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그래?”
아딜로트는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어처구니가 없기야 했지만 그간 크리소르가 그런 식으로 여자 암살자를 보낸 적이 종종 있기에 새삼스럽진 않았다.
반면 미아는 정말 싫은 눈치로 질색팔색을 하며 울상 지었다.
“더 예쁜 짓 해서 폐하의 신임을 얻으라고……. 진짜 말도 안 되는 소리!”
“왜 안 되는데?”
“네?”
“왜 말이 안 돼?”
태연하게 물었지만 그는 내심 대답을 기다렸다. 무슨 대답을 기대하는지는 그 자신도 알 수 없었지만.
그러나 미아는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신임이 그런 걸로 얻어지는 건 아니잖아요?”
아.
너무 정론이라 아딜로트는 잠시 말을 잊었다.
“그건…… 그렇지.”
“물론 중요할 수도 있겠지만, 아딜은 그런 거에 휘둘릴 성격이 아니니깐!”
자신을 향한 굳건한 신뢰가 느껴지는 발언이었다. 그는 조금 복잡한 심정으로 침묵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그 여자가 계속 찾아오는 게 곤란하다는 거지.”
“네엥…….”
“가자. 해결해 줄 테니까.”
“헉.”
아딜로트가 그렇게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미아는 먹이를 발견한 토끼처럼 눈을 빛내며 쪼르르 그의 뒤를 따랐다.
때마침 블라시하 남작 부인이 미아를 만나기 위해 방문한 시간이었다. 아딜로트는 평소처럼 코트를 느슨하게 어깨에 걸친 채, 팔짱을 끼고서 그녀가 있는 응접실에 들어섰다.
“블라시하 남작 부인.”
“폐, 폐하!”
예상치 못한 이의 등장에 적발에 흑안을 가진 여인이 급하게 몸을 숙였다.
“오르퀘니나의 지고하신 달을 뵙습니다.”
뒤에서 미아가 예쁘다, 하고 감탄사를 흘리는 게 들렸지만, 아딜로트의 눈에는 그리 예쁘게 보이지도 않았다. 그는 용건만 간단히 하기로 했다.
“황태후가 보냈다지.”
“예, 폐하.”
블라시하 남작 부인이 요염하게 답했다.
“여인들에게는 여인들만의 방법이 있는 법이지요. 눈빛 하나만으로도 상대를 애타게 만드는 그런 방법 말입니다. 미아 님은 지금도 아름다우시지만, 제게 가르침을 받으시면 더 성숙하고 아름답게 피어나실 거예요.”
아딜로트가 심드렁히 고개를 기울였다.
“그거 말인데.”
“예.”
“지금도 귀여우니까 됐어.”
“……예?”
“지금도 만족한다고.”
당황한 티가 역력한 블라시하 남작 부인을 앞에 두고 아딜로트는 태연히 말했다.
“여기서 성숙해지기까지 하면 내가 진짜 미쳐 버릴지도 모르니까 안 와도 돼.”
“…….”
그 순간, 미아는 아딜로트의 뒤통수를 후려칠 무기를 찾기 시작했다.
* * *
다행히 이다 블라시하 남작 부인은 더는 찾아오지 않았다.
‘으. 방법이 조금 그렇긴 하지만, 어쨌든 그게 최선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혹시 더 찾아올지 모른다는 말에 미아는 하루 종일 아딜로트의 집무실에 붙어 있게 되었다. 아딜로트는 방해도 이런 방해가 없다고 말하면서도 바로 황궁 요리장을 불렀다.
“케이크 가져와.”
“미아는 생크림 딸기 케이크가 좋더라.”
“생크림 딸기 케이크로.”
산더미 같은 생크림 딸기 케이크를 먹으며 미아는 집무실에서 빈둥빈둥 시간을 죽였다.
일련의 사건 이후, 아딜로트가 자신에게 보이는 태도가 대단히 유해진 덕이었다. 확실히 자신은 그의 편으로 받아들여진 모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단정한 노크가 아딜로트의 개인 집무실에 울려 퍼졌다. 미아는 소파에 누워 있다가 반짝하고 고개를 들었다.
“폐하. 접견 요청입니다.”
들어온 것은 페르디안이었다.
“오늘 남은 일정엔 그런 게 없는데.”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폐하의 애완동물에게 접견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네?”
미아가 짧똥한 소리를 냈다. 자신을 보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목적이 뻔했다. 황태후가 보냈을 것이다.
같은 생각을 했는지 아딜로트가 물었다.
“황태후 쪽 인사인가?”
“그렇다고 합니다.”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페르디안의 반응에서는 약간의 미진함이 엿보였다.
‘그 페르가? 신기하네.’
아딜로트가 고개를 끄덕이곤, 서류를 정리했다.
“일단 들여보내.”
“예.”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문이 열렸다.
그러더니 빛이 걸어왔다…….
‘……아니! 빛이 아니라!’
정확히는 후광을 두른 사람이었다. 눈을 감았다 뜬 미아가 경악했다.
“세레니티!?”
들어온 인물은 세레니티 듀레인이었다.
이 소설의 여자주인공. 그리고 지금 듀레인 남작가에 있어야 할 인물이었다.
‘세레니티가 왜 여기에?’
원작에서 세레니티가 크리소르 황태후와 연이 있다는 말은 없었다. 두 사람은, 정확히는 크리소르가 세레니티를 잡아먹으려 들기 바빴다. 그녀에게 세레니티는 원수 아딜로트가 사랑하는 여자였으니까.
그러니까 아직은 두 사람이 아무 관계도 아니어야 맞는데…….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처음으로 보는 남자주인공과 여자주인공의 투샷이었다. 미아가 감탄을 흘렸다.
