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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애완동물이 되었다-56화 (56/193)

56화

“엥?”

세레니티는 말끝을 흐리더니 얼굴을 빨갛게 붉히고는 고개를 숙였다.

“감기는 키스하면 낫는다고들…….”

“누가 그래……?”

“채, 책이…….”

“무슨 책이……?”

“꺄악!”

비명은 왜…….

멍한 얼굴의 미아를 두고 세레니티는 혼자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붕붕 저었다.

“아니에요, 미아! 제가 실례되는 부분을 물었네요! 하, 하지만 아플 때는 참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안 했다니까?”

“구강 건강에 좋지 않아요!”

“안 했다고!”

“그, 그럼 역시 잠든 상태에서!?”

틀렸어. 이미 듣고 있지 않아…….

미아의 눈이 흐려졌다.

‘언제 가서 렌의 책장 좀 불태워야겠어.’

그때, 문득 미아가 물었다.

“참, 사건은 어떻게 됐어?”

“공식적인 처벌은 보트 관리인에게만 돌아갔어요. 하지만 암암리에 카르디날레 양이 사주한 일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고요.”

“그래?”

“네. 카르디날레 공작이 카르디날레 양에게 자숙을 명령한 것 때문에 더 그런 소문이 퍼진 듯해요.”

고개를 끄덕인 미아가 팔짱을 꼈다. 아딜로트는 분명 테레지아 카르디날레의 사주까지 알아냈을 것이다.

카르디날레 공작가가 명문가라고는 하나, 무려 황제 시해 미수 사건을 풍파 없이 넘길 수는 없었을 테고.

‘하지만 테레지아가 공식적인 처벌을 받지는 않은 듯하니, 뒤에서 뭔가 거래를 했겠지?’

결과적으로 카르디날레 공작가는 황제에게 한 수 내어줘야 하는 꼴이 되었다. 테레지아를 내칠 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러게 조용히 살랬더니.’

미아가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세레니티의 시선을 눈치채고는 재빨리 표정을 가다듬었다.

“흠! 그, 그보다 렌이 무사해서 다행이야! 많이 놀랐지?”

“네. 테레지아 양이 그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거든요.”

그녀의 말에 문득 미아는 궁금해졌다.

‘렌은 내가 일부러 사건을 키웠다는 걸 알고 있을까? ……어떻게 생각할까?’

미아의 1순위는 늘 생존이었다. 그래서 다른 것들, 특히 사람들의 평가나 시선은 무시하고 살았다.

하지만 세레니티에게 미움받으면 조금 슬플 것도 같았다. 세레니티는 누가 뭐래도 미아가 좋아하던 소설의 여주인공이니까.

“저기, 렌. 혹시…….”

망설이던 미아가 입을 연 순간이었다.

“미아.”

세레니티가 미아의 말을 가로막고 손을 맞잡았다.

“혹시 야유회에서의 일에 관해 물으려는 거라면, 저는 충격 때문인지 기억이 희미해요.”

“응?”

“그러니까 그런 우울한 얼굴은 하지 않기예요. 전 미아 편인걸요.”

세레니티는 장난스럽게 윙크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료원에 일손을 도우러 갈 시간인 모양이었다. 몸을 돌리던 그녀는 멈칫한 뒤, 조금 복잡한 얼굴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보트 위에서 꺼냈던 얘기는…….”

미아는 가만히 세레니티의 말을 기다렸다. 잭 아저씨 얘기인 모양이었다. 세레니티는 말간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미아의 시선을 마주하다가, 신음을 흘리며 눈을 돌렸다.

“……다음에 얘기해도 될까요?”

“렌이 그게 편하다면 그렇게 해.”

어차피 이제 정보는 율리시즈에게 맡길 것이다. 미아로서도 세레니티를 끌어들이고 싶지는 않았기에, 그녀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레니티는 안심한 얼굴로 방을 나갔다.

세레니티를 배웅한 뒤, 미아는 베개를 끌어안고 침대 위로 풀썩 누웠다.

‘다행이다.’

날 미워하지 않아서.

모로 누운 그녀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세레니티와 아딜로트를 비롯한 사람들을 떠올렸다.

살아남는 것만 보고 달려올 땐 주변을 신경 쓸 필요가 없었는데. 어느새 저도 모르게 그들에게 좋은 인상으로 남고 싶다는 욕망이 생긴 듯했다.

‘하지만…….’

미아가 눈을 감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반역자의 딸이라는 멍에는 벗겨지지 않을 것이다.

‘천지가 개벽해서 만에 하나 내가 다시 귀족이 되더라도 꼬리표처럼 따라다니겠지. 남자 하나 잘 잡아서 팔자 폈다는 소리가.’

딱히 상처받은 건 아니다.

받아칠 능력도 된다.

하지만 언제나 임전 태세를 하고 있는 건 피곤하고, 귀찮다.

‘그러니까 더 여기를 뜨는 수밖에 없어.’

최대한 빨리.

속전속결로 아딜로트와 세레니티에게 해피 엔딩을 안겨 주고서.

‘그치만 아딜은 내가 망명하는 게 싫은 눈치니까 그 얘기는 더는 하지 말아야지. 따로 방법을 찾자.’

미아가 그런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날 찰나였다.

“미아 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제인이 방 안으로 들어와 의외의 소식을 전달했다. 미아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듀레인 남작이 나를 보고 싶어 한다고?”

* * *

응접실에는 듀레인 남작이 앉아 있었다. 화사한 금발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어수룩한 인상의 중년 신사였다.

‘듀레인 남작이 왜 나한테 접촉해 왔지?’

미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원작에서 듀레인 남작은 권력욕이 강하면서도 체면치레하는 사람으로 나온다.

