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그때도 테레지아는 크라우스 공작가를 들먹였고, 그때 한 번뿐이지만 테레지아는 세레니티를 놓아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미아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세레니티는 복잡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미아. 제 말은 그런 게 아니었어요. 저 역시도 카르디날레 양이 함부로 제게 손대지 않으리란 건 알고 있었어요. 미아의 말마따나 황태후 폐하께서 제 뒤에 계시니까요. 제 말은, 미아가 다칠 뻔했다는 뜻이었어요.”
“엄…….”
하지만 안 다쳤는데.
그 말을 할 분위기가 아니란 것 정도는 미아도 알았다. 옆에서 페르디안 역시도 슬쩍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으니 말이다.
미아는 머리카락을 꼬며 시선을 피했다.
“그……. 뭐……. 예……. 으으음…….”
“저는 미아가 위험한 행동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저를 감싸려는 마음은 고맙지만, 미아가 저 대신 다치는 건 제가 바라는 게 아니에요.”
세레니티는 딱 잘라 말하고서 미아를 똑바로 응시했다.
정면에서 들어오는 바르고 맑은 시선.
‘……이걸 어떻게 이겨…….’
미아는 머리카락을 꼬던 것을 멈추고 저도 모르게 양손을 모았다.
“노력은 해 보겠습니다아…….”
“약속이에요.”
세레니티가 빙긋 웃었다. 대화가 마무리되자, 옆에서 내내 침묵하고 있던 페르디안이 곧장 입을 열었다.
“인사가 끝났으면 따라오도록.”
그의 말에 미아가 움찔했다. 왠지 이렇게 될 것 같아서 시간을 끌고 있었는데, 역시 페르디안에겐 통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설마 진짜 아딜한테 이르려는 건 아니죠?”
“이르는 게 아니라 보고다. 너는 소속이 없고 상관이 없으니. 네가 벌인 일은 폐하께 바로 보고가 들어간다.”
“……한번만 봐주시면…….”
“안돼.”
“…….”
고지식한 놈.
미아는 울상을 지으며 터덜터덜 페르디안의 뒤를 따랐다.
* * *
레벤토르의 중앙 궁에서 빠져나온 테레지아는 나선 정원 중앙에 도착했을 때 우뚝 멈춰 섰다.
“아아아아악!”
그리고 그녀는 악에 찬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아가씨……, 아악!”
보다 못한 시녀 한 명이 그녀를 달래기 위해 다가갔으나, 오히려 테레지아의 우악스러운 손에 머리채를 잡혔다.
“이 천것이! 넌 나를 돕지 않고 뭐 했어!”
“아, 아악! 살려 주세요, 아가씨!”
“죽여 버릴 거야, 미아 셀레스티얼!”
테레지아는 굵은 반지를 낀 채 시녀에게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주변에 그녀의 다른 시녀들이 있었지만 누구도 그것을 말리지 않았다.
행인들 역시 ‘카르디날레의 멧돼지가 또 저러네’ 하고 멀찍이 돌아갈 뿐이었다. 시녀는 결국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테레지아는 그제야 분이 풀린 듯이 시녀를 놓아주었다.
“시녀란 것들이 쓸모가 없어!”
“아이, 아가씨. 너무 노여워 마세요.”
그제야 가장 경력이 긴 시녀인 메이가 따라붙었다.
“날파리 하나가 앵앵거릴 뿐인데, 우리 아가씨 피부 상하실라!”
“넌 그딴 소리가 나와? 내가 걔한테 무슨 수모를 당했는데!”
“수모요? 무슨 수모요? 우리 아가씨가 금방 복수하실 건데! 자아, 그보다 바로 돌아가시는 것보다 스카발 거리에라도 들르시는 건 어때요?”
“스카발 거리는 왜!”
스카발 거리는 고급 양장점이 모여 있는 거리였다. 메이는 어린아이를 달래듯 말했다.
