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다친 의원들을 포함해 의료원의 사람들 전부가 감탄한 얼굴로 이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물론 세레니티도 마찬가지였다.
“하아…….”
미아가 내심 한숨을 쉬었을 때였다. 테레지아 카르디날레가 불시에 손을 뻗었다.
“아……!”
그와 동시에 방심하고 있던 세레니티의 금빛 머리채가 테레지아의 손에 잡혔다.
“……하! 그래, 네가 문제네. 폐하랑 관계 없이, 네 존재 자체가 짜증이 나는 거였네!”
테레지아는 반쯤 미친 것 같았다. 그녀는 어느새 가슴에 꽂고 있던 장미 브로치를 뜯어내, 뾰족한 핀 부분을 세레니티의 눈에 겨냥하고 있었다. 실성한 듯한 붉은 눈이 미아를 노려보았다.
“폐하 옆에서 떨어지겠다고 말해. 그러지 않으면 세레니티 듀레인의 눈을 찔러 버릴 거야.”
미아의 얼굴에서는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러게 빨리들 피하지.’
하지만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다음 순간 미아의 입술 사이로 서늘한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해 봐.”
* * *
테레지아는 잠시 자신이 뭘 들은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뒤통수를 한 대 맞은 얼굴로 서 있는 그녀를 향해 미아 셀레스티얼이 말했다.
“어디 해 보세요, 카르디날레 양.”
“너 지금 내가 못할 것 같아?”
“아니? 내가 아는 테레지아라면 할걸?”
미아가 다시 까르르 웃었다.
“근데 만약 네가 진짜로 렌을 찌르면.”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책상 위에서 작은 칼 하나를 찾아내 움켜쥐었다. 그리고 물 흐르듯이 그것을 자기 목을 향해 가져다 댔다.
“그럼 난 나를 찌를 거야!”
명랑한 목소리에 테레지아의 입이 멍청히 벌어졌다.
“……뭐?”
“그리고 난 네가 황제의 애완동물을 해쳤다고 폐하께 이를 거야! 무려 황제의 소유물에 손을 댄 죄는 당연히 네가 받겠지?”
“헛소리하지 마! 자기를 해치는 게 쉬울 것 같아!?”
테레지아가 외쳤다. 카르디날레 공작가는 무가고, 그래서 그녀는 많은 기사를 보아 왔다. 자신의 몸이 다치는 두려움을 이겨 내는 건 결코 쉬운 게 아니었다.
그러나 미아는 큰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배시시 웃기 시작했다.
“당연히 어렵지! 그래서 지금 내가 못 할 것 같아?”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깜빡이지도 않고서 테레지아를 향해 한 걸음 다가왔다.
“그럼 어디 한번 해 봐.”
“이, 이…….”
“응? 해 봐! 내가 할 수 있는지 못하는지 한번 보라고.”
“이 미친 계집애!”
“동족혐오 하니?”
미아는 그렇게 말하며 꽃송이라도 피어나듯 환하게 웃었다.
“그럼 어디 누가 이 구역에서 제일 미쳤는지 보자고!”
그 미소가 어찌나 함박웃음이었던지, 뭐 좋은 일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돌았어!’
그녀를 지켜보던 테레지아의 등골에 땀이 흘렀다. 테레지아는 지금껏, 사교계에서 자신보다 더 막무가내인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사교계에서는 누구나 예의와 교양을 지켜서 행동했다. 그래서 테레지아는 포식자처럼 그들 사이의 규칙을 무시하고 왕처럼 군림할 수 있었다.
그런데, 눈앞의 여자는 달랐다.
“해 보라니까?”
일견 달콤해 보이는 분홍색 눈은 깜빡이지조차 않았다. 정말로 자신이 세레니티 듀레인을 찌르자마자 반응하기 위해 대비하고 있는 것이다.
어마어마한 집념이 느껴졌다.
나는 어차피 잃을 게 없다.
너 죽고 나 죽자.
내 인생이 조져지는 한이 있더라도 너는 조지고 간다……는, 강렬한 집념이 말이다.
테레지아는 당황으로 몸이 굳었다. 협박이나 할 생각이었지, 진짜로 찌를 생각은 없었으니까.
“네, 네 계획대로는 안 될걸!? 여기 사람이 몇인데 그딴 날조를…….”
“글쎄? 여기 있는 의원들이 과연 네 증언에 말을 보탤까?”
흥얼거리듯 하는 말에 테레지아가 흠칫했다.
‘그러고 보면 최근 미아 셀레스티얼이 의원 한 명의 목숨을 살렸다고 했지.’
그 말이 맞았다. 미아는 엠브라를 구한 공로 때문에 의원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았다. 미아가 천연덕스럽게 이어 말했다.
“그리고 너도 알겠지만, 이 의원들은 모두 크라우스 공작가가 심혈을 기울여 길러낸 인재들이야. 그런 사람들을 협박하고, 일터에서 깽판을 쳐? 너 그러고도 멀쩡할 것 같아?”
“읏……!”
“게다가 네가 지금 찌르려고 하는 세레니티 듀레인은 황태후 폐하께서 입궁시킨 영애야. 그걸 모르진 않을 텐데…….”
미아는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물었다.
“너 어디까지 가려고 그래?”
미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테레지아가 주변으로 홱 고개를 돌렸다.
원래 테레지아가 시선을 주면 아랫것들은 눈을 피하기 바빴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의원들은 전부 가자미눈을 하고서 그녀를 보고 있었다.
평소대로였다면 무시하면 그만일 시선이지만, 모든 게 너무 안 좋게 맞물렸다.
“큭…….”
테레지아가 이를 악물었다.
솔직히 말해서 황제는 그리 문제가 아니었다. 아딜로트는 공식적으로 반기를 드는 게 아니라면 어느 정도는 봐주는 편이었으니까.
