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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애완동물이 되었다-57화 (57/193)

57화

‘오늘 온 것도 결국 아딜이랑 렌 사이에 다리를 놓아 달라는 청탁이 목적이네.’

미아는 잠시 고민했다.

‘바로 윽박질러서 보낼 수도 있지만, 그러면 재미가 없지.’

그녀가 배시시 웃었다.

“그러니까 폐하가 세레니티에게도 애정을 나눠 주시면 좋겠다는 거죠?”

“그렇다기보다, 세레니티는 미아 님의 벗이 될 수도 있고, 또 그러면 저희 가문의 충심을 보여드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아하! 그럼 제가 어떻게 도와드리면 좋을까요?”

미아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그 모습을 보고 에밀 듀레인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순진해 빠졌네.’

황제에게 ‘예쁨 받아서’ 살아남은 여자다웠다. 조금 귀여운 게 전부일 뿐, 머리에는 든 게 없는 게 뻔히 보였다.

‘뭐, 그 덕에 일이 쉬워지겠군. 세레니티가 황제를 꼬시는 것만 잘하면 되겠어.’

듀레인 남작의 눈이 빛났다.

“정말로 미아 님께서 도와주시겠다면…….”

“다면~?”

덩달아 눈을 반짝이는 미아를 바라보며 듀레인 남작이 목소리를 낮췄다.

“……세레니티를 폐하의 방에 들여보내 주실 수 있으십니까? 필요한 준비는 제가 해 놓을 수 있습니다.”

미아가 멈칫했다.

“준비요?”

“예.”

미아의 태도가 서늘해진 것을 눈치채지 못한 듀레인 남작이 인자하게 미소 지었다.

“혹여나 폐하의 마음을 거절이라도 하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세레니티와 잘 이야기해 볼 생각입니다.”

미아는 그렇게 말하는 듀레인 남작의 표정에서 음험함을 읽어 냈다.

아마 그 ‘이야기’는 주로 듀레인 남작이 세레니티는 압박하는 방식으로 흘러갈 게 분명했다.

‘내가 호구처럼 보이긴 했구나. 이딴 개소리를 코앞에서 하는 걸 보면.’

심호흡하며 분노를 진정시킨 미아는 애써 미소를 유지하며 찻잔을 들었다. 마지막으로 확인할 게 있었다.

“일단 폐하의 뜻도 들어 봐야겠네요! 그런데 그렇다는 건, 세레니티랑은 이야기가 안 된 부분인 거죠?”

그녀의 질문에 듀레인 남작이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아직이긴 하지만―.”

“아하!”

그럼 더는 봐줄 필요가 없었다.

“저한테 좋은 방법이 있어요!”

미아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좋은 방법 말입니까?”

“응, 응! 귀 좀 대 봐요!”

솔깃했는지 듀레인 남작의 눈이 반짝였다. 아닌 척 관심이 잔뜩인 모습이었다.

“흐흠. 그럼 실례지만…….”

“그러니까, 그 방법이 말이죠…….”

미아가 까르르 웃고서 몸을 앞으로 당겼다. 그리고 듀레인 남작의 귀를 붙잡고서 해맑게 속삭였다.

“아저씨가 해!”

* * *

듀레인 남작은 잠시 자기 귀를 의심했다. 살아생전 들어 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잠시만요. 미아 님…….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의 반문에도 미아 셀레스티얼은 달콤한 분홍색 눈을 반짝반짝 빛내기만 했다.

“다시 말해 줘요? 아, 저, 씨, 가, 해!”

그녀는 멍한 자신을 두고 손뼉을 치며 웃었다.

“너무 좋은 방법이다! 아저씨가 하는 거 어때요? 그렇게 좋은 걸 왜 딸 시키려고 그래요! 아저씨가 하자. 응? 아저씨가 하는 거면 내가 도와줄게요!”

조롱이 확실한 말에 에밀 듀레인 남작은 뒤늦게 얼굴을 굳혔다.

