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소설 속에서도 세레니티가 감기에 걸리긴 한다. 그것 때문에 아딜로트와 가까워지기도 하고.
‘아딜은 소설에서처럼 세레니티에게 갔을까? 아니면…….’
그때 문이 스르르 열렸다. 방으로 들어오던 아딜로트는 미아가 고개를 돌리자 흠칫했다.
“안 자네.”
“자다 깼어요.”
미아가 배시시 웃었다.
“콜록.”
다시 기침이 나왔다. 아딜로트는 미아가 누운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물끄러미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넌 속옷 차림이 안 부끄러워?”
낮에 물에 뛰어들기 위해 드레스를 벗어 던진 일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안에 여러 겹 껴입었는데 그게 어떻게 속옷 차림이야…….’
현대인의 감수성은 너무 예민해서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떨떠름한 표정을 짓게 된다.
“아딜로트가 가려 줬잖아요!”
“다 봤잖아.”
“목숨이 중요한 거니까!”
미아가 배실배실 웃으며 다시 기침했다.
“그보다 아딜로트가 탄 보트는 안 터져서 다행이에요!”
미아의 말에 아딜로트가 가당찮다는 듯이 실소했다.
“당연히 안 터졌겠지. 네가 일부러 불발될 폭발석으로 설치해 놨을 테니까.”
“앗. 들켰다.”
“그럼 들키지 안 들켜?”
아딜로트가 한숨을 쉬며 미간을 조금 문질렀다.
“카르디날레인가?”
“네.”
“그래…….”
아딜로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넌 몸이나 신경 써.”
“그럴, 에취! ……게요!”
미아가 코를 훌쩍이며 방긋 웃었다. 아딜로트는 팔짱을 낀 채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손을 뻗었다.
‘때리려는 건 아니겠고.’
미아가 또랑또랑한 눈으로 아딜로트의 손을 바라보았다. 손은 허공에서 몇 번 주춤하긴 했지만, 곧 부드럽게 미아의 이마에 닿았다.
체온을 잰다고 하기엔 닿은 시간이 길고, 쓰다듬는다고 하기엔 동작이 뻣뻣하다.
‘손 차가워서 기분 좋아…….’
게다가 아픈데 누가 쓰다듬어 주니 기분이 제법 괜찮았다.
‘셀레스티얼 백작가에서 일할 땐 아파도 나를 대신할 사람이 없어서 울면서 일했는데.’
그때에 비하면 참 호강이었다. 미아가 헤헤 웃자, 아딜로트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다친 줄 알았어.”
“안 다쳤어요……. 혹시 다칠까 봐 보호용 마법석도 구해 놨거든요.”
“그래도 혹시 모르는 거였어.”
“하지만…….”
“넌 목숨이 안 아까워?”
아딜로트가 얼핏 차갑게 말했다. 미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도 알겠지만 난 사람을 많이 죽였고, 그래서 사람이 얼마나 쉽게 죽는지 알아.”
“…….”
“작은 실수로도 사람은 죽어. 너라고 다르진 않아.”
말의 무게 때문에 미아의 말문이 막혔다. 그런 미아를 아딜로트는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냉정한 태도였지만, 시선에는 걱정뿐이었다.
‘……기분이 이상해.’
어쩐지 안심이 되는 것도 같고, 긴장이 풀리는 것도 같았다. 미아가 배시시 웃었다.
“그럼…… 앞으론 우리 폐하가 나 지켜 주나?”
“…….”
아딜로트가 가만히 턱을 괴었다. 그는 말없이 미아를 보며 눈을 깜빡이다, 문득 입을 열었다.
“그러겠다고 하면?”
“네?”
정말로 긍정적인 대답이 나올 줄은 몰랐던 미아가 당황했다.
“내가 지켜 준다고 하면?”
“으음?”
“그러면 앞으로 그런 짓 안 하나?”
“어…….”
미아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렇죠……? 제가 나설 일이 없어지면야…….”
아딜로트의 붉은 눈이 지긋이 미아를 응시했다. 그러다 그가 한마디 툭 던졌다.