그는 세레니티가 계모와 의붓자매에게 구박을 받는 걸 알면서도 그걸 외면했다.

그리고 세레니티와 아딜로트가 사랑에 빠지자, 어떻게든 그녀를 이용해 권력을 쥐려고 애썼다.

그걸 알기에 마음 같아서는 당장 차를 쏟은 다음 내쫓고 싶었지만, 미아는 일단 속을 숨기고 웃었다.

“안녕하세요, 미아라고 해요!”

그녀의 등장에 듀레인 남작이 금색 눈을 휘며 웃었다.

“미아 님. 처음 뵙겠습니다. 에밀 듀레인이라고 합니다.”

그가 악당이라는 걸 알면서도 미아는 잠깐 멈칫했다. 피는 못 속이는 건지, 선해 보이는 미소만큼은 세레니티와 판박이였다.

“그러시구나. 렌의 아버지시라고요!”

“예. 저희 세레니티가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신세는요!”

미아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헤헤 웃었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이세요?”

미아의 질문에 듀레인 남작은 어수룩한 시골 귀족처럼 미소 지었다.

“별일은 아니고, 워낙 미아 님의 명성이 자자하시기에 한 번쯤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제 명성이요?”

“하하……. 엄격하고 신중하신 폐하의 관심을 독차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거기까지 말한 듀레인 남작은 슬쩍 덧붙였다.

“앞으로도 계속 폐하의 곁에 계실 분이시니, 인사 정도는 드리는 게 맞다고 판단했습니다.”

미아가 멈칫했다.

‘아딜이 벌써 나를 황후 후보로 생각 중이라고 소문냈나 본데.’

그런 미아의 생각을 모를 듀레인 남작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제 딸을 보살펴 주고 계시지 않습니까?”

“전혀요! 제가 오히려 세레니티에게 많이 도움받고 있는걸요!”

생각을 끝낸 미아가 서둘러 대답했다. 듀레인 남작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그렇습니까? 다행이군요……. 제 딸을 잘 부탁드립니다. 얘가 융통성이 없긴 하지만, 가르치면 의외로 곧잘 합니다.”

듀레인 남작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까지 꾸벅 숙였다. 자못 순박해 보이기까지 한 행동에 미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 그냥 딸을 위해 들른 건가?’

하지만 다음 순간, 듀레인 남작은 찻잔을 들어 올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폐하께서도 제 여식을 좋게 봐 주시면 제 고민도 해결될 텐데…….”

마치 어쩌다 속마음이 튀어나왔을 뿐이라는 듯이.

하지만 미아는 보았다. 그가 자신을 신경 쓰며 흘끔거리는 것을.

‘아. 이런 방식 좋아하시는구나?’

이런 류의 사람은 많이 만나 보았다.

만만해 보이는 젊은 여자애 하나.

자기가 조금만 속닥거리면 얼마든지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치들 말이다. 셀레스티얼 백작가를 다시 일으켜 세울 때, 당연하지만 사람들하고 부딪칠 일이 많았다.

그때마다 미아는 순진한 인상 때문에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뭐, 고마운 일이지. 내가 귀여운 덕에 쉽게 속도 드러내 주고.’

그래도 듀레인 남작은 나름 예의를 차린 편이었다. 적어도 겉으로는 미아를 존중하는 태도를 보였으니까.

‘그것도 못 하는 놈들이 쌔고 쌨거든.’

생각을 마친 미아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두 손을 맞잡았다.

“고민이요? 큰일인가요? 괜찮으시면 제가 들어드려도 될까요?”

“아닙니다. 제가 괜한 말을…….”

듀레인 남작이 시선을 피하며 말끝을 흐렸다. 미아가 더욱더 과장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에요! 저라도 괜찮다면 마음껏 얘기해 주세요! 전 렌을 자매처럼 생각하고 있거든요!”

그러고는 주먹을 쥐고 눈을 빛냈다.

다시 말해, 순진해서 등쳐먹기 딱 좋겠다 싶은 표정을 지었다.

“허, 참…….”

잠시 머뭇거리던 듀레인 남작도 더 뺄 생각은 없는지 바로 입을 열었다.

“그게, 저희 가문은 늘 폐하께 충성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셨구나! 남작 각하 인상이 너무 좋으셔서 그래 보이긴 했어요!”

미아에 맞장구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듀레인 남작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걸 드러낼 기회가 오지 않아서 말입니다……. 세레니티 역시 그를 고민하는 중입니다.”

“으응, 그럼 충심을 보이려면 폐하랑 가까이 있어야겠네요? 저처럼 말이에요!”

“아휴, 이미 미아 님이 계시는데 어찌…….”

듀레인 남작은 황급히 손을 내저으면서도 연신 조심스럽게 미아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폐하께서 예뻐해 주신다는데 그걸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지 않겠습니까?”

“예뻐해 주신다는 건…….”

미아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슬슬 긴장이 풀리는지, 듀레인 남작의 얼굴에 희미하게 야비함이 비쳤다.

“물론 황후는 미아 님이 어울리시지요. 하지만 미아 님도 세레니티를 좋아하시니…… 세레니티가 미아 님 곁에 있는 게 좋으시지 않겠습니까?”

“물론이죠! 그러니까 말씀하시는 바가……?”

“하하, 제국은 일부일처제지만, 자유로운 연애라는 것도 있고 말이죠…….”

“……아하!”

너무 개소리인 나머지 미아는 조금 늦게 반응했다.

‘내가 명색이 황후 후보인데 렌을 아딜 애인 시키라는 소리를 나한테 해?’

대체 얼마나 머리가 똥통이어야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건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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