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언젠가 네 부인이 될 여자를 만나서 네 누명을 벗겨 줄 사람을 수소문하다 왔다고는…… 말 못 하지!’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다. 빙의자의 숙명이리라.
미아가 어색하게 양손 검지를 좌우로 까딱였다.
“외, 외로워서……?”
미아의 말에 아딜로트가 느리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심한 얼굴이지만 시선은 맑고 또렷했다. 또 약간은, 다정한 듯 느껴지기도 했다.
“외로워?”
“그랬을 수도!?”
“어쨌단 거야.”
“그러니까, 페르 님이 놀아 주셔서 괜찮아졌어요!”
아딜로트의 입술이 살짝 들썩였다.
“페르 님?”
“네! 케이크도 잔뜩 먹었고! 거리도 구경하고! 페르 님은 재밌었고!”
“페르가 재밌었다고?”
“네! 엄청 재밌었죠!?”
아딜로트의 표정이 좀 더 심드렁해졌다. 흐응, 하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페르의 어디가?”
“……얼굴?”
아딜로트가 헛웃음도 되지 못한 숨을 흘렸다. 미아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눈치를 보았다. 이내 아딜로트가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더 잘생겼는데.”
그건 또 지당하신 말씀…….
페르디안도 분명 어지간히 고운 미모지만, 그 미모가 ‘곱다’는 느낌을 주는 탓에 약간의 취향은 타는 편이었다.
반면 아딜로트는 취향을 깨부수는 타입의 미남이었다.
새벽 안개 같은 은발은 찬란하고, 새빨간 눈은 속불이 올라오는 보석처럼 반짝인다.
어깨는 넓은데 허리는 가늘어, 뭇 여자들이 좋아하는 세련된 골격으로 옷맵시도 몹시 좋았다. 슬쩍 토가 사이를 훔쳐봐 온 바, 몸매도 상당했다.
아무튼 그는 여성 동지들에게 사랑받을 요건은 모두 갖추고 있었다. 그렇다곤 해도 이 정도로 당당할 줄은 몰랐지만.
“내가 황제라 불편해?”
이윽고 나온 질문에 미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그것만은 정답을 알겠노라 말하듯 당차게 외쳤다.
“황제가 편하면 안 되죠! 걱정하지 마세요! 전 폐하가 충분히 불편하니까! 아주아주 높은 사람이라는 거, 정말 잘 알고 있으니까!”
“아. 그래.”
“게다가 전 아딜의 집권을 지지하고 있다고요! 전적으로! 아딜이 펼치는 정책도 국민을 생각한 게 보여서 흐뭇하고!”
“아하.”
“그러니까 한 번만 더 나갔다 오면…….”
“안 돼.”
치. 미아가 볼을 부풀렸다. 아딜로트가 손으로 머리를 쓸어넘겼다.
“……황제로만 보인다고.”
마뜩잖다는 듯한 중얼거림에 미아가 아딜로트의 눈치를 보았다.
‘황제 취급이 싫은 거야?’
미아가 재빨리 손바닥을 비볐다.
“그럼…… 은발의 미남?”
“뭐?”
“아니면…… 하늘이 점지한 성군? 나라도 말아먹을 절세미인? 세기의 사랑도 거머쥘 희대의 로맨티시스트?”
“……하.”
“하, 느님? 신령님? 경애하는 령도자? 전능하신…….”
“너 정치하면 잘하겠어. 아부에 소질이 있네.”
이것도 정답은 아닌 모양이었다. 미아가 울상을 지었다.
‘뭐 어쩌라는 건데!’
미아는 잽싸게 머리를 굴렸다. 취향 까다로운 남자주인공님의 비위를 맞추려면 별수 없었다.
“아니면…….”
미아가 조심스레 다가가 아딜로트의 발치에 앉았다. 손은 아딜로트의 무릎 위에 곱게 올렸다.
아딜로트가 흠칫하고 상체를 뒤로 물렸다. 미아는 그런 아딜을 올려다보며 매달리듯 눈을 깜빡였다.
“……자기야?”
순간이지만 아딜로트의 숨이 멎었다. 무릎에 손을 올리고 있던 미아는 그걸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맑은 빨강의 눈동자에 파문이 인 것도 같았다.
“…….”
분수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작게 울리는 가운데, 밤의 정원에는 정적이 찾아왔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아딜로트는 조금 화가 난 듯한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너.”
“네! 자기!”
“하지 마.”
“넵…….”
미아는 바로 풀이 죽어 시선을 떨어뜨렸다.
뭘 해도 크게 빗나가는 게 촉으로 인생 쉽게 살 팔자는 아닌 모양이었다.
‘아, 내 인생은 언제 편해지냐고!’
미아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그러느라, 그녀는 아딜로트의 귀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것은 놓치고 말았다.
* * *
미아는 결론을 내렸다.
‘세레니티와 좀 더 접촉해 봐야겠어.’
아무래도 세레니티는 아딜에 대해 크나큰 오해를 하고 있는 모양이니, 계속 만나서 수정해 줄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겸사겸사 잭 아저씨에 대해서도 물어보고. 그날, 결국 잭 아저씨에 대해서는 더 묻지 못했잖아?’
돌아와 생각해 보니 역시 여자주인공답게 화제 돌리는 기술이 일품이었다.
‘세레니티랑 마주치려면 다른 사람들과도 마주칠 수밖에 없겠지만, 그래도 아무나 건드리진 못하겠지.’
미아가 벌떡 일어나 힘차게 외쳤다.
“무려 폭군이 기르는 애완동물이라고, 내가! 내가 멍! 하면 아딜로트가! 어? 부탁도 들어주고! 어!?”
