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저는 정말 모르는 일입니다, 폐하. 제가 폐하를 독살하려 했다니요!”
“어허, 아직도 잡아뗄 생각을 해!”
“제가 폐하를 모신 지가 벌써 3년입니다. 크라우스 공작가의 후원으로 오리존 아카데미를 졸업한 제가 어찌 폐하께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이런 고얀!”
두꺼비같이 생긴 남자 의원이 다시 외쳤다.
“자네가 폐하께 처방해 주던 약! 그 약에 루비트 성분이 들어 있었지 않나!”
“네? 그럴 리가요! 억울합니다, 폐하!”
“허튼소리! 피부 각화증은 대표적인 루비트 중독 증상 아닌가!”
“그야 그렇지만, 저는 루비트를 넣은 적이 없습니다! 게다가 그렇게 저를 모함하는 당신은 대체 누구고요!”
“나는……!”
“그만.”
그때 황태후가 손을 들었다. 그녀는 온후하게 웃으면서 사납게 남자를 향해 말했다.
“쿠아쉬 그윈. 내 앞에서 꽥꽥대지 마라. 한 번만 더 그랬다간 더는 입을 열지 못하는 몸으로 만들어 주마.”
“……예!”
한방에 쿠아쉬의 입을 다물게 한 크리소르가 엠브라를 돌아보았다.
“이자는 쿠아쉬 그윈. 오리존 아카데미 출신으로, 내 본가인 크라우스 공작가의 후원을 받은 의원이지. 내가 이자에게 약의 분석을 명령했고, 거기에 독이 섞여 있었다고 하는군.”
크리소르 황태후의 성정을 아는 엠브라는 잠자코 그녀의 말을 들었다.
“그래서…… 자네는 루비트라는 독을 내 약에 넣은 적이 없다?”
이윽고 크리소르 황태후가 그렇게 물었을 때.
“물론입니다. 제 명예를 걸고요!”
엠브라는 더할 나위 없이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이건 시간 끌기일 뿐이었다. 황제와 그의 수족들이 자신과 관련된 아주 작은 연관성까지도 끊어 낼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다.
‘내가 죽는 건 막을 수 없겠지만, 후회는…….’
그때였다.
“황태후 폐하, 손님께서…….”
시녀 한 명이 급하게 크리소르에게 다가가 귀엣말했다.
“뭐? 왜 지금…….”
“테타 의원을 부르는 자리에 같이 계셨다고…….”
크리소르의 아미가 일그러졌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듯 주변을 살펴보았다.
“……아니지. 좋은 생각이 났구나.”
곧 크리소르의 입매에 표독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들어오라고 해라.”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응접실의 문이 열렸다.
“그간 건강하셨는지요, 황태후 폐하!”
들어온 사람의 분홍색 머리카락을 본 순간, 엠브라는 더는 침착할 수 없었다.
“아가씨?”
미아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응접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 * *
“혹시 제가 방해했을까요?”
“아랫사람의 치기를 받아 주는 것도 윗사람의 덕목이지. 어서 오게.”
“감사합니다!”
미아는 방긋 웃으며 크리소르 황태후의 안색을 살폈다.
과연 크리소르의 상태는 예전보다 더 나빠져 있었다. 고혹적인 아름다움은 여전했지만, 옷으로 가려진 피부의 여기저기에 회색 얼룩이 져 있는 게 보였다.
‘피부 각화증. 루비트 중독 증상이야.’
크리소르의 상태를 확인한 미아는 그녀 옆의 남자를 살폈다.
‘쟤가 쿠아쉬 그윈이겠지?’
얼굴로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되지만, 그야말로 두꺼비처럼 생긴 남자였다. 꼼꼼하게 가운까지 입고 있는 부분에서 미아는 실소를 흘리지 않기 위해 애써야만 했다.
쿠아쉬의 옆에는 가로로 넓은 책상이 하나 있었는데, 그 위에 가죽 가방과 함께 여러 가지 약병이 놓여 있었다.
‘저게 엠브라의 약이랑 루비트 원액이겠지?’
