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거짓말이 아닌 거지. 페르디안은 절대 겉과 속이 다르지 않으니까…….’
미아가 눈을 깜빡였다. 아딜로트가 다시 미아를 흘낏 바라보았다.
“네가 갈 정도라면 차라리 내가 가는 게 낫…….”
“저, 저도 후작 각하가 더 나을 거 같아요!”
“…….”
아딜로트의 말이 멈췄다. 그는 새빨간 눈을 미아에게 고정시켰다.
어느새 심드렁하던 평소의 표정은 사라져, 지금의 아딜로트는 서늘하고 날카로운 인상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었다.
“페르가 더 낫겠다고?”
미아가 붕붕 소리가 나도록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가 이런 일에 가시면 안 되죠! 위험할지도 모르잖아요? 게다가 키토 후작 각하는 검도 아주 잘 쓰시고요!”
“나도 잘 쓰는데.”
“알지만, 폐하잖아요? 혹시라도 이런 일을 함께했다가 옥체라도 상하면 어떡해요…….”
아딜로트가 미세하게 인상을 썼다.
그는 페르디안을 한번 보고, 다시 미아를 보았다. 미아가 눈을 크게 뜨고서 강단 있게 주먹을 쥐어 보였다.
“다녀올게요! 네? 부탁 하나 들어주시기로 했잖아요!”
한참을 침묵하던 아딜로트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든가.”
조금 쌀쌀맞은 말투였지만, 마냥 기분이 좋아진 미아는 활짝 웃었다.
‘이제 세레니티를 만날 수 있어!’
* * *
미아는 좀 더 몸이 나아진 뒤, 바로 페르디안과 함께 마차를 타고 궁을 나섰다.
아딜로트가 내어준 마차 안은 조용했다. 제복 차림의 페르디안은 눈을 감은 채 말이 없었고, 미아는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
‘사자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난 기분…….’
아딜로트에게는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지만, 미아는 당연히 페르디안이 불편했다. 반역에 가담했다는 오해는 풀렸지만, 그게 전부다.
반역자의 딸이 후작에게 설교라니! 게다가 자신은 이제 귀족도 아닌데!
당장 목이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았다. 아딜로트가 ‘죽이지 않겠다’ 했으니 페르디안도 그걸 따를 테지만, 어쨌든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미아는 페르디안의 눈치를 보며 마음을 굳세게 먹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이건 다 대의를 위해서야! 세레니티를 만나기 위해서! 세레니티를 만나기만 하면 다 잘될 거야!’
그때 페르디안이 감았던 눈을 떴다.
“어디로 가야 하지?”
매처럼 날카로운 눈이 미아를 향하자 미아가 놀라 딸꾹질을 했다.
“딸꾹, 어, 앙겔루스 구빈원으로 갈 거예요! 딸꾹…….”
미아가 입을 가렸다. 페르디안은 미미하게 인상을 쓸 뿐, 딱히 신경을 쓰는 것 같진 않았다.
“듀레인 남작가의 세레니티를 만나러 가는 건가.”
“네! 딸꾹…….”
“그렇군.”
“…….”
대화가 거기서 끝나자 미아가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이유를 물을 줄 알았는데. 아니면 이미 이름을 알고 있는 걸까?’
세레니티는 백성들에게 신뢰가 두텁다. 그녀는 가진 것을 베풀기 좋아하고, 매일같이 거리에 나가 사람들에게 봉사한다.
‘그런 활동이 있었기 때문에 세레니티가 아딜을 지지했을 때 사람들이 아딜을 다시 보게 된 거고.’
생각할수록 이 세계에서 여자주인공의 영향력은 어마어마하다.
미아는 곧 머리를 흔들며 생긋 웃었다.
‘뭐, 내 알 바 아니지! 난 둘이 황태후를 해치우는 걸 돕고 완전히 이 소설에서 살아남으면 그만이니까!’
한참을 달리던 마차는 구빈원 앞에서 멈췄다. 구빈원 근처까지 다다른 미아는 금방 세레니티를 발견할 수 있었다.
“톰, 누나를 도와주는 거니?”
“네…….”
“좋아, 그럼 같이 빨래 널까?”
그녀는 구빈원의 마당에서 장대에 흰 이불을 널고 있었다. 미아는 잠시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햇빛 아래, 흩날리는 흰 천 사이에서 찬연하게 빛나는 세레니티의 존재가 어쩐지 아득하게 느껴졌다.
‘내가 좋아한 여주.’
<장미 정원의 세레니티>에서 세레니티는 늘 착하고 현명했다. 누구라도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미아 자신도 그러니까.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아딜로트에게 느끼던 감정과 마찬가지였다. 강제로 소설 속에 뚝 떨어진 것에 대한 억울함과는 별개로, 여전히 미아는 두 주인공이 행복하길 바랐다.
“가지.”
그때 세레니티를 본 페르디안이 걸음을 옮기려 했다.
“잠깐만요! 저희 조금만 기다릴까요?”
미아가 재빨리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
페르디안이 미아를 내려다보았다. 정확히는 미아의 손을.
“앗, 기분 나쁘세요……? 죄송해요…….”
“…….”
“그게, 세레니티는 없는 시간 쪼개서 사람들을 도우러 온 것일 텐데 방해하면 좀 그렇잖아요! 조금만 기다려요, 저희!”
그 말에 페르디안이 세레니티를 바라보았다. 동시에 미아는 슬쩍 그의 눈치를 보았다.
