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애완동물이 되었다-29화 (29/193)

29화

“당신이 아니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예요.”

“제게…… 부탁이요?”

“네.”

미아가 고개를 끄덕인 뒤, 페르디안에게 몸을 돌렸다.

“페르 님. 죄송하지만 둘이서만 이야기해도 될까요?”

미아가 간절한 눈으로 페르디안에게 말했다.

페르디안은 의외로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두 사람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까지 걸어가 경계 자세를 취했다.

미아는 세레니티를 구빈원 가장자리의 버드나무 밑으로 인도했다. 그리고 여전히 불안한 얼굴을 하고 있는 세레니티에게 물었다.

“잭 아저씨라고…… 알죠?”

세레니티의 금빛 눈이 커졌다. 어째서 네가 그 이름을 알고 있느냐는 눈이었다. 미아가 양손을 맞잡고 애원하듯 말을 이었다.

“잭 아저씨를 만나고 싶어요. 부디 그분이 어디에 계신지 알려 주세요!”

“잭 아저씨를요?”

“네. 제겐 그분이 필요해요!”

클라우디오 황태자가 죽던 사고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제삼자. 황태자의 마부.

물론 이건 시작일 뿐이다. 이후로도 많은 패를 모아 크리소르의 공격을 막아 내야 했다. 역시나 당황스러운 말이었는지 세레니티의 눈이 흐려졌다.

“잭 아저씨를요? 대체 왜…….”

“제가 찾고 있는 정보를 그분이 알고 계세요! 저는 그분의 이야기가 꼭 필요해요. 절대 잭 아저씨에게 해가 되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하지만…….”

세레니티가 처연하게 눈을 내리깐 채 가슴에 손을 얹었다.

‘고작 내 말로는 당연히 안 믿겠지!’

미아가 허둥지둥 말을 이었다.

“키토 후작 각하가 같이 오신 거 보셨잖아요? 저분이 허튼소리를 할 분이 아니라는 건 아실 테고요. 원하신다면 계약서도 쓸 수 있어요!”

“계약서요?”

“네! 그리고 그냥 하는 부탁은 아니에요, 세레니티 양. 당신이 원하는 게 있다면 들어줄게요.”

미아가 주먹을 꾹 쥐었다.

“예를 들어…… 가족에게서 벗어나고 싶다든가?”

“……어떻게 그걸.”

당황한 세레니티의 두 눈이 마구잡이로 흔들렸다.

소설 속에서 세레니티를 힘들게 한 것은 주로 그녀의 가족이었다.

친부인 듀레인 남작은 새로 들인 부인에게 쩔쩔매느라 친딸인 세레니티를 돌보지 않았다.

새어머니인 듀레인 남작 부인과 그녀의 딸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은 악랄하고 집요하게 세레니티를 괴롭혔다.

헌 옷을 주고, 먹지 못할 음식을 먹게 하고, 무도회에서 웃음거리로 삼는 등…….

‘렌이 착해서망정이지, 나였으면 집에 불질렀다.’

그런 상황에서 세레니티가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봉사였다.

그러다 어느 날 그녀가 봉사하는 단체에서 황궁에 신약을 받으러 가고, 세레니티는 거기에 따라간다.

그곳에서 아딜로트를 만나는 것이다.

‘원작하고는 조금 달라지겠지만 어차피 나중에는 아예 궁으로 들어오게 되니까!’

미아가 간절히 말했다.

“부탁이에요, 세레니티 양……. 자세한 사정을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저는 정말로 잭 아저씨를 만나야 해요!”

“미아 님…….”

세레니티의 아름다운 금빛 눈은 좀처럼 진정할 기미가 없었다. 그녀가 고개를 조금 비틀자, 금빛 광택이 천사의 고리처럼 반짝이는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그 상태로 세레니티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혹시 이건 폐하의 명령인가요?”

“네?”

난데없는 말에 미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별안간 세레니티가 미아의 손을 맞잡고 처연하게 속삭였다.

“혹시, 폐하께서 미아 님께 안 좋은 일을 시키고 계신 건 아닌가요……?”

“엥?”

이게 대체 무슨 말이야.

미아의 머리가 굴러갈 새도 없이 세레니티가 좀 더 가까이 다가와 속삭였다.

“폐하가 반역자의 딸을 무도회에까지 데려와, 정치 선전용 꼭두각시처럼 데리고 다녔다고 하더군요. 사실인가요?”

아니요. 사실이 아닙니다만……?

“게다가 춤을 추다가 더는 못 추겠다며 중간에 그만둬서 미아 님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다고 들었어요. 미아 님……, 괜찮으신 건가요?”

미아는 그제야 세레니티가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폐하에 대한 소문이 좋진 않지만, 그래도 그분이 펼치시는 정책은 늘 백성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느껴졌어요.”

“세, 세레니티 양? 잠시 제 얘기를 들어 줄…….”

“그래서 저는 그분이 조금 잔인하긴 하지만 좋은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남들 앞에서 사람을 마치 개처럼 다루고……!”

세레니티가 감정이 격해지는지 입술을 깨물었다.

‘잠깐만, 그러니까…… 바닥에 앉지 말라는 게 대체 어디까지 와전된 거야!’

미아의 뒷덜미가 뻐근해졌다. 이 오해를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일단 그건 정말 다 오해예요!”

“그럼 폐하께서 미아 님을 무도회에 초대해 남들 다 보는 곳에서 말로 부렸다는 게 사실이 아닌가요?”

“……맞지만!”

“한때는 황제궁 밖으로는 나가지도 못하게 감금해 놓았다고 들었어요. 이 지독한…….”

“……그것도 맞지만!”

“매일 밤 미아 님을 자신의 침소에 들인다면서요! 매일 밤!”

