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그다음은 미아가 뭔가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폐에 물이 들어차자 고통이 작열했고, 한참 뒤에는 누군가 미아의 팔을 붙잡았다.
“……푸하!”
“허억, 흐……!”
미아와 세레니티는 거의 동시에 뭍으로 끌어 올려졌다.
“구했습니다! 두 분 다 무사합니다!”
“여기 담요 가져와!”
“빨리 따뜻한 것을!”
소란 속에서 미아는 반사적으로 옆자리를 더듬었다. 다행히 세레니티의 손이 잡혔다. 미아는 불타는 것 같은 속을 붙잡고 눈물투성이인 눈을 억지로 떴다.
“쿨럭, 컥, 쿨럭……! 레, 렌, 쿨럭, 켁, 괜찮…….”
“저는 괜찮아요, 미아. 콜록!”
미리 숨을 참고 있던 세레니티는 물을 마시지는 않았지만, 눈치 빠르게 기침을 같이해 주었다.
“……다행이다, 쿨럭.”
미아는 그런 그녀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러자 세레니티는 어쩐지 울 것 같기도, 화가 난 것 같기도 한 얼굴이 되었다.
“미아. 대체 왜…….”
그때, 무언가가 미아의 몸 위에 툭 덮였다.
화려한 훈장이 달린 남색의 코트.
아딜로트의 것이다.
그제야 자신이 속치마 차림이라는 것을 깨달은 미아가 고개를 들었다.
“폐하…….”
“…….”
어느새 다가온 아딜로트가 미아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흐트러진 은발 사이로 굳은 얼굴이 보였다.
“큼, 콜록……. 폐하는 괜찮으세요?”
미아가 갈라진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을 때, 아딜로트는 짧고 날카롭게 웃었다.
“여기 너 빼고 죽을 뻔한 사람 아무도 없어.”
나긋한 말투였다.
“너만 죽을 뻔했지.”
하지만 그와 눈을 마주친 순간, 미아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키고 말았다.
늘 잘 세공한 루비처럼 반짝이던 눈이 처음으로 탁한 육홍색으로 보였다. 표정은 없었다. 무심함에 가까웠다.
미아는 그의 이런 표정을 딱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셀레스티얼 백작을 죽이러 왔을 때.’
말하자면, 지금 그는 누군가를 죽이기 직전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당황으로 굳은 미아를 바라보며, 아딜로트는 천천히 손을 올렸다.
“……정말로, 잃어버리는 줄…….”
그의 손이 미아의 젖은 머리카락에 닿으려던 순간.
“에취!”
미아가 옷소매에 얼굴을 묻고 기침했다.
“…….”
그 순간, 내내 무심하던 아딜로트의 얼굴에 실금 같은 균열이 갔다. 일그러진 표정에서 억누르지 못한 여러 가지 감정이 흘러나왔다.
걱정, 분노, 망설임.
그리고 두려움.
‘……두려워해? 아딜이?’
놀란 미아가 그것에 대해 더 생각하기도 전에 아딜로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어느새 차갑고 오연한 낯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폭발석이라.”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내가 요즘 너희에게 좀 우습게 보인 모양이지.”
주변은 땀 흐르는 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 모두가 아딜로트와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아딜로트는 무심하게 그런 주변을 둘러보더니, 산뜻하게 허리춤의 검을 뽑으며 말했다.
“그럼 앞으로는 그러지 못하게 본보기를 보여 주는 수밖에.”
* * *
테레지아는 영애들 사이에 서서 당황을 삼키느라 무진 애를 썼다.
‘왜 일이 이렇게 커졌지?’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분명 보트 관리인에게 폭발석을 건네, 세레니티 듀레인이 탈 배에 설치하라고는 말했다.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일을 키울 생각은 없었어!’
원래 테레지아의 목적은 그냥 세레니티를 위협해 미아를 협박하는 거였다.
그걸로 미아 셀레스티얼의 항복을 받아내거나.
혹은 운 좋게 둘이 나란히 죽어 주거나.
모든 책임은 보트 관리인에게 돌릴 계획이었다. 주제에 얼굴은 반반한 세레니티 듀레인을 탐냈지만, 그녀가 거절하자 원한을 품었다는 식으로 증거 조작까지 마쳤다.
하지만 일이 너무 커졌다. 무엇보다 자신이 준비한 폭발석의 규모는 저렇게 크지 않았다.
원래는 배나 조금 망가뜨릴 수준이어야 했는데, 흡사 전쟁용 폭발석에 가까운 규모였다. 단순히 장난으로 넘어갈 수준이 아니었다.
‘대체 왜? 뭐가 어떻게 된 거야!’
테레지아가 초조하게 입술을 짓씹던 중이었다. 문득 시선을 느낀 테레지아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미아 셀레스티얼을 발견했다.
감히 황제의 외투를 걸친 상태로, 그녀는 이제야 자신을 보았느냐는 듯이 생긋 웃었다.
그리고, 소매로 입을 가린 채 속삭였다.
‘못 이긴다고 했지?’
“…….”
테레지아의 정신이 일순 하얗게 물들었다가 되돌아왔다. 이어서 불길 같은 노기가 치솟았다.
‘저 찢어죽일!’
확실했다. 전부 미아 셀레스티얼의 짓이었다. 모종의 방법으로 자신의 계획을 알아채고 일부러 사건을 키운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걸 고발하면, 조사 과정에서 자신이 폭발석을 설치한 것까지 들통날 터였다.
그걸 알기 때문인지 미아 셀레스티얼은 저 보란 듯이 연약한 척 기침을 해 댔다. 그때마다 기사들에게 명령하던 아딜로트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제인. 미아를 안으로…….”
