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아딜로트는 더는 크리소르를 봐줄 생각이 없었다. 당장이라도 검을 들고 쳐들어가 목을 베어 버릴 생각이었다.
저도 모르게 흉흉한 기세를 내뿜었는지 궁내관인 슐츠 공작이 뒤로 물러나기까지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베일리가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미아 님이 스스로 드셨습니다.
“뭐?”
믿을 수 없는 소리에 심장이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약에 독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 엠브라 님을 구하고자 하셨습니다.
그 말에 아딜로트는 딱딱하게 굳은 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조각난 펜대를 쥐고 있는 손에는 어찌나 많은 힘이 들어갔는지 손이 새하얘지기까지 했다.
서류를 보는데도 글자가 읽히지 않았다.
“폐하…….”
보다 못한 슐츠 공작이 낮게 불러도 정신을 차리는 건 그때뿐.
그는 다시 끝없는 생각의 늪에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다 한참 뒤, 베일리가 돌아왔을 때.
―무사하십니다.
“하…….”
그제야 아딜로트는 떨리는 숨을 내쉴 수 있었다. 한동안 혈관 속에서 얼어붙었던 피가 겨우 다시 흐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미아 님이 돌아오셨습니다. 엠브라 테타 님의 진료를 받으셨으며, 몸에는 문제가 없다고 합니다.”
수석 시녀인 제인 고트샬크의 말을 듣고 나서야 아딜로트는 한 번 더 안심했다.
“……상태는?”
제인은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즐거워하고 계십니다.”
“뭐?”
“엠브라 테타 님을 구하셔서…….”
좀처럼 말꼬리를 흐리는 법이 없는 제인이 드물게도 허리를 꾸벅 숙이는 것으로 보고를 마쳤다.
그때부터 아딜로트는 폭발 직전의 인내심과 사투를 벌여야 했다.
당장 보러 갈까.
하지만 의심을 사기 쉽다.
베일리의 보고를 들으니 크리소르에게 첩자인 것처럼 행세한 모양이었다.
그러니 그 가장을 지켜 줘야만 했다.
하지만…….
뿌득.
“폐하. 손을 잠시 펴 주십시오.”
몇 번째인지도 모를 펜이 부서졌다. 삐걱대는 손가락을 펼치자, 슐츠 공작이 펜대 조각을 가져가 쓰레기통에 버렸다.
시계를 보니 아직도 한낮이었다.
참아야 했다.
적어도 모든 정무가 끝나는 저녁까지는.
“…….”
유독 오늘따라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기어가다 못해 멈춰 있는 느낌이었다. 그러다 불시에 누군가 아딜로트의 손아귀에 있던 서류를 빼앗았다.
“……?”
고개를 드니 슐츠 공작이 그것을 모아 정리하고 있었다.
“뭐하는 거지, 공작?”
“폐하의 손에서 서류를 구출하고 있습니다.”
그제야 잔뜩 구겨진 서류가 보였다. 슐츠 공작은 콧김을 내쉬며 서류를 탁탁 털었다.
“기밀 서류인데 이렇게 다루시다니요.”
“……화나는 내용이 적혀 있었을 뿐이야.”
“예. 새로운 미로미스 전로 덕에 철강 생산량이 급상승했다는 소식이 참으로 화가 나셨겠습니다.”
“…….”
“오늘 업무는, 제가 처리할 수 있는 건 제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내일 오전에 보고를 올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내가…….”
“올리버. 아무래도 폐하께서는 복통이 있으신 듯하니, 오늘은 일찍 주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저도 마침 그렇게 생각하는 중이었습니다, 공작 각하.”
궁내관이고 수석 시종이고 죽이 참 잘 맞았다.
“자, 자. 그러니 폐하는 어서 들어가서 쉬시지요.”
한 번도 남에게 결정을 맡겨 본 적이 없었던 아딜로트는 오늘따라 멍청하게 슐츠 공작의 말에 등을 떠밀려 집무실을 나섰다.
저녁 어스름이 깔리는 시간이었다. 침실에 들어섰을 때, 그는 눈앞의 광경에 멈칫하고야 말았다.
“아딜!”
미아가 침대에 앉아 있었다. 베개를 끌어안은 채, 다리를 달랑달랑 흔들며 말이다.
“오늘 제 활약 들으셨어요!? 어때요! 저 완전 잘했죠!”
기대에 찬 분홍색 눈이 반달 모양으로 접혀 눈웃음쳤다. 방 안에 들이치는 어둠 속에도 그녀의 흰 뺨에 보조개가 깊게 패는 것까지 똑똑히 보였다.
“…….”
무사해 보였다. 그걸 확인하고 나자 아딜로트는 온몸의 힘이 쭉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다른 감정이 차올랐다. 잇새 사이로 튀어나올 것 같은, 심장이 두방망이질치는, 온몸을 뜨겁게 만드는, 그런 감정이.
그는 성큼성큼 미아 앞으로 다가갔다.
“……아딜?”
제 얼굴을 본 모양인지, 미아가 베개를 끌어안은 채 어깨를 움츠렸다.
“……왜 그렇게 봐요?”
“…….”
그런 미아를 내려다보며, 아딜로트는 답답함에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너, 후…….”
그는 뭔가 말하려다, 깊은 한숨만 내쉬었다. 도저히 마음이 다스려지지 않았다. 몇 분의 시간이 그렇게 흐르고 나서야 아딜로트가 입을 열었다.
“너 무슨 생각이야?”
“……네?”
비꼬듯이 나온 그의 말에, 거의 피리 소리 같은 가냘픈 반문이 되돌아왔다. 아딜로트가 눈을 꾹 감았다 떴다.
“너 제정신이야?”
그의 말에 미아가 분홍색 큰 눈을 도로록 굴렸다.