몇 초 뒤 몰려오는 자괴감에 미아는 웃을 수 없었다.
‘내 인권…… 어딨니? 발바닥 밑에 있니?’
그녀가 훌쩍거릴 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미아 님! 엠브라입니다!”
“응, 들어오세요!”
미아가 재빨리 침대에 앉아 요조숙녀인 척 자세를 바로잡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엠브라가 상자 하나를 들고서 씩 웃었다.
“제가 뭘 가져왔을까요!”
미아의 눈이 번득였다.
“이 냄새는…… 엘드몽탕의 크림치즈 쿠키!”
“정답! 미아 님, 대단하신데요!”
두 사람은 호들갑을 떨며 티 타임을 준비했다.
보라 뿌리 엉겅퀴 사건 이후, 미아는 엠브라와 친해져 종종 이렇게 티 타임을 가지곤 했다. 둘 다 달콤한 디저트를 좋아해서인지 얘기가 잘 통했다.
밖을 나다니기 힘든 미아의 입장상, 엠브라가 해 주는 이야기들이 많은 도움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엠브라는 어떻게 황립 의료원에서 일하면서, 아딜의 편이 된 거예요?”
“궁금하세요?”
“네! 황립 의료원이면 아무래도 황태후의 영역이잖아요! 대부분 크라우스 재단의 후원을 받으니까.”
이 대륙에서 학문적으로 뛰어난 이들은 대부분 오리존 아카데미에 입학한다. 오리존 아카데미는 대륙의 국가들이 힘을 합쳐 만든 고등 교육 기관으로, 위치는 달타이 산맥과 인접해 있는 나누친이다.
외국에 있는 만큼 오리존 아카데미에 입학하려면 유학에 많은 돈이 필요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유학생은 크라우스 공작가가 운영하는 크라우스 재단의 후원을 받아 아카데미를 다녔다.
듣기로는 엠브라도 마찬가지인 모양인데, 황태후와 반목하는 것이 내내 의아했던 것이다.
“후원을 받아서 공부했다고는 해도…… 황태후가 얼마나 사악한 여자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엠브라는 그런 미아의 궁금증을 이해한다는 듯이 씩 웃었다.
“의원은 원래 그런 존재예요. 항상 중립이죠. 전쟁터에서도 의원은 건드리지 않잖아요? 죽어 가는 사람을 살리고 싶을 뿐이니까.”
엠브라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의원 실격이긴 하지만요…….”
“네?”
미아가 되물은 순간이었다.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방으로 들어섰다.
“실례하겠습니다. 엠브라 테타 님?”
방으로 들어온 것은 제인이었다. 그녀는 아딜로트의 수석 시녀이자 황제궁의 시녀장으로, 최근 미아를 돌봐 주고 있었다.
“테타 님을 찾는 시녀가 찾아왔습니다.”
“시녀요?”
“네.”
“어디 응급 환자라도…….”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제인이 딱 잘라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제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엠브라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미아와 시선을 교환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가겠습니다! 황제궁 앞으로 찾아온 건가요?”
“네.”
미아는 아무 생각 없이 엠브라를 따라 황제궁 초입까지 나섰다. 그냥 배웅을 해 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황제궁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본 순간, 미아는 불안을 느꼈다.
‘황태후 궁의 시녀?’
황제궁 앞에서는 시녀 한 명이 엠브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밀랍인형처럼 안색이 창백했고, 황제궁이나 중앙궁의 시녀와는 달리 암녹색 시녀복을 입고 있었다.
“엠브라 테타 의원. 황태후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어, 갑자기요?”
“예.”
시녀가 오르골 위에 놓인 인형처럼 기계적으로 답했다.
‘대체 무슨 일이지?’
미아가 알기로 황태후와 엠브라의 교류는 그리 많지 않았다. 엠브라가 크리소르 황태후의 주치의를 맡고 있다는, 딱 그 정도.
“아. 황태후 폐하께서요.”
하지만 엠브라는 뭔가를 눈치챈 것 같았다. 검은 뿔테 안경 너머의 갈색 눈이 살짝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오랫동안 침묵하며 궁 너머의 하늘을 응시했다.
“미아 님.”
그러고는 미아를 돌아보았다.
“네?”
미아의 반문에 엠브라가 장난스럽게 씩 웃었다.
“의료원의 제 작업실은 알고 계시죠?”
“네…….”
“찬장에 디저트가 많아요. 뉴미니의 벚꽃 사탕도 있고, 르세이레의 무지개 쿠키도 있으니까 다 가져가세요. 아! 제 방에서 달리 갖고 싶은 게 있다면 그것도 가지셔도 돼요!”
“…….”
마치 곧 떠날 사람 같은 말이었다. 미아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자, 엠브라는 픽 웃으며 미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조심히 들어가시고! 폐하를 잘 부탁드리고요!”
엠브라는 시원하게 웃은 뒤, 황태후 궁의 시녀를 따라 사라져 버렸다. 남겨진 미아는 망연히 방금 벌어진 일을 되짚었다.
곧 뭔가를 깨달은 미아의 입이 벌어졌다.
“설마……?”
미아는 그대로 드레스를 잡고 아딜로트가 있을 집무실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 * *
다행히 집무실 앞에는 페르디안이 없었다. 있었다면 또 실랑이하느라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갑자기 나타난 미아를 보고 기사들이 움찔했으나, 그들은 이내 창을 거뒀다. 아딜로트가 언제든 오라고 명령한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아딜!”
쾅!
예의가 없는 행동인 걸 알면서도 미아는 거세게 문을 열어젖혔다. 아딜로트는 황제의 정복 차림으로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왔네.”
묘한 표정이었다. 올 줄 알고 있었지만 오길 바라지는 않았다는 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