‘하지만 크라우스 공작가와 황태후는 달라.’
크리소르 황태후의 성정이 얼마나 포악한지는 이미 사교계에 악명이 자자하다. 게다가 그녀의 친가인 크리소르 공작가는 절대 무시할 수 있는 세력이 아니었다.
‘이 여자를 손댔다가 황태후에게 대들었다고 일이 커지면…….’
테레지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금까지 아딜로트를 넘보는 수많은 영애들을 짓밟아 왔지만, 황태후의 바로 아랫사람을 건드린 적은 없었다.
아무리 방약무인해도 지켜야 할 게 있으니까.
‘분명 물러나는 게 좋을 때야.’
……하지만 그냥 물러나기엔 너무 열이 뻗쳤다.
반역자의 딸 주제에, 눈앞에서 태연하게 방글방글 웃는 꼴이.
욕을 들어도 태연하고, 몸싸움은 걸 수조차 없다. 어디에서도 이런 굴욕은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웃기지 마!”
눈을 사납게 치뜬 테레지아가 노호성을 쳤다.
“윽!”
그리고 세레니티의 머리채를 잡아 올려, 미아를 향해 밀쳤다. 피하려던 미아는 반사적으로 세레니티를 끌어안고 말았다.
‘그럴 줄 알았어!’
테레지아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럼 너한테 손대면 되겠지!”
그녀는 따라붙듯이 미아를 향해 손을 휘둘렀다. 그 와중에도 미아가 눈을 부릅뜨고 자신을 노려보는 것이 보였지만, 조금 때려 주면 고분고분해질 것이다.
그때였다.
“아악!”
시야 바깥에서 뭔가가 불쑥 튀어나와 테레지아의 팔을 후려쳤다.
* * *
“뭐하는 짓이지?”
미아는 눈앞의 등을 바라보며 잠시 멍해졌다.
‘아딜?’
하지만, 생각했던 은발은 아니었다.
눈앞에 있는 건 하나로 묶은 단정한 흑발.
페르디안이었다.
‘……왜 아딜일 거라고 생각했지?’
미아가 머쓱하게 세레니티를 끌어안았다.
‘남주라서인가? 여자주인공이 위험에 빠졌을 때 구해 주는 건 남자주인공의 역할이니까…….’
미아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절대 자신이 위기의 순간에 저도 모르게 아딜로트를 떠올린 게 아니다.
‘페르도 렌한테 점수 좀 따게 해 줘야겠지?’
미아가 가만히 뒤로 물러나자, 당장 엠브라가 달려와 미아를 살폈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괜찮아요. 엠브라가 불러와 준 거예요?”
“네! 우연히 후작 각하를 마주쳐서…….”
“무슨 짓이냐고 물었다.”
페르디안은 싸늘한 음색으로 테레지아에게 물었다. 손에는 그가 늘 허리춤에 차고 다니던 검이 검집째 들려 있었다. 아무래도 그것으로 테레지아의 팔을 후려친 듯했다.
“……주제도 모르고 짖는 짐승에게 교육을 좀 시켜 주고 있었을 뿐입니다, 키토 후작 각하.”
테레지아는 이를 뿌득 갈며 얻어맞은 팔을 붙잡았다.
“교육?”
페르디안이 냉소했다. 드문 일이었다. 그는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니까.
‘어째 평소랑 조금 다른데?’
미아는 세레니티를 끌어안은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대가 함부로 교육하니 마니 지껄일 상대가 아니다.”
“교육이 안 되어 있던데요. 폐하께 이를 드러낼 수도 있지 않나요? 저는 폐하를 위해―”
“폐하를 위해서라면 폐하의 소유물에 이를 드러내지 말았어야지.”
“그게 후작 각하의 충심인가요? 저는 폐하께서 저딴 계집에게, 흡!”
순식간에 페르디안의 검집 끝이 테레지아의 턱 밑까지 와닿았다.
“그대는 폐하를 위한다 말하면서 폐하의 눈은 의심하는군.”
보지는 못하지만 미아는 지금 페르디안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알 수 있었다. 잿빛 눈을 내리깐 채, 언젠가 미아에게도 보였던 경멸 섞인 시선을 하고 있으리라.
하지만 테레지아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기사가 숙녀에게 검을 들이대다니! 후작 각하가 저를 위협했다고 아버님께 고하겠어요!”
그 말에 페르디안이 짧게 웃었다.
“해 보시지.”
“뭐라고요?”
“어디 한번 카르디날레 공작가의 기사를 전부 데려와 보도록.”
그는 굳은 테레지아의 턱에서 검집을 내렸다.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여기는 기색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라지푸트와의 전쟁에서는 머리털 하나 보이지 않았던 그 잘난 정예기사들의 실력이 어떤지, 나 역시 몹시 궁금하군.”
“……!”
목소리 끝에 묻어난 점잖은 빈정거림에 테레지아가 입술을 깨물었으나, 끝끝내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켜보던 미아는 원작에서의 내용을 떠올렸다.
‘하기야 카르디날레 공작가의 세가 약해진 이유가 그거였지.’
명문무가라고 선전은 있는 대로 해 놓고, 정작 라지푸트와의 전쟁에는 기사를 내보내지 않았다. 아딜로트는 그 불리한 전쟁에서 이겨 단숨에 세를 확장했고 말이다.
‘기사 중의 기사. 기사도의 귀감이라고 불리는 페르디안 입장에서 카르디날레는 이미 기사 실격이지.’
미아가 생각에 잠겨 있는 찰나, 페르디안이 뒤로 돌아 미아를 바라보았다.
‘렌을 살피는 건가?’
그렇게 생각한 미아는 얌전히 세레니티 뒤로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