‘이 계집애가……!’

아무래도 황제가 너무 오냐오냐 기른 모양이었다. 자신을 보며 까르륵 웃는 모습에는 하찮은 것을 내려다보는 기색이 가득했다.

“싫어요? 충심을 보여 주고 싶다면서요!”

“……폐하께선 남성이십니다! 그리고 작위로 불러 주십시오.”

“아! 미안해요, 아저씨! 내가 애완동물이라 사람 말을 잘 몰라서! 그리고 충심을 보이고 싶다면서요? 그럼 모든 걸 내려놓아야 하는 거 아닌가?”

도를 넘은 모욕에 듀레인 남작이 찻잔을 움켜쥔 순간이었다.

“큼.”

“……!”

인기척도 없이 누군가 목을 가다듬었다.

문 쪽을 바라보니, 황제의 수석 시녀이자 황궁의 총 시녀장인 제인 고트샬크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밤색 눈은 매서웠다. 미아에게 손가락 하나 까딱했다간 바로 황제에게 보고가 올리가리란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결국 억지로 화를 참아야 하는 지경에 이른 듀레인 남작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후우……. 미아 님?”

듀레인 남작이 찡그리듯 웃으며 미아를 노려보았다.

“대화에 제대로 임해 주십시오. 저는…….”

“충심 어디 갔어요?”

“그러니까 제 딸을…….”

“그러니까 딸 인생으로 자기 팔자 펼 바에야, 아저씨가 하시라 이거예요.”

“저는 그 애의 아비입니다!”

기어코 에밀 듀레인이 노호를 질렀다. 그러나 미아는 움찔하기는커녕,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눈을 깜빡였다.

“아비란 작자가 귀한 딸을 그렇게 취급해? 그런다고 살림살이 좀 나아질 것 같아요?”

“저를 모욕하지 마십시오!”

“아저씨는 제가 모욕할 만한 가치가 없는데요. 혹시 자의식 과잉? 에그, 나이 먹고 자의식 충만하면 좀 꼴불견인데! 조심하시는 게 좋겠다! 이런 충고 아무나 안 해 주는 거 알죠?”

듀레인 남작의 몸이 파들파들 떨렸다.

“이……! 어처구니가 없군! 귀족 명부에서 이름이 지워진 주제에 폐하의 총애만 믿고 주제넘게…….”

“쿠키 맛있당.”

“……!”

자신의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쿠키를 먹는 미아를 보며, 에밀 듀레인은 주먹을 꽉 쥐었다. 사람을 진심으로 때리고 싶어진 건 처음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미아는 픽 웃었다.

“그렇다고 한들 아저씨가 어쩔 건데요?”

“뭐?”

미아는 순식간에 태도를 바꾸고, 우아한 동작으로 다리를 꼬았다.

“내가 폐하의 총애만 믿고 날뛰든, 남작 각하한테 모욕을 주든, 남작 각하가 어쩌시게요.”

“지금 그걸 말이라고……!”

“죄송한데 저희 폐하보다 강해요? 잘생겼어요? 세요? 권력이라도 있어요? 렌의 가문이라 이런 말까지 하고 싶진 않지만, 아저씨는 할 줄 아는 게 뭐예요?”

“……!”

에밀 듀레인 남작의 얼굴이 불타올랐다. 기실 그것은 에밀의 약점이었다.

변변찮은 가문에, 자기가 느끼기에도 변변찮은 능력.

권력욕 따위는 없는 것처럼 행세하는 것도, 권력욕이 있는데 중앙 정계에 속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보이는 게 부끄러워서였다. 미아는 낱말로 된 칼로 그 모든 것을 조곤조곤 찔러 댔다.

“사업도 할 줄 몰라, 가문을 키울 줄도 몰라. 그렇다고 권세가에 비빌 줄 아는 것도 아니고. 자존심은 있는데 그걸 뒷받침할 건 아무것도 없고.”