‘둘 다 진짜 예쁘다……. 옆에 서면 나는 보이지도 않겠다!’
은발에 붉은 눈을 가진 아딜로트와 금발에 금빛 눈을 가진 세레니티.
다이아몬드, 금, 루비를 모아놓은 것 같은 조합에 눈이 부셨다. 그래서인지 미아는 자꾸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원래 두 사람의 만남은 장미 정원에서인데……. 이 소설은 망했어…….’
가장 먼저 움직인 사람은 세레니티였다.
“지고하신 오르퀘니나의 달을 뵙습니다.”
세레니티는 차분하게 다가와, 우선 아딜로트에게 인사했다. 아딜로트는 그것을 받아 주지 않고 미아에게 눈짓했다. 네가 찾던 걔 아니냐는 물음에 미아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황태후 폐하께서 저를 미아 님께 보내셨습니다.”
“무슨 목적으로.”
“미아 님이 황궁에서 홀로 외로워하고 계시니 말벗을 해 주길 바란다고 하셨답니다.”
아딜로트가 심드렁히 턱을 괴었다.
“그건 내가 내 반려동물에게 소홀했다는 뜻인가?”
“저는 그저 태후 폐하의 말씀을 전해 드릴 뿐입니다. 해석에 관해서는 제가 관여할 여지가 없지만…….”
그렇게 말한 후, 세레니티는 싱긋 미소 지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속담을, 폐하께서는 알고 계시는지요?”
“하?”
아딜로트의 입꼬리가 삐딱하게 올라갔다.
‘세레니티야!’
미아는 혼절하고 싶어졌다. 여자주인공의 말싸움 공격력이 심상치 않다.
“발언에 책임을 질 수 있나, 세레니티 듀레인? 그건 마치 제국의 황제를 도둑에 비유한 것처럼 들리는데.”
“그리 느끼셨다면 사죄드립니다. 미아 님을 위하는 마음이 과해 무례를 저지른 모양입니다.”
미소 짓는 세레니티와 심드렁한 아딜로트.
그 사이에서 미아만이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이렇게 되면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미아가 말벗을 거절했을 때 크리소르가 세레니티를 어떻게 할지 짐작하기 어려웠으니까.
‘렌이 크리소르 편으로 돌아선 걸까? 하지만 렌은 그럴 성격이 아닌데……. 크리소르는 렌에게 어디까지 말한 거지?’
이 상황이 무슨 상황인지 생각하던 미아가 문득 멈칫했다.
집무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지만, 그중 가장 살벌한 사람이 세레니티 뒤에 있었다.
페르디안이었다. 그는 문 앞에 서서 냉연한 태도로 세레니티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아딜로트의 기사니까 당연한 일이었지만 문제라면, 그 손이 검 손잡이에 올라가 있다는 점이었다.
‘쟨 진짜 수틀리면 바로 검부터 휘두를 놈이야!’
미아가 앞뒤 가리지 않고 외쳤다.
“페, 페르!”
그 바람의 모두의 시선이 미아에게 향했다. 페르디안의 잿빛 눈을 마주한 미아가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베, 베면 안 돼요……!?”
“…….”
잠시 놀란 듯했던 페르디안이 이내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뭐 어떠냐는 듯이.
‘이 새끼. 벨 생각 만만이었잖아!’
미아가 좀 더 강하게 말했다.
“약속했잖아요!”
그녀의 외침에 페르디안이 눈을 한번 깜빡였다. 일전에 그는 미아의 부탁을 하나 들어주기로 한 적이 있었다.
그것을 떠올렸는지, 페르디안은 지긋이 미아를 바라보다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검 손잡이에 올라가 있던 손도 아래로 내려왔다.
‘천만다행…….’
미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반면 아딜로트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약속?”
미아에게 물은 것이 아니었다. 그의 시선은 묘하게 날이 선 채 페르디안을 향하고 있었다.
페르디안은 잠시 침묵한 뒤, 담담하게 답했다.
“사적인 일입니다.”
“그러네. 제법 사적이네. 이름도 막 부르고.”
“핫.”
미아가 잽싸게 입을 가렸다.
‘페르가 이름으로 부르라고 한 적은 있었지만, 계급장 떼고 애칭으로 불러도 된다고 한 적은 없는데!’
그런데 무슨 생각인지, 페르디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낮게 말했다.
“그 또한 사적인 일입니다.”
“……아. 그래?”
아딜로트의 얼굴에서 표정이 걷혔다. 살벌하리만치 예리하고 서늘한 인상이 드러났다.
‘왜! 너네는 또 왜 그러는데!?’
미아가 속으로 절규했다. 이제 눈으로 빚은 조각상처럼 싸늘하게 굳은 아딜로트는, 들은 적도 없이 냉랭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세레니티 듀레인. 잠깐 나가 있어.”
“송구합니다. 그럴 수 없어요.”
와 진짜 돌아 버리겠다.
너무나도 솔직한 감상이 미아의 머리를 점령했다.
‘세레니티, 미쳤어?’
세레니티는 당당했다.
“저는 폐하께서 미아 님을 금수로 취급하시는 것을 압니다. 그런 제가 어찌 자리를 비울 수 있겠어요?”
미아가 다물어질 줄 모르는 입을 가렸다.
어떻게 보면 세레니티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
집도 돈도 없는 여자아이가 생판 모르던 남자 집에 들어가 산다. 그것도 일은 잘하지만, 평판은 나쁜 남자.
이것만으로도 보통의 착한 언니들이라면 ‘그냥 우리 집에서 살아!’ 할 일이다.
그런데 그 남자가 여자아이를 매일 자기 침실에서 재운다?
다 같이 춤추는 곳에 데려가, 행동거지에 일일이 간섭한다?
그러다 버려 두고 간다?
‘쓰레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