾아왔는데, 말해 보니깐 생각보다 좋은 애라!”
“…….”
물끄러미 그녀를 응시하던 아딜로트가 단검에서 손을 떼어 냈다. 그리고 휘감듯 미아와 깍지를 꼈다.
“직업이 특이한 친구네.”
그렇게 말하는 아딜로트의 손가락이 미아의 손바닥 위에 물음표를 그렸다.
‘약점이 잡혔느냐’는 메시지일 것이다. 미아가 멈칫했다.
‘여기서 그렇다고 하는 것도 계약 위반으로 처리되나?’
잠깐 고민했던 미아가 마음을 접었다. 잘 모르면 함부로 나서지 않는 게 낫다.
“그렇긴 한데! 자기한테 잘 맞는 진로를 선택한 모양이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