“……전부 맞긴 한데!!!”

미치고 팔짝 뛸 일이다.

세레니티는 이제 혼절할 것 같은 얼굴이었다.

“며칠 전 폐하께서 제게 입궁하라는 명령을 내리셨지만, 저는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해 주지 않는 분께 굴복할 마음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분이라면 또 어떤 방식으로 압박해 올지 알 수가 없겠지요…….”

세레니티가 흐느끼듯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미아 님! 저와 도망쳐요!”

미아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그러니까 이게 아니라니까!’

* * *

실패했다.

‘왜 이렇게 된 거야…….’

미아가 멍하니 마차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잠깐만. 이러다 아딜이랑 렌이 안 이어지기라도 하면 어떻게 되지?’

황태후에게서 살아남는 것도 문제지만, 원작의 남주인공과 여주인공이 이어지지 않는 것도 문제였다.

‘로미오와 줄리엣에 들어왔는데, 로미오랑 줄리엣이 안 이어지면 안 되는 거잖아!’

골이 아파지는 느낌에 미아가 마차 창을 열었다. 그 모습을 페르디안이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다는 것은 꿈에도 몰랐다.

‘일단 렌과 좀 더 친해져야겠어. 아예 정말로 렌과 떠나는 건, 당연히 언어도단이고.’

<장미 정원의 세레니티>에서 남자주인공인 아딜로트의 키워드는 ‘집착남주’였다. 감금까지 했으니 말 다 한 셈이다.

‘……어쩐지 나도 비슷한 걸 당한 것 같긴 하지만, 기분 탓이겠지!’

어쨌든 세레니티는 사랑스러우니까 아딜로트는 당연히 세레니티에게 빠질 테고.

그렇다면 아딜로트는 절대 세레니티가 자기 옆에서 떠나도록 두지 않을 것이다.

‘만약 렌이 그때도 나랑 같이 떠나려고 한다면, 아딜이 나를 죽일 수도……!’

미아가 인상을 쓰며 손톱을 깨물었다. 그때 잠자코 있던 페르디안이 입을 열었다.

“이야기가 잘 안 됐나 보군.”

“헉.”

어떻게 알았지.

미아가 페르디안의 눈치를 살피며 세레니티와의 대화를 복기했다.

‘민감한 이야기는…… 안 했어, 좋아!’

미아가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페르 님? 혹시 엿들으셨다거나…….”

페르디안이 미미하게 인상을 썼다.

“내가 그 정도로 예의를 모르는 사람으로 보이나.”

“괜한 사람 붙잡고 의심해서 중독시킬 사람으로 보이긴 하는데…….”

“……미안하다.”

당황한 페르디안이 곧바로 사과했다. 그는 헛기침한 뒤에 말을 이었다.

“그렇게 다채로운 죽상은 처음이라 미루어 짐작했을 뿐이다.”

다채로운 죽상……. 점잖지만 욕 아니냐.

미아가 기계적으로 하, 하, 웃으며 시선을 피했다. 내용을 엿들은 게 아니라면 되도록 피하고 싶은 주제였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하셨죠?”

“그래.”

“역시 황태후 폐하가 숨겨 주신 걸까요?”

“내가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아, 하긴 페르 님 입장에서는 그렇겠네요! 못 들은 걸로 해 주세요!”

잠자코 미아의 말을 듣던 페르디안이 몇 분 뒤 입을 열었다.

“행여나 어디 가서 그런 말을 하진 말도록 해라. 자칫 잘못하다간 황족 모독으로 목이 날아갈 수도 있으니.”

미아가 볼에 바람을 넣었다가 푸시시 빼며 헤헤 웃었다.

“어차피 페르 님 앞에서나 이런 말 하는 건데!”

“…….”

미아의 말에 페르디안이 물끄러미 그녀를 응시했다.

한참 뒤, 팔짱을 끼며 한숨을 쉬었다.

“경계심이 부족하군.”

“페르 님 같은 사람이 있으니 저 같은 사람도 있어야 세상의 균형이 맞는 거예요!”

“헛소리.”

타박하는 것과 달리 페르디안의 표정은 평소보다 부드러웠다.

‘웬일이래?’

미아는 어깨를 으쓱하고서 시선을 돌렸다.

* * *

페르디안은 미아를 황제궁 앞까지 배웅해 주었다. 안까지 데려다준다고 하는 것을 미아가 거절했다.

‘슬슬 피곤해서 윗사람 접대하기 어려우니까 얼른 가라, 좀!’

미아가 웃으면서 거절하자 페르디안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곤 돌아갔다. 그제야 미아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몸이 아직 다 낫지 않아서 그런가, 체력이 달리네……. 아딜은 아직 일하고 있으려나.’

침실로 가려던 미아는 방향을 바꿔 궁에 딸린 작은 정원으로 향했다. 세레니티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때마침 달빛도 좋았고 날이 쌀쌀하지도 않았다.

정원에 다다른 미아는 멈칫했다. 정원 한가운데에 있는 석조 분수 가장자리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늦었네.”

아딜로트였다. 그는 달빛을 받으며 고요히 차오른 수면을 손가락으로 건드리는 중이었다. 흰 토가를 입고 있는 아딜로트의 모습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마치 달의 신 같은 모습에 미아의 말문이 막혔다. 아딜로트는 물을 건드리던 것을 멈추고, 넓은 소맷자락 사이로 팔짱을 끼었다.

“듀레인 남작의 딸을 만나러 다녀온 거 아니었나?”

“그…… 랬어요!”

미아가 뒤늦게 대답하며 다가갔다. 아딜로트는 여전히 분수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 여자는 왜 찾는데?”

미아가 멈칫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