“왜긴요! 곧 황실이 주최하는 호수 야유회잖아요. 최대한 아름답게 꾸미셔서 폐하를 돌아보게 하셔야지요! 스카발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프뤼게 양장점에 가서 가장 비싼 드레스를 맞추시는 거예요. 그럼 폐하도 아가씨를 달리 보실걸요?”
그 말에 테레지아가 멈칫하더니, 이내 뺨을 붉혔다.
“……그럴까?”
“물론이죠! 폐하께선 그냥 저 걸레 같은 계집애한테 잠시 홀려 계신 것뿐이에요. 하지만 어디 그게 오래 가겠어요? 모든 걸 다 가진 영애가 옆에 있다는 걸 알면 폐하도 마음을 고쳐먹으실 거예요!”
“……그렇겠지? 솔직히 내가 부족한 게 뭐가 있어?”
“암요, 암요!”
“그래. 그럼 스카발 거리로 가자꾸나!”
순식간에 다시 기분이 좋아진 테레지아는 한결 상쾌한 걸음걸이로 마차로 향했다.
그러다 문득, 번개처럼 그녀의 머릿속에 작년 호수 야유회가 떠올랐다. 정확히는, 그때 황궁의 보트 관리인이 자신에게 굽신대며 했던 말이.
‘제가 황궁에 들어온 것도 카르디날레 공작가의 소개장 덕이었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테레지아 님께는 가장 좋은 보트를…….’
거기까지 생각한 테레지아가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진홍색 눈에 광기가 차올랐다. 마치 하늘이 자신을 돕고 있는 것 같았다.
호수라니.
누구 하나 빠져 죽어도 이상하지 않잖아?
* * *
미아는 입을 삐죽 내밀고 페르디안의 뒤를 따라 의료원을 나섰다.
‘아딜이 알면 또 잔소리할 텐데.’
복도를 걸으며 미아의 머릿속에서는 어떻게 약을 팔아서 이걸 무마할지에 대한 생각이 바쁘게 오갔다. 그 바람에 그녀는 페르디안의 말을 놓치고 말았다.
“……곳은?”
“네?”
미아가 뒤늦게 고개를 쳐들었다. 짜증을 내거나 한심하다는 시선을 보낼 줄 알았던 페르디안은 의외로 담담히 다시 말해 주었다.
“다친 곳은?”
“아……. 없어요!”
“그럴 리가 없지.”
“네?”
“부축은 필요 없나 보군.”
페르디안은 그렇게 말하곤 다시 걷기 시작했다. 멈춰 서 있던 미아가 다시 쭐레쭐레 그의 옆에 섰다.
“저어…… 페르 님? 이쪽은 아딜 집무실 방향 아닌데.”
“안다. 지로티 공께 가는 거니까.”
미아가 두어번 눈을 깜빡였다.
“저 진짜 안 다쳤는데…….”
그제야 페르디안은 걸음을 멈추고 미아를 돌아보았다. 그는 약간 의아한 눈치였다.
“정말로 다치지 않았다고? 허세가 아니라?”
“네! 다 피했거든요!”
“……피했다고?”
……전혀 믿지 않는 얼굴이군.
“막 주먹이 날아오긴 했지만! 진짜로 다 피했다니까요? 제가 동체 시력이 좀 좋아서!”
미아는 입으로 바람 소리까지 내가며 주먹질하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페르디안은 단호했다.
“그럴 리가 없다. 카르디날레 공작 영애와 싸운 사람은 반드시 어딘가를 다쳤으니까. 외상이 없다고 무시했다가 뒤늦게 뇌출혈로 위험해진 사례도 있다.”
“…….”
허공에 휘두르던 미아의 주먹이 멈췄다.
테레지아, 무시무시한 아이…….
아무래도 테레지아는 황궁에서 정말로 백전백승의 사교계 쌈닭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정말로 다 피했어요! 확인해 보실래요?”
“확인―”
“보세요! 몸통은 못 뒤집지만 팔도 멀쩡하고…….”
덥석.