현대와 달리 이곳에는 정확하게 성분을 검출하는 방법은 없다. 대부분은 증상을 보고 판단할 뿐이었다.
더군다나 루비트는 무색, 무미, 무취의 독.
쿠아쉬도 정말로 루비트가 쓰였는지, 얼마나 쓰였는지는 알지 못할 것이다. 그 점이 미아에게는 승리의 열쇠였다.
“이야기를 계속하지.”
미아가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크리소르가 입을 열었다.
“두 사람의 의견이 갈리는군. 한쪽은 넣지 않았다, 한쪽은 넣었다 주장하니…….”
다분히 의도적으로 말꼬리를 흐린 크리소르의 입매가 비틀렸다.
“역시 먹여 보는 게 좋겠군.”
“참으로 현명하신 생각입니다, 폐하!”
쿠아쉬 그윈이 득달같이 나섰다.
“엠브라 테타, 저자에게 자기가 지은 약을 먹게 하십시오!”
“어리석은 것. 자기가 쓴 독에 당하지 않도록 당연히 대비하고 있을 게 아닌가.”
“아! 그, 그럼 시녀 한 명에게 먹여 보시지요. 아니면 짐승 하나를 데려와 실험해 보셔도 제 말을 믿게 되실 겁니다!”
남의 목숨을 참으로 우습게 여기는 발언이었다. 그 와중에도 황태후 궁의 시녀들은 밀랍인형처럼 가만히 서서 움찔하지도 않았다. 마치 이런 상황이 아주 익숙한 듯했다.
‘원작에서도 크리소르는 곧잘 시녀들을 죽이곤 했으니까.’
미아는 역겨움을 느꼈으나 그를 내색하지 않고 마냥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좋겠지만…….”
크리소르가 말했다.
“셀레스티얼의 딸이여.”
여인의 녹색 눈이 찌를 듯 강렬하게 미아를 향했다. 마치 미아에게 겁먹을 시간을 주고 싶은 것처럼, 약간의 공백 뒤에 크리소르가 말했다.
“그대가 먹어 보지 않겠나?”
“폐하! 말도 안 됩니다!!”
당장 엠브라가 몸부림쳤다. 크리소르는 인상을 쓰며 기사들에게 손짓했다.
“시끄럽군. 재갈을 물려라.”
“폐, 읍! 으븝!”
엠브라는 곧 기사들의 손에 의해 재갈이 물렸다. 그녀의 갈색 눈에는 경악과 절망이 떠올라 있었다.
하지만 미아는 태연했다. 그녀는 크리소르가 이렇게 나올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크리소르는 쉽게 남을 믿지 않아.’
황궁 레벤토르에 들어온 이후, 미아는 딱히 아딜로트를 암살하려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일전에 셀레스티얼 백작이 건네준 맹독은 애초에 발견되자마자 수포로 돌아갔고 말이다.
그러니 황태후 입장에서는 미아가 의심스러울 만도 했다.
‘셀레스티얼 백작이 내가 사실은 반역을 돕지 않았다고 말했나 싶었지만, 그건 아닌 것 같고.’
백작이 왜 그걸 말하지 않았는지는 뻔했다. 오갈 데 없는 상황에 황태후에게 내쳐지기까지 하면 끝이니까.
‘나랑 황태후를 잇는 연결고리인데, 내가 가치가 없어지면 백작도 팽할 거 아냐.’
하지만 백작의 말만 믿기에는 부족하다. 크리소르는 확신이 필요할 터였다. 미아가 자기편이라는 확신.
미아는 엠브라를 물끄러미 보다가 황태후를 향해 말했다.
“폐하. 만약 제가 그걸 마시고도 무사하면…… 엠브라를 살려 주실 수 있나요?”
“난 아랫사람과 흥정하지 않네.”
“엠브라는 제가 황궁에 적응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 사람이에요. 저는 그녀가 황태후 폐하께 독을 먹이려 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내가 틀렸다는 겐가?”
미아가 고개를 저었다.
