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 * *
나지막히 흘러나온 말에 아딜로트는 느리게 숨을 삼켰다.
밤이었고, 달빛마저 구름에 가려 사위는 캄캄했다. 아마 미아도 자신의 얼굴이 보인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아딜로트는 밤눈이 좋았고, 그는 미아가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자기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자신도 몰라 쩔쩔매듯 눈을 굴리는 모습은, 미아에게서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아딜로트는 처음에는 미아가 어머니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남을 위해 희생하려 했다는 점이 그랬다.
그러나 미아는 어머니와 달랐다. 살고 싶어 했고, 그러기 위해 악착같이 애쓰는 모습을 보였다.
그게 너무 아무렇지도 않아 보여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어쩌면 늘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 기분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옛날 아딜로트 자신이 어머니의 처형식에서 느꼈던 바로 그 감정 말이다.
그러다 달이 구름에서 빠져나오고, 희미한 달빛이 미아의 얼굴을 비추는 순간―.
“미안.”
아딜로트는 손을 뻗어 미아의 눈을 덮었다. 표정을 보이고 싶지 않을 거란 생각이었다.
“정말로 의심하는 건 아니었어. 그냥 상황이, 그랬어.”
“…….”
“안 죽일 거야. 아니, 그보다는…….”
죽이고 싶지 않아져서.
아딜로트는 의식의 수면에 떠오른 불확실한 말을 다시 어둠 속에 묻어 버렸다.
대신 그는 나직하게 말했다.
“믿어. 이미.”
“…….”
“미안. ……그냥 심술이었어.”
“……왜?”
“…….”
왜냐면, 네가, 나를 다른 누군가랑.
떠오르는 단어 몇 가지를 정리하려던 아딜로트는 결국 그것을 포기해 버렸다.
그 낱말들이 온전하게 재조립되어 완벽한 문장이 된 순간, 상처받는 건 미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리란 것을 그는 어느 정도 예감하고 말았다.
“……그건 못 말해 주겠으니까, 그냥 내가 나빴던 걸로 하지.”
아딜로트는 그렇게 말하고서 눈을 내리깔았다.
그때, 미아가 아딜로트의 손을 잡아끌어 내렸다. 얼굴 아랫부분을 가린 채 눈만 쏙 내민 채였다.
“……아딜은 나쁜 사람도 아니면서 그런 말하면 내가 속 편히 미워할 수가 없잖아.”
시무룩하게 심통 난 얼굴에 투정 부리는 듯한 말이었다. 눈가가 젖어 있긴 했으나, 전처럼 냉담함을 보이지는 않았다. 아딜로트는 그 점에 희미하게 안도했다.
“나한테 착하다고 하는 건 너밖에 없을걸.”
“살려 주는 사람 착한 사람.”
“기준이 너무 관대한데.”
“그런가?”
눈을 굴리고 곰곰이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던 미아는, 이내 히히 웃음을 터뜨렸다.
“……고마워.”
“…….”
그 미소를 본 순간 아딜로트는 정말 착한 사람은 하지 않을 나쁜 생각을 해 버렸다. 그는 그런 생각을 한 자신에게 더 당황해 시선을 피해 버렸다.
“고마우면 다치고 오지나 말고.”
“그건 내 잘못이 아닌데!”
“애초에 나가지 말라고 했잖아. 대체 왜 나가려고 한 거야?”
“그건…….”
미아가 멈칫했다. 그녀는 자신의 눈치를 보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폐하, 저…… 만나야만 하는 사람이 있어요.”
“……약혼자?”
미아가 고개를 저었다.
“세레니티 듀레인. 듀레인 남작가의 영애예요.”
* * *
‘원하는 게 있다면 들어주기로 했으니, 약속은 지켜야지.’
아딜로트 겐첸 슈뢰더는 빈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즉각 세레니티 듀레인에게 입궁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세레니티 듀레인이 그걸 거부한 것이다. 소식을 들은 미아가 다시 호흡 곤란으로 쓰러졌다.
‘렌, 미쳤니?’
황제의 명을 거역할 시엔 참수형을 당해도 할 말이 없다. 당연히 아딜로트의 심기는 불편해졌다. 미아는 그녀의 행동을 변명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써야만 했다.
‘원작 남주고, 원작 여주잖아! 첫 만남이 꼬이면 안 되는 거잖아!’
이미 자신이 살아남는 것으로 원작의 많은 부분이 바뀌긴 했다. 그래도 남자주인공과 여자주인공의 흐름은 아직 변하지 않았다.
‘둘이 어쨌든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하고 끝내면 나도 곁다리로 아무 문제 없이 끝낼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미아는 눈물을 삼키며 아딜로트에게 말했다.
“그럼 제가 직접 만나러 가야겠어요!”
“기각.”
아딜로트는 가차 없었다. 삐걱대는 걸음으로 집무실까지 찾아온 미아에게 의자를 내어주기는 했다.
하지만 그녀를 보지도 않고 펜만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너 여기까지 오는 데 얼마 걸렸어?”
“……1시간이요.”
보통은 걸어서 15분이면 도착하는 거리다. 상태가 아직 좋지 않아 걷다가 쉬기를 반복하니 한 시간이나 걸렸다.
미아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아딜을 바라보았다. 아딜로트는 울상 지은 미아를 흘낏 보더니, 다시 서류로 시선을 주었다.
“멀쩡해지고 나서 얘기해.”
“저 진짜 멀쩡해요…….”
“노인네가 말하길 멍멍이 내장이 아주 곤죽이 됐다고 하던데.”
“아니, 그 정도는 아닌……, 흐읍!”
