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그냥 이 사람이 엄청 대단하더라, 하는 식으로 스쳐 지나갔을 뿐이다.
‘그 대단한 게 암살 쪽이었냐고!’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암살자가 얼굴을 보인다?
죽이려는 것밖에 더 있겠어?
패닉에 빠진 미아의 속도 모르고, 율리시즈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내뱉었다.
“미아 님……. 사실, 황태후 편이 아니시죠?”
“……!”
예상치도 못한 말이었다. 덕분에 미아는 표정이 흔들렸다. 율리시즈는 그런 미아를 보며 사르르 눈웃음쳤다.
“아. 역시…….”
미아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너. 황태후가 보낸 거야?”
“네에. 설마 정말로 아무 목줄 없이 사냥개를 풀어놓을 리는…… 없잖아요?”
미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 말이 맞았다. 크리소르는 지독하고 집요한 데가 있는 여자였으니까.
“그래서? 날 죽이겠다고?”
“워, 원래 명령은 미아 님이 자기 편이 아니라면 죽이라는 거였지만…….”
미아가 침을 꿀꺽 삼켰다. 율리시즈는 그런 미아의 모습을 바라보며 키득거렸다.
“비, 비밀을 지켜드리는 대신, 거래를 하나 해요…….”
“……거래?”
뜻밖의 단어에 미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전히 소매로 입을 가리고 있던 율리시즈는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다.
“세, 셀레스티얼 백작가의 미아…….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어마어마한 사업 수완으로, 백작가를 부흥시킨…… 장본인이죠. 그 능력을 빌려주세요…….”
“능력을 빌려 달라니?”
“혀, 현재 미로미스 상단의 사업을 이어받은 건 그라스 후작인데……. 그자는 나라에서 준 광산 개발지원금을 횡령하고 있어요…….”
“엑.”
미아가 얼굴을 찡그렸다. 그도 그럴 것이, 보통 국가 주도 사업은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일자리 창출과 빈민 구제가 목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거기에 할당된 지원금도 어마무시.
횡령할 수 있는 돈도 어마무시……하긴 하겠지만.
“아딜한테 들키면 진짜 모가지일 텐데 그러고 있다고?”
율리시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에……. 그것도 꽤 크게요…….”
그 말에 미아는 촛대를 내려놓았다. 보다 진지한 이야기를 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걸 원하는 거라면, 굳이 이런 협박 없이도 아딜에게 찌르면 됐을 텐데…… 달리 원하는 게 있는 거지?”
“정확하세요…….”
율리시즈가 눈을 가늘게 뜨고 씩 미소를 지었다.
“저는, 미아 님이 그라스 후작을 부추겨 주시길 바라요…….”
“부추겨 달라고?”
“네……. 높이 올라가야 떨어질 때 더 아플 테니까…….”
“…….”
성격 알 만하네. 미아가 그런 생각을 하며 심드렁히 고개를 기울였다.
“그거면 돼?”
“아뇨. 그 이후, 그라스 후작의 비리를 밝히고, ‘율리시즈’ 길드가 사업을 이어받을 수 있게 도와주세요…….”
내내 태연히 듣고 있던 미아의 입이 저도 모르게 벌어졌다.
“저기,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알고는 있는 거야?”
“물론이죠…….”
“허.”
절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한번 국가가 진행한 사업을 민간 길드에게 돌린다?
어렵다.
게다가 국방과 밀접하게 관련된 광산 개발?
더더욱 어렵다.
“애초에 그 아저씨를 죽이면 되잖아!”
미아가 버럭 외쳤지만, 율리시즈는 냉정했다.
“채, 책임자를 죽여 봤자 다른 책임자가 임명될 뿐이니까……. 게다가 미아 님은 황제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으시죠……?”
“하하! 너 참 남 일이라고 쉽게 말하는구나!”
그때,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율리시즈가 갑자기 손을 휘둘렀다.