“저기, 루비트 먹은 거 말씀하시는 거면, 저 일부러 해독제를 먹고…….”
“너 의원이야?”
“아니지만…….”
“그럼.”
“그치만, 엠브라를 살려야 했으니까…….”
“엠브라 테타는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어. 그리고 내가 언제 너한테 그런 거 하라고 했어?”
“그,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죽고 싶을 리 없으니까……!”
“그래. 죽고 싶을 리 없지. 그런데 넌 왜 그렇게 행동해? 꼭 죽고 싶은 사람처럼.”
“그, 그치만 저 용량도 용법도 잘 지켰―!”
“너한테 안 맞는 성분이 있었으면?”
타당함을 위시한 송곳 같은 말에 미아는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입을 빠끔거렸다.
“네가 신이라도 되나? 크리소르가 약에 다른 수를 썼을 생각은 안 해 봤고?”
“…….”
“크리소르가 아니라 그 쿠아쉬란 자가 그랬을 수도 있어. 네가 그 모든 걸 대비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
마지막에 가서 아딜로트의 목소리는 억눌린 고함에 가까워졌다. 미아의 안색에 수심이 차올랐다. 급기야 내리깐 분홍색 눈이 젖어 드는 것도 보였다.
그 모습에 아딜로트의 가슴이 다시 답답해져 왔다.
“너 내가…….”
이렇게 말할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는 말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내가 그 얘기를 듣고…….”
그가 채 말을 잇지 못하고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내내 침묵하던 미아는 한참 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해요…….”
침실에 들어온 그를 맞이하며 명랑하게 웃던 때와는 다른, 잔뜩 풀 죽고 겁먹은 목소리였다. 아딜로트는 뒤늦게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을 차렸다.
상처 입은 얼굴을 하고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미아가 보였다. 꼭 무도회에서처럼.
“…….”
그는 앓는 소리가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얼굴을 가렸다.
“……몸은?”
“멀쩡해요. 괜찮아요.”
미아가 조곤조곤 답했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애쓰는 듯한 어조였다.
둘은 그 상태로 한참을 침묵했다. 주체할 수 없는 생각이 아딜로트의 내면에서 소용돌이쳤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이대로 대화를 끝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법이 과격했더라도, 미아가 엠브라를 구한 건 확실했으니까.
지로티 공작의 말에 따르면 해독제의 용법과 용량도 정확히 지켰다. 이전에 음독 사건 때문에 검사한 바로는 몸도 굉장히 건강한 편이라고 했다.
쿠아쉬 그윈이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황태후의 약에 장난질 쳐 놨을 리 없으니, 사실 그의 말은 억지에 가까웠다.
그걸 아딜로트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우선은, 잘했다고 해 줘야 했다. 이런 식으로 제 분에 못 이길 게 아니라.
망설이던 아딜로트가 천천히 손을 뻗었을 때였다.
“미아.”
“아딜은.”
미아가 나직하게 말했다.
말은 거의 동시에 나왔으나, 아딜로트는 어쩐지 그녀가 일부러 자신의 말을 잘랐다는 인상을 받았다.
미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자, 말간 분홍색 눈이 아딜로트를 담았다.
“사실 내가 싫어?”
조곤조곤 묻는 말에 아딜로트는 아주 느리게 호흡을 멈췄다. 어느새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해져 있었다.
“……가끔 보면 그런 거 같아.”
미아는 그렇게 말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의외로 상처받은 얼굴은 아니었다. 눈썹을 살짝 찌푸린 채, 뭔가를 깊게 생각하는 눈치에 가까웠다.
“……근데 사실 난 아딜이 나 싫어해도 괜찮아.”
왜?
아딜로트의 머릿속에서 그런 질문이 퐁 솟아났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입을 열기도 전에 미아가 혼자 고개를 주억거렸다.
“응. 괜찮아. 살아 있다는 게 중요한 거니까.”
마치 자기 자신에게 세뇌하듯 하는 말이었다. 이윽고 그녀가 배시시 웃었다.
“미안해! 앞으로는 안 그럴게. 하고 싶은 일 있으면 말하고 할게. 황제는 아딜이고, 난 지금 아딜 소유물이니까.”
“그런 의미가―.”
“되게 월권이었다. 그치?”
미아는 그렇게 말하고는, 침대 위를 뽈뽈 기어가 등을 보이고 누웠다. 그러고는 금세 고롱고롱 소리를 내며 잠들어 버렸다.
“하…….”
아니라고 말할 타이밍을 놓친 아딜로트만이 새벽까지도 잠을 이루지 못할 뿐이었다.
* * *
“잘하는 짓이다! 잘하는 짓일세! 어디 새끼 토끼 같은 게 겁도 모르고 독을 꿀떡꿀떡 삼키고 그러나!”
“아야! 아파요, 할아버지!”
며칠 뒤 찾아온 지로티 공작에게 미아는 정말로 등짝을 철썩철썩 얻어맞았다.
“다 살았는데!”
“살았어도!”
울먹이며 외치는 말에 지로티 공작이 눈을 부라렸다.
“의원도 아닌 게 무슨 배짱으로 그런 짓을 해! 간이 배 밖으로 나와도 정도가 있지!”
“그치만 살렸는데!”
“자네가 위험에 빠질 수도 있었잖나! 왜 자기 몸은 안 돌보는 게야!”
“아, 아, 아파요!”
“다른 독 마신 지도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나이 먹고 이 노인네한테 걱정이나 끼치고! 잘하는 짓일세!”
“……걱정하셨어요?”
“당연하지!”
지로티 공작이 왈칵 성을 내었다. 그는 그렇게 외치고서, 입술을 깨문 뒤 눈을 가리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하, 할아버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