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너. 카르디날레 공작가의 소개로 레벤토르에서 일하게 되었다지? 그렇다면 그 보은을 해야 하지 않겠어?’
‘카, 카르디날레 아가씨? 뭐, 뭘 원하시는……?’
‘이걸 세레니티 듀레인이 탈 배 바닥에 설치해.’
‘……이건 폭발석 아닙니까?’
‘그래. 어차피 듀레인 남작가의 밥버러지니 큰일은 없을 거야. 엉뚱한 사람이 걸리지 않게 표식 잘해 두고. 행여나 내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간…… 알지?’
뱃머리의 새 부리가 부러져 있는 보트.
소설 속에서 테레지아가 수작을 부려 놓았던 바로 그 보트가 눈앞에 있었다.
‘결국 변하지 않았네.’
다른 배의 새 모양 장식은 부리가 멀쩡한 걸 보면 확실했다. 미아는 물끄러미 그것을 바라보다, 씩 웃었다.
“엄청 기대된다! 그치, 렌?”
* * *
뿌우우우.
얼마 안 있어 뿔피리와 함께 아딜로트가 탄 보트가 출발했다. 다른 영애들의 보트 역시 호수 중앙으로 나아갔다.
예전에는 남자들이 노를 젓곤 했지만, 요즘은 전부 마력석이 보트를 움직였다. 덕분에 미아와 세레니티는 배 위에 단 둘뿐이었다.
“와아…….”
세레니티는 호수를 보며 탄성을 흘렸다. 아름다운 광경이긴 했다. 인어가 살았다는 전설답게 호숫물은 맑았다.
호숫가에는 딸을 데리고 나온 귀족들이 삼삼오오 떠드는 중이었다. 악단은 호수의 정취와 어울리는 잔잔한 음악을 연주했다.
‘조금 뒤면 아비규환이 되겠지만.’
미아가 감흥 없이 주변을 둘러볼 때, 문득 세레니티가 말했다.
“미아는 항상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응? 내가?”
“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걸 보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흰 레이스 양산을 쓴 세레니티는 그렇게 말한 뒤, 불어온 바람에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그래서인지, 분명 미아는 다정하지만 전 어쩐지 조금은…….”
금발의 미인이 작고 앵두 같은 입술로 조곤조곤 입을 여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광경.
문득, 미아의 머릿속에서 엠브라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그럼…… 폐하랑 아무 일도 없으셨다고요?’
일은 무슨 일.
미아가 실없이 웃었다.
그런 착각을 하기엔 세레니티는 너무 아름다웠다. 아름답다뿐이랴, 존재감 자체부터가 남들과 달랐다.
‘내가 남자였다면 벌써 렌한테 청혼을 백 번은 더 했을 거야.’
지금도 온 세상이 세레니티를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햇빛은 세레니티의 금발을 더욱 빛나게 했고, 바람도 아주 적당히만 불었다. 머리카락을 너무 강하게 흩뜨리거나 드레스를 뒤집지 않을 정도로.
‘아딜을 볼 때도 꼭 이런 느낌이지.’
집무실에 가만히 앉아 펜을 움직이는 아딜로트를 볼 때도 비슷한 감각을 느꼈었다.
아. 이 사람이 이 세계의 주인공이구나 하는, 일종의 거리감 말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에 빙의했다고 해서 자기가 줄리엣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는 법이거든.’
그래서 미아는 세레니티의 말에 대답하기보다, 이렇게 말했다.
“렌. 황후 되어도 나 죽이지 않을 거지?”
“네?”
뜬금없는 말에 세레니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황후요? 제가? 미아가 아니라요?”
“내가 무슨 황후야. 반역자인데!”
“하지만……, 미아는 반역자 같은 게 아니지 않나요?”
조심스럽게 묻는 세레니티를 보며 미아가 쌕 웃었다.