팍, 팍, 팍!
그가 던진 비수 세 개가 미아의 옆을 스쳐 날아가 벽에 박혔다.
“그래! 이 팍팍한 세상, 남 일이라도 쉽게 말해야지!”
미아가 울고 싶은 심정으로 외쳤다.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죽을지도 몰랐다.
‘나중에 접근할 생각이긴 했지만, 이런 방식은……, 어라?’
그때 생각을 이어가던 미아가 문득 깨달음을 얻었다.
‘아니지. 어차피 찾아가려고 했으니까, 오히려 이건 기회 아닌가?’
다시 말하지만 율리시즈는 <장미 정원의 세레니티>에서 거의 치트키였다. 그 치트키가 제발로 걸어 들어와서 거래를 하자는데…….
‘어? 개꿀?’
생각해 보면 율리시즈의 요구가 아예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그라스 후작을 끌어내리는 거야 원래 일도 아니고.
공공사업인 광산 개발을 민간 길드에게 넘기는 것도, 아주 어렵지만 해 볼 만하긴 했다. 민영화는 현대 사회에서도 봉건 체제에서 시장 경제 체제로 넘어갈 때 벌어졌던 일이니까.
순식간에 계산을 마친 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거래하자.”
“그럼, 계약서를…….”
“대신, 나도 얻는 게 있어야지?”
“네?”
율리시즈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미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네가 말한 것처럼, 거래잖아. 나한테도 이득이 돌아와야지.”
“저는, 미아 님을 살려 줄……?”
“이대로 계약해 봤자 피차 배신하지 않을까 불안하기만 할 거야. 내가 불공정한 거래 때문에 딴생각이라도 하면? 네가 모르는 기가 막힌 방법으로 널 아딜에게 고발하면?”
“…….”
“너도 기왕이면 내가 제대로 일해 주는 게 낫잖아. 둘 다 이득인 쪽이 거래를 깰 이유가 없으니 덜 불안하지 않겠어?”
마치 준비해놨던 것처럼 자연스레 흘러나온 말에 율리시즈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연한 갈색 눈이 살피듯 미아를 훑었다.
‘먹혀라.’
미아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 시선을 받아쳤다. 허세는 이미 셀레스티얼 백작가를 일으키면서 수백 번도 더 부려 봤다.
‘먹혀.’
한치의 물러남도 없는 눈빛 교환 후.
이윽고 율리시즈가 눈을 가늘게 뜨고서 어깨를 늘어뜨렸다.
“어, 어떤 걸 원하세요……?”
‘먹혔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 미아는 재빨리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첫째, 우리가 거래하는 동안엔 내가 죽지 않게 지켜 줘. 동업자니까!”
“어차피 당신 옆에는 황제가 있지 않나요……? 그 남자……, 쉽, 쉽게 죽일 수는 없는 사람인데……. 오늘 접근하는 것도, 굉장히 힘들었다고요…….”
“그러고 보니 대체 황제궁엔 어떻게 들어온 거야?”
미아의 심통 가득한 물음에 율리시즈가 어깨를 으쓱했다.
“기업 비밀이에요……. 그래도 어젯밤엔 조금, 눈치챈 것 같았지만…….”
대수롭잖은 듯이 말했지만, 수줍은 미소에는 살짝 서늘한 기색이 스쳤다.
‘아. 어젯밤에 굳이 같이 있던 게 그래서였구나.’
굳이 곁에 남아 있겠다던 아딜로트를 떠올린 미아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지켜 줘! 내가 언제까지고 아딜 옆에 있을 리 없잖아.”
“아, 아침에 한 말을 들어 보면, 황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던데…….”
“……원래 폭군은 그런 농담 한두 개 정도는 하는 거야!”
율리시즈가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별로 가타부타 말을 얹을 생각은 없는 듯했다.
“그리고요……?”
“둘째, 세레니티 듀레인이 어릴 적에 살던 마을이 있어.”