“폐하께 나쁜 말을 속삭인 사람이 틀렸다고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미아는 그렇게 말하고서 쿠아쉬를 바라보았다. 금세 쿠아쉬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지금 날 말한 거냐? 새파랗게 어린 계집애가……!”
“내 앞에서 소리 높이지 말라고 했다. 쿠아쉬 그윈.”
“하지만 황태후 폐하! 저자가 저를 의심했습니다! 저는 오리존 아카데미 출신인데 말입니다!”
그놈의 오리존 아카데미.
‘어차피 진짜도 아니면서.’
미아가 속마음을 삼킨 채,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간절한 눈으로 크리소르를 올려다보았다.
“황태후 폐하. 제가 이걸 마셔야만 제 진심을 증명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마시겠습니다.”
미아와 크리소르의 눈이 마주쳤다. 미아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황태후는 알아들었을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시험하려는 걸 알고 있고, 그걸 받아들일 생각이라는 것을.
일이 분여간의 침묵 후, 마침내 크리소르가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아랫것들이 자발적으로 충성심을 보이는 것을 마다하지 않지. 그대가 정말로 그 정도의 충심을 보인다면, 포상의 의미로 의원을 살려 주겠네.”
“폐……! 큽.”
학습 능력 없이 또 소리치려던 쿠아쉬 그윈은 크리소르의 살벌한 눈초리에 바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잠시 머리를 굴리는 듯했다가, 조신한 두꺼비처럼 답했다.
“태후 폐하의 결정이 참으로 옳으십니다.”
쿠아쉬가 그렇게 말한 뒤 재빨리 책상 앞에 섰다.
“그렇다면 당장 약을 먹여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마침 그녀가 만들어 놓았던 약이 여기 있으니…….”
쿠아쉬는 부랴부랴 여러 개의 병을 꺼내 합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엄청난 크기의 병을 들어 올렸다.
“모으면 이 정도군요! 이 정도라면 충분히 루비트의 증상이 나타날 것입니다!”
“읍! 읍읍읍!”
그것을 본 엠브라가 더 크게 몸부림쳤다. 미아 역시도 헛웃음을 칠 뻔했다.
‘그냥 먹고 죽으라는 거네!’
미아가 보기에도 터무니없이 많은 양이었다.
극미량의 독이라도, 아니, 독이 아니더라도 저 정도를 한 번에 마시면 급성 중독에 걸릴 법했다. 간이 하루에 해독할 수 있는 독의 양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크리소르도 그 정도 짐작은 했을 터였다. 그러나 그녀는 재밌다는 듯이 입을 찢어 웃었다.
“해독제는?”
“여기 있습니다.”
“자네가 말한 루비트의 급성 중독 증상이 나타나려면 몇 시간이 필요하지?”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마 30분이면…….”
“그렇다고 하는군, 미아 양.”
크리소르가 광기에 젖은 눈으로 말했다.
“어떤가? 마셔 보겠는가? 말해 두지만 죽을지도 모르네.”
“…….”
“그대의 충심을 증명할 수 있겠는가?”
크리소르가 강하게 말했다. 일부러 자신을 몰아붙이고 있는 게 분명했다. 만약 자신이 크리소르의 편이 아니거나, 사실은 아딜로트의 첩자라면 일말의 망설임이라도 보일 테니까.
하지만 미아는 가만히 손을 모은 뒤, 맑은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물론입니다, 황태후 폐하. 저를 믿어 주시겠어요?”
“…….”
크리소르는 약간 당황한 듯 보였다. 반면 쿠아쉬는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
“흥, 충심은 가상하군! 황태후 폐하께 충성하는 마음은 기특하니, 증상이 나타나면 해독제를 놓아주지!”
곧 시녀들이 쿠아쉬의 손에서 약병을 들고 와 미아에게 건넸다.
“읍! 으으읍! 읍읍!”
엠브라가 온몸을 비틀었지만 일부러 그녀 쪽은 바라보지 않았다. 그리고 미아는 태연하게, 말간 얼굴로 망설임 없이 병 입구를 입에 가져다 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