“그야 당연히 아니지만! 역시 황후가 된다면 렌 아닐까 해서. 나랑 아딜의 소문은 전부 거짓말이니까 걱정하지 말고.”
그 순간, 세레니티의 얼굴에 옅은 수심이 드리워졌다.
“……미아는 이상해요.”
그러자 방금까지만 해도 찬란하게만 느껴지던 햇살이 마치 어떤 부조리극의 연출처럼 느껴졌다.
“꼭 좋은 건 전부 남에게 주고 홀가분하게 떠나고 싶은 사람처럼 보여요. 그런 건 싫어요, 미아. 저는…….”
세레니티는 슬픈 표정으로 자리를 건너와, 미아의 손을 맞잡았다.
“그냥 지금도 미래에도, 미아가 같이 있어 줬으면 좋겠어요……. 제가 너무 무리한 걸 바라는 건가요, 미아?”
당황한 미아는 눈만 동그랗게 뜬 채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해야 하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언젠가 홀가분하게 떠나고 싶은 사람 같다’는 세레니티의 말이 맞았으니까.
침묵하는 미아를 두고 세레니티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기어이 뭔가를 결심한 듯이 말했다.
“미아. 잭 아저씨에 대해 궁금하다고 했죠?”
“……!”
미아가 눈을 크게 떴다.
‘알려 주려는 건가?’
그때였다.
―펑!
“꺅!”
작은 폭발음과 함께 배가 기우뚱했다. 그리고 용골을 타고 연달아 폭발이 이어졌다.
동시에 세레니티의 비명이 귀청을 때렸다.
“미, 미아! 배가 가라앉고 있어요!”
그녀의 말대로였다. 용골이 부서지자 배 바닥부터 버티지 못하고 조각나고 있었다. 이대로는 수 초 안에 완전히 잠길 터였다.
“세상에! 가라앉나 봐요!”
“어, 어서 구조대를!”
이상을 눈치챈 다른 배의 영애들이 흰 손수건을 흔들었다.
하지만 호숫가에서 호수 중앙까지 도착하기에는 시간이 더 걸릴 터였다.
“하!”
미아가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이를 갈 듯 웃었다. 골탕이나 좀 먹이려 했던 소설과는 폭발의 규모가 달랐다. 정말로 누가 죽어도 상관없다는 살의가 느껴졌다.
‘테레지아…….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순식간에 냉정을 되찾은 미아가 재빨리 세레니티의 어깨를 붙잡았다.
“렌. 내 말 잘 들어! 무슨 일이 있더라도 놀라지 마. 알겠지?”
“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날 꽉 잡고 있어! 렌은 내가 반드시 지켜 줄게!”
“미아……!”
말이 끝나기 무섭게 미아가 드레스를 벗었다. 일부러 벗기 쉬운 드레스로 골라 입은 차였다.
“미, 미아!? 옷을 벗으면……!”
“속치마 있으니깐!”
“아무리 그래도요!”
당황한 세레니티를 두고 구두까지 벗은 미아는 재빨리 준비했던 마법석을 입에 물었다. 그리고 세레니티의 입에도 마법석을 하나 넣어 주었다.
“빨리 가리……, 읍!”
“렌, 숨 참기!”
그리고 미아가 세레니티를 끌어안고 물속으로 뛰어든 순간.
콰쾅!
쾅! 퍼버벙!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는 폭발과 함께, 호숫물이 하늘 끝까지 솟구쳤다.
* * *
황제가 타는 화려한 보트에 홀로 앉아, 아딜로트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며칠 동안 미아의 말이 도무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중에 외국에 갈 거예요!’
그렇게 말하던 미아의 모습을 떠올리자 심장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말마따나 여기는 다 저를 황제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애로 알고 있는데 부끄러워서 어떻게 돌아다녀요! 저도 자존심이 있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줄은 정말 몰랐다. 워낙에 헤실거리고, 잘 웃고 다녀서.
하지만 반역자의 가문은 삼대를 멸하는 게 기본이다.