당장 소매를 끌어올린 미아의 팔을 페르디안이 붙잡았다. 잿빛 눈에는 당황이 떠올라 있었다.
“이런 곳에서 그렇게 함부로 살갗을 내보이면 안 된다는 교육을 셀레스티얼 백작이 해 주지 않던가?”
매우 빠른 속도로 내뱉어진 페르디안의 말에 미아는 멀뚱멀뚱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갸름하고 고운 얼굴 위로, 흐린 날의 구름 같은 잿빛 눈이 지근거리에 있었다.
……페르?
미아가 소리 없이 입을 벙긋거린 순간.
페르디안의 속눈썹이 약간 떨리는가 싶더니, 휙 고개를 돌려 버렸다.
“……예고 없이 몸에 손대서, 미안하군.”
까닭 모르게 조금 불안정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미아는 저도 모르게 그에게 붙잡혔던 팔을 만지작거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 뭐……. 페르 님인데 어때요.”
“……너는 발언에 좀 더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이보다 더 신중할 순 없는데…….”
미아의 멋쩍은 대답을 끝으로 대화는 더 오가지 않았다.
‘분위기가 어쩐지…… 어색해.’
하필이면 오늘따라 복도에는 지나다니는 개미 한 마리 없었다.
페르디안은 복도에 새로 생긴 석고상처럼 서서 오래 침묵했다. 꼭 뭔가를 망설이는 사람처럼 가끔 그녀를 흘끔거리는 게 느껴졌으나, 미아는 굳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다 페르디안이 마침내 몹시 경직된 상태로 한마디했다.
“식사를…… 거르는 건 아니겠지.”
“…….”
그리고 미아는 어쩐지 김이 빠졌다.
‘밥 먹었느냐는 말이 이렇게 어렵게 꺼낼 말인가?’
그냥 안부 인사에 불과한 것을.
‘동물 복지는 중요한 거지. 암.’
애써 이상한 곳으로 생각이 튀지 않게 갈무리하며 미아는 능청스레 웃었다.
“원래 마른 몸이에요! 고열량 음식으로 알차게 챙겨 먹는데, 좀처럼 찌지는 않더라고요?”
“그래서 그렇게 단 걸 찾나.”
“그건 그냥 맛있어서……. 나중에 페르 님도 같이 드실래요? 저번에 사다 주신 코코니의 딸기 크림 케이크 진짜 맛있어요!”
거절할 줄 알았는데. 페르디안은 잠깐의 침묵 뒤 의외로 부드럽게 답했다.
“생각해 보지.”
뜻밖의 대답에 미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고, 페르디안은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혹시 폐하께 무슨 짓을 한 건 아니겠지.”
갑자기 나온 아딜로트의 이름에 미아가 화들짝 놀라 물었다.
“네? 폐하가 왜요?”
페르디안은 입술을 달싹거리더니, 한숨과 함께 말했다.
“요즘 폐하께서 약간 생각이 많이 보이시길래 물어봤을 뿐이다. 근래엔 황태후도 잠잠하고, 대신들도 그리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니……. 남은 건 너밖에 없더군.”
“사람을 문제아 취급하는 그 소거법에는 좀 이의를 제기하고 싶지만, 아무튼 전 아무 짓도…….”
그 순간 미아의 머릿속에 아딜로트와의 마지막 대화가 쏜살같이 스쳐 지나갔다.
‘말마따나 여기는 다 저를 황제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애로 알고 있는데 부끄러워서 어떻게 돌아다녀요! 저도 자존심이 있지!’
잘만 움직이던 미아의 입이 조개처럼 딱 닫혔다.
‘너무 대놓고 망명을 시도했나……? 비밀리에 했어야 했나……?’
땀을 삐질 흘리는 미아를 보며 페르디안은 알 만하다는 듯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짚이는 데가 있나 보군. 알았으면 당분간은 얌전히 있도록. 안 그래도 골치 아픈 일이 있을 예정이니 너까지 그분을 귀찮게 하지는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