“……하, 한때나마 귀족이었다는 이가 이런 저질스런 인신공격을……!”

“아! 꼭 말싸움 밀리는 애들이 말만 하면 인신공격이라고 하더라. 그럼 인신공격하는 애한테 잘 봐 달라고 비비러 오지를 말든가?”

“너도 폐하의 은덕이 아니면 당장 교수형을 당해도 모자란 반역자 나부랭이 아닌가!”

“응. 근데 난 그 폐하의 은덕 있지롱. 아저씨네 집엔 그거 없지?”

미아가 천연덕스럽게 하는 말에 듀레인 남작은 이제 뒷덜미를 잡고 싶었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혈압이 치솟았다.

그것도 모자라 미아는 쿠키를 들고 어린아이를 가르치듯 혀를 찼다.

“아저씨. 원래 세상은 돈, 권력, 명예야. 물론 난 셋 다 없지만…….”

잠깐 슬픈 듯한 얼굴을 했던 미아가 이내 까르륵 웃었다.

“근데 그걸 다 가진 남자를 가졌네!?”

결국, 에밀 듀레인 남작의 인내심이 뚝 끊어졌다.

“이 개……!”

“큼.”

그러나 그가 욕설을 내뱉기 직전, 제인 고트샬크가 다시 한번 헛기침했다.

“듀레인 남작 각하. 발언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그녀의 눈은 전보다 차가워져 있었다. 덕분에 듀레인 남작은 어금니가 으스러지도록 깨물며 나오려는 말을 참아야 했다.

여기서 말 한마디라도 잘못했다간 황제에게 바로 보고가 올라갈 게 분명했다. 그리고 야유회에서 보인 태도를 보면, 황제는 절대 그걸 가만 놔두지 않을 게 분명했다.

‘제기랄……. 제기랄!’

반박할 말이 없었다. 해코지할 수단도 없었다.

할 수 있는 건 그저 미아를 노려보는 것뿐.

그 시선마저 미아는 태연자약하게 받아치고 있었다. 가끔 “쿠키? 쿠키 달라고?”하고 물어서 사람 열 받게 하는 것도 잊지 않으며.

에밀 듀레인은 한참 뒤에야 화를 삭일 수 있었다.

하지만 더 있다간 정말로 주먹이 나갈 것 같아서, 그는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제가 잘못 찾아온 것 같군요. 실례했습니다. 오늘의 만남은 잊어 주십시오.”

“충심을 보여 줄 기회는 필요 없으시고요?”

“예.”

이를 갈 듯 으르렁거리는 말에 미아는 방긋 웃었다.

“나가시는 문은 저쪽입니당!”

* * *

그날을 기점으로 미아에게 방문객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듀레인 남작의 일이 퍼졌나 싶었지만,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게, 미아를 찾아온 귀족들은 모두 그녀의 환심을 사려 애쓰고 있었다.

“페르 님.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아딜로트가 보냈다고 말한 페르디안에게 미아가 물었다. 페르디안이 주변을 살핀 뒤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공식 석상에서 아직 황후를 맞이할 생각이 없다고 못 박으셨다. 그리고 네 이름도 언급했지.”

“흐음.”

미아가 마카다미아 초콜릿을 오독오독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듀레인 남작이 찾아온 것도 그 얘기를 들어서였구나.’

드디어 그 대국적인 거짓말인 공식 석상까지 퍼진 모양이었다.

“그러고도 반발이 없었어요?”

“황태후가 용인하고 있지 않나.”

페르디안이 미아의 걱정을 간단히 일축했다.

크리소르 황태후는 명문가인 크라우스 공작가 출신이다. 태후파의 수장인 크라우스 공작이 침묵하기 때문에 다른 대신들도 침묵하는 모양이었다.

‘크라우스 공작가에는 내가 아딜을 죽이기 위해 잠입한 첩자라고 알려져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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