“아뇨! 지켜보려고요. 아, 하지만 렌은…….”
“전 미아 곁에 있을래요.”
“……그럼 옷이나 잘 여미든가.”
아딜로트는 그렇게 말하며 미아에게 걸쳐 준 자신의 코트를 직접 잠가 주기까지 했다.
자신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 황제가. 반역자의 딸에 불과한 여자의 시종이라도 된 것처럼 말이다.
뭔진 몰라도 다정하게 서로 속삭이기도 했다.
“……아무도 안 보는데.”
“내 눈은 눈도 아니지?”
“아닌데. 아딜은 나 볼 시간 없는데. 바빠서 방에도 안 왔는데?”
“…….”
그 모습을 지켜보며 테레지아는 입술을 짓이겼다. 피가 줄줄 흘렀으나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보다는 일부러 자신 앞에서 희희낙락하는 저 계집애를 찢어 죽이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테레지아가 이를 갈고 있는 사이, 어느새 보트 관리인이 끌려왔다.
“폐, 폐하! 저, 저는 정말 모르는 일입니다……! 제, 제가 한 게 아닙니다!”
난생 처음 황제 앞에 나서게 된 보트 관리인은 안색이 창백했다. 그는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연신 바닥에 이마를 찧었다.
하지만 아딜로트의 태도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는 오히려 약간 피로한 듯이 관리인을 내려다보았다.
“안타깝게도 난 사지 멀쩡한 상태로 하는 말은 안 믿어.”
특별히 주변을 위협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어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두려움에 침도 삼키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을 죽인다는 것.
그럴 마음을 먹는다는 것.
그게 그에게 고작 일상적인 피로에 불과하다는 게 너무나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저, 저는 정말 아무 잘못이……!”
관리인의 손발이 벌벌 떨었다. 그리고 그는 반사적으로 테레지아 쪽을 바라보았다.
테레지아는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눈을 부릅떴다. 입도 뻥긋하지 말라는 위협이 담긴 눈이었다.
“히, 힉…….”
관리인은 움찔하더니, 어쩔 줄 모르고 땀만 뻘뻘 흘렸다. 그 모습을 보고 테레지아는 만족감을 느꼈다.
‘저 정도면 내 이름을 말하진 않겠어.’
일단 초동 조사 때만 입 다물게 하면 된다. 이후 사람을 써서 죽여 버리면, 자신이 폭발석 설치를 사주한 일은 어둠에 묻힐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엔…….’
빠직.
손에서 부채가 다시 부서졌다.
‘진짜로 죽여 주겠어.’
테레지아가 미아를 노려보며 이를 뿌득 간 순간이었다. 거만한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 나섰다.
“흠! 폐하? 결국 아무도 다치진 않았습니다.”
깔끔하게 넘긴 반백의 머리와 외눈안경.
그라스 후작이었다.
“무슨 일이 있나 싶어 급히 달려와 보았습니다만, 아무래도 사소한 소동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사소한 소동?”
인파를 헤치고 나타난 그라스 후작은 아딜로트의 낮은 목소리에 움찔했으나, 금세 능글맞게 말했다.
“예. 듣자 하니 폐하의 애완동물이 다칠 뻔했던 모양인데, 결국 무사하지 않았습니까? 날도 좋은데 굳이 피를 보는 것은, 폐하의 인품에 누가 되는 일이 아닐까 합니다.”
그의 말을 들으며 테레지아는 속으로 쾌재를 울렸다. 원래 그라스 후작은 황제가 하는 모든 일에 시비를 거는 사람이었다. 그게 이렇게 반가울 줄은 몰랐다.
‘그래. 이대로 그냥 넘어가라고! 아니면 저 관리인만 죽이고 끝내!’
가세하듯 사람들 사이에서도 수긍하는 움직임이 일었다.
“맞는 말이죠. 결국 다치지도 않았고…….”
“좋은 게 좋은 거니까요.”
테레지아는 입이 찢어져라 웃지 않기 위해 애쓰며 미아를 돌아보았다. 분명 제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자 분통을 터뜨리고 있을 터였다.
‘어떻게 내 계획을 알아차렸는지는 몰라도, 너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하지만, 고개 돌린 테레지아의 눈에 보인 것은 남몰래 하품하고 있는 미아의 모습이었다.
긴장이나 낙담, 억울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 태연한 태도.
‘……왜 저렇게 태연하지?’
테레지아가 의구심과 불안함에 눈썹을 치켜올린 순간이었다.
“폐하!”
황제의 수석 시종인 올리버가 급히 아딜로트에게 달려왔다.
“기사들이 보트 수색을 마쳤습니다. 폭발석을 이용한 듯하며, 다른 보트는 모두 이상 없습니다만…….”
“다만?”
굳은 얼굴의 올리버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폐하께서 탄 보트 바닥에서 이런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그의 손 위에 놓인 것을 본 모두가 경악했다. 테레지아의 얼굴 역시 새하얗게 질렸다.
폭발석이었다.
* * *
아딜로트가 재밌다는 듯이 폭발석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144각 진이군. 불발이고. 제대로 작동했다면 아까 그 폭발쯤은 우스웠겠어.”
술렁임이 달라졌다.
“마, 말도 안 돼…….”
“폐하를 시해하려고……?”
미아는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열 오른 뺨을 문질렀다.
‘계획한 대로, 재밌어지고 있네.’
당연하지만 아딜로트의 보트에 폭발석을 설치한 건 미아였다. 불발될 폭발석을 지로티 공작을 통해 구한 다음, 야유회 전에 미리 설치해 놓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