“그럼 앞으로 그렇게 해.”
“네?”
“어차피 대신들이 결혼 얘기하는 거 짜증 났어. 앞으로는 너 있으니까 결혼에 생각 없다고 둘러댈 거야. 그러니까 그 대신 너는 나서지 말고 날 이용해.”
미아가 소리 없이 놀랐다. 분명 어디서 본 적이 있는 대사였다.
‘소설 속 아딜로트가 세레니티에게 하던 말이잖아!’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네 신분을 복권시키는 건 어떻게든 해 볼 테니 좀 기다려.”
“그렇게까지 할 필욘 없는데…….”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야.”
“왜요?”
미아의 질문에 아딜로트는 물끄러미 미아를 바라보았다.
괜히 땀이 삐질 날 정도로 오랜 시간 이후.
“비밀인데?”
아딜로트가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폐하 싱거워…….”
“잘생겼잖아.”
“와! 누가 가르쳤어, 저 요망한 대사…….”
“너잖아, 너.”
맞는 말이라 뭐라고도 못하겠고. 미아가 투덜거리며 손등을 이마 위에 올렸다. 다시 열이 오르고 있었다.
‘약 때문인가? 술 취한 느낌이야.’
미아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아딜? 안 자도 돼요? 또 일해요?”
“일은 다 끝나긴 했는데…….”
팔짱을 끼고 등받이에 깊게 몸을 기댄 아딜로트가 말꼬리를 흐렸다. 그의 시선이 묘하게 불편한 기색으로 허공 어딘가를 응시했다.
“……신경 쓰이는 게 있어서. 오늘은 여기 있을 거야.”
“네?”
“자든가 해.”
“아딜, 어떻게 황제 폐하를 두고 잠을…….”
“잘 잤지.”
“잘 잤죠…….”
미아가 시선을 피했다. 첫 만남에서부터 아딜이고 나발이고 잠부터 잤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런데 여기 있겠다니.’
미아가 아딜로트를 흘끗거렸다. 딱히 뭔가를 하는 것도 아니면서, 다리를 꼰 채 앉아 있을 뿐이었다.
‘으음. 어떡하지.’
고민하던 미아가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아딜. 그럼 옆에서 잘래요?”
* * *
간만에 아주 해괴한 소리를 들었더니 정신이 다 또렷해졌다.
아딜로트는 눈앞에서 물 먹은 솜인형처럼 늘어져 있는 미아를 바라보았다.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너 좀 머리가…… 아픈가 본데.”
그는 돌려 말하는 것에 실패했다.
“아니거든요……. 치.”
미아가 입을 삐죽 내밀고 툴툴댔다.
“옆에만 있어도 되는 거면, 누워 있는 게 낫잖아요……. 내일 또 일해야 할 텐데. 콜록.”
“내가 알아서 해.”
“알아서 하긴 무슨…….”
미아는 그렇게 말하고서 이불로 입을 가리고 뭔가를 구시렁거렸다. 아딜로트는 한숨을 쉬었다.
“내일 신전에 가자.”
“왜요?”
“너 머리에 문제가 좀 있는 것 같아.”
“아니거든요……? 맨날 나보고 이상하대.”
눈을 흘기며 말하던 미아의 목소리는 점점 시무룩해졌다.
“아니면…… 아딜은 역시 렌이 좋…….”
“그거야말로 아니거든?”
아딜로트가 미간을 좁히고 즉답했다. 도저히 그냥 보아 넘길 수 없는 말이었다.
“넌 대체 왜 그 변태랑 나를 못 엮어서 안달이야?”
“잘 어울리니까…….”
“내가 그 변태랑?”
“렌은 아딜이 변태랬어…….”
미아는 그렇게 말하고서 멍한 얼굴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변태랑 변태……. 잘 어울려.”
“……그래. 마음대로 생각해.”