이례적으로 미아를 살려 두려면 공식적으로는 애완동물 취급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 대화 이후, 궁내관인 슐츠 공작에게 반역자의 신분을 복권시킨 전례가 없는지 물었다.
슐츠 공작은 난처해하면서도 공손히 대답했다.
‘딱 한 번 있긴 합니다.’
‘한 번?’
‘예. 딱 한 번, 황제의 목숨을 구하고 평민으로 복권된 경우가 있습니다.’
그마저 귀족 신분으로 복권된 적은 없다는 뜻이었다. 아딜로트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여태껏 수많은 반역자를 죽여 왔다.
사정을 듣고 억울한 자를 뒤로 풀어 준 적은 있어도, 이렇게 대놓고 신분을 복권시키려 한 적은 없었다.
그는 그래야만 하는 황제였다.
‘그런데 대체 왜 내가 그렇게까지.’
그 순간이었다.
콰쾅!
엄청난 폭음이 호수를 울렸다.
“……?”
아딜로트가 고개가 들렸고, 곧 그의 입이 벌어졌다. 태양에 닿을 정도로 높이 호숫물이 터져 나가고 있었다.
“꺄악!”
“배, 배가 폭발했어!”
“사람은!?”
비명과 함께 호숫물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온갖 마법을 두르고 있는 아딜로트에게는 닿지 않았지만, 그의 심장이 점점 차가워지고 있었다.
난자된 뱃조각과 흰 드레스 조각이 보였다. 미아가 입고 있던 드레스였다.
“―미아!”
아딜로트의 입에서 외마디 고함이 터져 나왔다.
* * *
물속에서 미아는 수면을 바라보았다. 햇빛이 조각난 배 사이로 수면 아래에 내리쬐고 있었다. 그런 미아의 얼굴을 동그란 공기 방울이 감싸고 있었다.
‘호흡엔 문제없고.’
지로티 공작을 통해 구한 마법석이었다. 수중에서도 숨 쉴 수 있는 마법이 걸린.
세레니티는 미아의 목덜미에 매달린 채 눈을 꼭 감고 있었다. 그러다 미아가 어깨를 톡톡 두드리자, 화들짝 놀라 실눈을 떴다.
“……!?”
놀라 허둥거리는 세레니티를 미아가 한쪽 팔로 끌어안았다. 드레스를 벗은 미아와 달리, 물 먹은 드레스 때문에 세레니티는 자꾸 바닥으로 처지고 있었다.
‘차라리 수영을 가르쳐 줄 걸 그랬……, 응?’
그때, 문득 호수 바닥에서 뭔가가 보였다.
‘뭐지?’
물결의 방향과 수초 때문에 금세 사라졌지만, 한순간 아주 반짝이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미아가 재빨리 머릿속으로 원작을 뒤졌다.
‘아. 설마?’
마침 떠오르는 게 있었다.
‘일단 나중에 다시 와 보자. 슬슬 사람들이 구하러 올 때야.’
주변을 살피던 미아가 조심스레 세레니티의 입에 손을 넣었다. 마법석을 빼내기 위해서였다.
세레니티의 눈동자가 당황으로 떨렸으나, 그녀는 이내 표정을 다잡았다. 그리고 크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순순히 입을 벌렸다.
‘날 믿어 주는구나.’
가슴이 뭉클했다.
‘너는 꼭 살려 줄게, 렌.’
미아는 다짐과 함께 두 사람 곳의 마법석을 호수 바닥으로 던졌다. 혹시나 하고 챙겨 둔 방어 마법석도 함께 버렸다.
마법석을 버리자마자 두 사람의 얼굴을 감싸고 있던 공기 방울이 터져 나갔다. 물속에서 눈을 뜨지 못하는 세레니티는 미아에게 더 강하게 매달렸다.
미아는 그들을 구조 요원이 물에 뛰어드는 것까지 확인한 뒤, 입을 벌리고 물을 들이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