미아가 말하다 말고 배를 부여잡았다. 맹독이라더니, 정말로 끈질기게 복통이며 구토며 호흡 곤란이 찾아왔다.
‘에이, 왜 이 타이밍에…….’
미아가 입술을 오므리고 아딜로트의 눈치를 보았다. 아딜로트는 어느새 펜을 멈추고 그녀를 보고 있었다.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기각.”
“…….”
미아가 시무룩해졌다.
“그래도 꼭 만나야 하는데…….”
아딜로트를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렌을 만나야 앞으로의 원작을 대비할 수 있는데…….’
마부였던 잭을 찾는 것도 그렇고, 이 소설을 원만하게 해피엔딩으로 이끌 수 있는 건 세레니티뿐이었다. 아딜로트는 손가락 사이에서 펜을 까딱이며 그런 미아를 응시했다.
“그렇게 중요해?”
“네…….”
“왜?”
“그건…….”
미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아딜로트가 조금 인상을 썼다.
“설마 약혼자가 세레니티 듀레인……?”
“엑!? 아니요!”
미아가 기겁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 남자가 좋은데요!”
“…….”
당찬 외침에 아딜로트의 얼굴이 멍해졌다. 미아가 재차 강조했다.
“저는 남자가 좋고요, 잘생긴 사람이 좋아요. 몸도 좋아야 해요.”
“……너 그런 거 당당하게 말하면 안 부끄러워?”
“왜 부끄러워요? 아름다운 걸 좋아하는 건 인간의 본능이라고요.”
“그래…….”
“……그렇게 안쓰럽게 보지 말아 주실래요.”
미아가 볼을 부풀리며 자리에 앉았다.
“그럼 나도 갈래.”
잠깐 뭔가를 고민하던 아딜로트가 갑자기 말했다.
“네?”
“나도 간다고.”
“어딜요?”
“듀레인에게.”
아하. 내가 웬 환청을 들었나 했는데 환청이 아니었단 말이지.
미아가 방긋 웃으며, 팔을 X자 모양으로 교차시켰다.
“안 돼요. 절대. 죽어도. 무조건. 안 돼요.”
“죽어도 못 만나게 하겠다고?”
아딜로트의 미심쩍은 표정에도 미아는 여전히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야! 아딜은 자기 입지를 공고히 하는데 엄하고, 입궁을 거절한 세레니티를 만났다간 어떻게 쓱싹할지 모르니까!’
게다가 소설 속에서 아딜로트와 세레니티의 첫 만남은 이미 정해져 있다. <장미 정원의 세레니티>라는 제목답게, 첫 만남은 황궁의 장미 정원에서다.
장미 가시에 찔려 울고 있는 세레니티.
수풀 사이에서 그녀를 발견한 아딜로트.
‘원래 제일 고전적인 게 제일 낭만적인 법이지.’
미아가 혼자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미아는 그걸 어긋나게 하고 싶진 않았다.
“절대 안 돼요. 신성한 만남을 그렇게 망칠 수는 없어요.”
“너랑 듀레인의 만남이 그렇게 신성하다고?”
“아뇨, 그게 아니라……. 아무튼 안 돼요!”
“그럼 듀레인과 만나는 건 취소.”
“폐하아아아……!”
미아가 울상을 지었다. 그때 타이밍 좋게 노크가 울렸다. 곧 페르디안이 집무실로 들어왔다.
“폐하. 재상에게서 온 전갈입니다.”
“이리 줘.”
업무 이야기를 하는 두 사람을 보며 미아는 불편한 마음에 어깨를 움츠렸다.
‘페르랑은 잘난 척 설교해 댄 이후로 처음이네.’
미아가 무의식적으로 의자를 조금씩 아딜로트에게 붙였다. 뭔가를 진지하게 이야기하던 두 남자가 어느 순간 말을 멈췄다.
두 개의 시선이 미아에게 따라붙었다.
“……왜요?”
미아가 불안한 얼굴로 좀 더 아딜로트에게 붙었다. 아딜로트가 약하게 헛기침했다.
“무슨 일이야?”
“반역자 셀레스티얼에 관한 보고입니다.”
“해 봐.”
“예. 역시 그를 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아딜로트가 펜 끝으로 입술을 두드렸다. 미아는 숨을 죽였다. 지금까지 루비처럼 투명하고 아름답다고 여겼던 눈이 처음으로 핏빛으로 보였다.
“……역시 황태후 쪽인가.”
“그럴 확률이 높아 보입니다.”
“별수 없군. 경계만 제대로 하고 내버려 둬. 지금 붙을 일은 아니야.”
“알겠습니다.”
아딜로트가 미아를 흘낏 넘겨보며 말했다.
“들었지? 나갈 생각 말고 궁에나 있어.”
“하지만 폐하…….”
“안 돼.”
미아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도 아딜로트는 냉정했다. 페르디안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페르디안의 말에 아딜로트가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세레니티 듀레인을 만나러 궁을 나가려 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자초지종을 들은 페르디안이 미아를 응시했다.
‘으아……, 또 화내려나?’
미아가 지레 겁먹고 어깨를 움츠렸지만, 페르디안의 입에서 나온 것은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제가 가겠습니다.”
아딜로트도 미아도 놀라 동작을 멈췄다. 아딜로트는 잠시 미아를 살폈다가, 페르디안에게 말했다.
“키토 후작. 고의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미아 쪽이 피해자이니 즐거운 여행이 되진 않으리란 것쯤은 알 텐데.”
“사과를 위해서라도 제가 동행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페르디안의 얼굴에는 표정 변화가 없었다. 아딜로트에게 업무를 보고하던 바로 그 차분하고 고운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