아딜로트는 상대가 환자라는 것을 깨닫고 욱하려는 것을 참았다. 더 말해 봐야 자신만 답답할 게 뻔하니, 더는 대화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몇 분 뒤, 아딜로트는 조금 짜증스럽게 덧붙였다.
“아니, 마음대로 생각하진 말고…… 그 여자는 나랑 안 어울려.”
그 말에 미아의 고개가 돌아갔다. 멍한 얼굴이었다.
“그래?”
“그래.”
“그럼 어떻게 해?”
“…….”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라고 대답하기엔 미아의 눈이 너무 천진난만했다.
아파서 그런지 그녀는 좀 더 아이 같아졌고, 평소에 보이던 기묘한 거리감과 냉정한 태도가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이게 본모습인 걸까.
그렇게 생각하자 지금 이 순간이 그리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난 분홍색이랑 더 어울려.”
그렇다고 이렇게 덜떨어진 말을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내뱉자마자 후회한 아딜로트는 한 손을 들어 제 얼굴을 가렸다.
“분홍색?”
갑자기 미아의 얼굴에 차르르 기쁨의 빛이 흐르더니, 그녀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와! 나도 분홍색인데!”
그 한마디에 아딜로트의 심장이 크게 요동쳤다.
“……딱히 생각해 본 적 없지만, 그러네.”
“그렇구나. 아딜은 분홍색이 좋구나…….”
“좋다는 건 아니야.”
“싫어……?”
“……아냐. 좋아, 하는…… 편일 거야. 아마.”
“그럼 여기 누워!”
미아가 방긋 웃었다.
아직도 고집을 안 꺾은 모양이었다. 가쁘게 숨 쉬는 것을 보면 정말로 쉬어야 하는 게 분명한데.
“누워서! 자!”
“…….”
“내가 지켜 줄게!”
흐리멍덩한 눈을 반짝이며 말하는 모습에 아딜로트의 속이 복잡해졌다. 인상을 찌푸린 채 망설이던 그는 이내 거칠게 자기 앞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너 후회하지나 마.”
다음 순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한쪽 팔로 미아의 어깨 옆을 짚었다.
미아의 눈이 점점 커지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의 무릎까지 침대에 올라온 순간.
“……어떡하지!”
미아가 버럭 외쳤다. 그 비명 같은 외침에 아딜로트는 팔을 삐끗할 뻔했다.
“왜.”
“나 벌써 후회하는 거 같은데!”
“많이 하든가.”
“남녀칠세부동석! 남녀유별 붕우유신…….”
“…….”
아딜로트는 한숨을 쉬고서, 뭔가를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미아의 옆자리에 누웠다.
“그래서 이젠 됐어?”
아딜로트가 팔로 머리를 괴고 옆으로 누운 채 말했다.
미아는 그런 그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돌연 괴성을 질렀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너 지금 나한테 저주 거는 거야?”
“어리석은 나! 못된 나!”
“…….”
아딜로트는 생각했다.
이 미친 여자의 머릿속을 이젠 정말 모르겠다고.
“됐으니까 자.”
그는 한숨과 함께 미아의 눈을 덮었다.
하지만 미아는 아예 죽을상을 하고서 꺼이꺼이 외쳤다.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그만하라고.”
“엉엉! 내 마음에 마구니가 있어!”
“그래. 마구니랑 잘 자든가.”
“못된 말이나 하고!”
“정말 못된 게 누군데.”
이후로도 미아는 뭔가를 작게 웅얼거렸다. 그러다 지쳤는지 곧 쌔근쌔근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버렸다.
그제야 아딜로트는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아딜. 그럼 옆에서 잘래요?’
정말 사람 심장 떨어지게 하는 게 누군지도 모르고.
태평하게 잠든 미아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딜로트는 조금 전의 광경을 떠올렸다.
베개에 펼쳐진 분홍색 머리카락.
열 때문에 달아오른 얼굴.
평소와 달리 멍하던 시선.
저도 모르게 움직이려던 자신의 손.
“……울고 싶은 건 내 쪽이거든?”
미아는 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며 아딜로트는 재차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잠들기엔 그른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