‘페르디안은 원래 렌을 짝사랑하는 역할이지. 그녀에게 새삼스럽게 반할 수도 있어.’
하지만 세레니티를 바라보는 페르디안의 얼굴은 냉철함 그 자체였다.
“그러지.”
그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근처의 돌담에 기댔다. 미아도 쪼르르 다가가, 그 옆에 기대어 섰다.
그리고 이어지는 건 긴 정적.
‘공기에 질식할 거 같아!’
미아가 해탈할 것 같은 심정으로 하늘을 보았다.
“……지로티 공이 그러더군.”
그런데 의외로 페르디안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그때 네가 들이마신 독이 큰 고통을 수반하는 맹독이라고.”
“아. 그렇다면서요!”
너무 담백한 때문인지 페르디안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는 다시 시선을 정면으로 향한 채 이어 말했다.
“대외에는 숨기고 있지만, 지로티 공은 의학과 약학에 매우 뛰어난 분이다. 그분이 아니었다면 죽었을 테지.”
“아하, 역시.”
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능력이 있다면 당연히 숨기는 게 맞겠지. 만약 황태후가 그걸 알았다면 다른 독을 썼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니 그때 살아난 게 천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페르디안이 곧 벽에 기댔던 자세를 바로 하고 미아를 바라보았다.
“……미안하다. 내가 너를 오해했다.”
미아는 대답 없이 어깨를 으쓱했다.
‘솔직히 아직 용서해 주고 싶지 않아.’
다행히 용서를 바란 건 아니었는지 페르디안은 미아의 대답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네 말이 맞았다.”
“제 말이요?”
“내가, 내 신분과 가문을 위시해 정의를 휘두르고 있다는 말.”
페르디안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하나로 묶은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을 때, 그의 고운 아미가 찌푸려졌다.
“……처음에는 충격적이었지만, 돌이켜 보니 네 말이 맞았다. 그 점에도 사과하지.”
미아는 잠시 침묵했다. 진심 어린 사과인 것은 느껴졌다. 아직 용서해 줄 생각은 없었지만…….
‘저렇게 덩치 크고 예쁜 애가 시무룩해져 있는 걸 보기도 그렇고.’
죄가 있다면 미인에게 약한 자신에게 있다. 미아가 웃으며 한숨을 쉬었다.
“말로만요?”
페르디안이 멈칫했다.
미아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발치 앞의 돌멩이를 툭 찼다.
“입으로만요? 사과하지, 그러고 땡?”
“아니. 물론 원하는 게 있다면 들어주지.”
미아가 배시시 웃었다.
“그럼 나중에 부탁 하나 들어주세요!”
“무리한 부탁은…….”
“그런 건 안 해요! 충분히 도와주실 수 있는 걸로 부탁드릴게요!”
“……그걸로 충분한가? 죽을 뻔하기까지 했는데.”
“그럼 나중에 저랑 드레스 갈아입기 놀이 하실래요?”
“…….”
“농담입니다앙.”
미아는 실실 웃으며 검지로 자신의 미간을 가리켰다. 페르디안이 손을 움찔했다.
“……?”
“웃고 살자고요. 어쨌든 앞으로 계속 볼 사인데, 얼굴 붉히면 그렇잖아요!”
“…….”
“아! 끝났나 보다. 가요!”
미아가 돌담에서 등을 떼고 구빈원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때, 페르디안이 낮게 말했다.
“미아.”
미아가 고개를 돌리고 눈을 깜빡였다. 페르디안은 그녀를 보며,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는 눈으로 말했다.
“키토 후작 각하 말고, 페르디안 님이라고 불러라.”
미아의 얼굴이 멍해지자, 페르디안이 시선을 피하며 덧붙였다.
“……아니면 페르 님이라고 해도 괜찮다.”
미아는 좀 더 영문을 알 수 없어졌다.
소설 속에서 페르디안은 세레니티에게도 쉽게 이름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무슨 심경의 변화야?’
어쨌든 해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페르 나름대로도 나랑 잘 지내보려는 거 아닐까?’
미아는 생긋 웃었다.
“그럴게요, 페르 님!”
얼핏 페르디안이 희미하게 웃은 것 같았으나, 이내 그는 무표정으로 되돌아왔다.
* * *
세레니티는 때마침 마당에서 놀던 마지막 아이를 구빈원으로 들여보낸 참이었다. 미아는 깊게 심호흡한 뒤에 입을 열었다.
“세레니티 듀레인 양.”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세레니티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누구시죠?”
‘윽.’
그리고 미아는 눈이 부셔서 인상을 쓸 뻔했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예쁠 수가 있지…….’
아딜로트를 처음 봤을 때랑 비슷한 충격이었다. 미아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뒤 가슴에 손을 얹었다.
“처,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미아라고 해요. 원래는 미아 셀레스티얼인데, 백작가가 반역으로 망한 뒤 지금은 폐하의 은덕으로 목숨을 부지하고 있어요. 그리고 이쪽 기사님은…….”
“키토 후작가의 페르디안이다.”
미아는 가만히 세레니티의 반응을 기다렸다.
‘키토 후작이 황제의 최측근이라는 것 정도는 알겠지. 신분 증명은 확실할 거야.’
다행히 세레니티는 도망치거나 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녀는 의외로 미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약간 놀란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이내 자신이 실례했다고 생각했는지 곧바로 청초하고 우아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듀레인 남작가의 세레니티 듀레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걱정스러운 낯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셨나요?”
미아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당신에게 부탁할 게 있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