미아가 숨을 들이마신 뒤 말했다.
“거기에 ‘잭 아저씨’라는 사람이 같이 살았을 거야. 그가 지금 어디 있는지 알고 싶어.”
사실 이게 주 목적이었다.
보트 위에서 세레니티가 털어놓으려는 기색을 보이긴 했다. 하지만 원래 정보는 교차 검증해야 하는 법이다.
율리시즈는 정보 길드의 수장답게 ‘왜’ 같은 것은 묻지 않았다.
“흐응, 좋아요. 그쯤이야……. 끝인가요?”
“마지막으로, 황태후의 움직임을 내게 알려 줘.”
“그건 또 꽤 큰 걸 요구하시네요…….”
하지만 말과 달리 율리시즈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스스럼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 좋아요. 어차피 미아 님의 움직임도 보고해야 하고…….”
그는 곧 품에서 계약서를 꺼내 미아에게 건네주었다. 미아가 두려운 기색 하나 없이 그것을 받자, 율리시즈는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제, 제가 이래 놓고 미아 님을 속일지도 모르는데……. 그런 걱정은 안 하시나 봐요……?”
그 말에 멈칫한 미아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거짓말하지 마. 애초에 거래할 생각으로 온 거잖아? 황태후의 의뢰도 그래서 받은 거 아냐?”
“…….”
뜻밖의 대답에 율리시즈의 눈이 동그래졌다. 놀란 표정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작위적인 수줍음이 사라지자 그 얼굴에는 예리함만이 남았다.
“……어떻게 아셨어요?”
“‘율리시즈’는 그런 길드잖아.”
미아가 딱 잘라 답하고는 계약서로 시선을 돌렸다.
<장미 정원의 세레니티>에서 ‘율리시즈’는 그런 길드였다. 빈민 출신인 길드 마스터가 만들었고, 그렇기에 사람들을 돕는 의적 같은 존재.
율리시즈는 미아의 대답을 듣고 오래도록 침묵했다.
“……이상한 분이네요.”
그러다 다시 수줍은 미소를 가장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거 보통 사랑에 빠지는 대사다? 주의해?”
팍, 팍, 팍!
“나도 말은 좀 주의해 볼게.”
벽에 박힌 비수를 애써 외면하며 미아가 딴청을 부렸다.
“그보다, 계약서엔 문제 없네. 이대로 하자.”
서로 펜을 쥐고 서명하기 전, 미아는 내내 묻고 싶던 것을 물었다.
“근데 말은 왜 자꾸 더듬어?”
“앗…….”
그 말에 내내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 같은 율리시즈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나, 남 앞에서 이야기하는 게 부끄러워서…….”
“……아. 그래. 진로 선택 잘했네.”
“마, 맞아요. 인사 없이 죽이면 되니까…….”
‘하하. 미친놈.’
주변에 다 맛이 간 사람밖에 없다. 미아는 신을 욕하며 계약서에 서명했다.
* * *
율리시즈는 곧 다시 연락하겠다는 말과 함께 사라졌다.
‘황태후는 감시를 시켰을 텐데, 정말 막 나가는구나.’
이후 혼자 방에 있는 미아에게 세레니티가 찾아왔다.
“미아, 늦었지만 그때 구해 줘서 고마워요. 미아가 아니었다면 영문도 모르고 물에 빠졌을 거예요.”
“몸은 어때? 다친 데는 없고?”
“미아 덕에 아무 문제 없답니다. 미아는 감기에 걸렸다고 하던데, 괜찮은 건가요?”
세레니티의 말에 미아가 자신의 목을 어루만졌다.
‘그러고 보니 멀쩡하네.’
지로티 공작 말로는 오래 갈지도 모른다고 했는데. 미아가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외쳤다.
“폐하가 가져갔나 봐!”
그러자 세레니티가 흠칫 놀라더니 뺨을 붉혔다.
“키, 키스하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