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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애완동물이 되었다-26화 (26/193)

26화

“한동안 요양하게. 소화관 출혈, 대사성 산혈증, 호흡부전, 폐 부종……. 몸이 말이 아닐세.”

“할……, 할아버지.”

미아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지로티 공작은 미아의 옆에 가만히 앉아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몇 번을 입술을 달싹이던 미아의 눈에서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저…… 아니라고…… 말했는데.”

지로티 공작이 씁쓸한 얼굴로 미아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그랬다고 들었네. 키토 후작은 사람이 좀 융통성이 없지. 그 나름대로는 충성심이긴 하겠지만…….”

“나도, 아딜…… 좋아하는데. 반역……, 아닌데…….”

“이해한단다.”

“저, 억지로 끌려간 건데…… 싫다고 했는데…….”

“그래. 셀레스티얼 백작 그 인간이 제 딸을 어찌나 세게 잡았는지 팔에 멍도 들어 있더구나.”

“저 아닌데……. 진짜 아닌데……. 만날 사람만 만나고 돌아가려고, 했는데…….”

“그래, 그래.”

“으아앙…….”

미아가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저 진짜 나쁜 사람 아니란 말이에요…….”

그동안의 설움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낯선 세계에 떨어져 애썼는데, 상황은 늘 꼬여만 갔다. 그런 와중에 몸이 크게 상하니 애써 버티고 있던 정신력이 무너진 느낌이었다.

지로티 공작은 젖은 가제로 미아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래, 맘껏 울게나. 억울할 만 허이…….”

“흑, 흐윽…….”

“아이고, 아가……. 예쁜 얼굴이 반쪽이구만.”

미아가 지로티 공작의 도닥거림을 들으며 울컥한 마음을 진정시킬 때였다.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지로티 공작이 누워서 움직이지 못하는 미아 대신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

“접니다, 지로티 공.”

페르디안이었다.

지로티 공작이 미아를 흘끗거렸다.

“괜찮겠나?”

미아는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곧 페르디안이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수척한 얼굴로 울고 있는 미아를 보았다. 잿빛 눈이 흔들렸다.

“지로티 공. 자리를…….”

“응? 난 의원이라네. 환자의 상태가 좋지 않은데 자리를 비울 순 없지.”

“…….”

페르디안이 한숨을 내쉰 뒤 침대로 다가왔다. 그사이에도 미아는 페르디안을 보지 않고 있었다.

“……목격자를 통해 들었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누군가 너를 억지로 겁박했고, 너는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고 하더군.”

“…….”

“……내 실수다.”

진심 어린 목소리였다. 다른 곳을 보고 있던 미아가 그제야 고개를 돌려 페르디안을 보았다.

눈물에 젖은, 맑고 순한 분홍색 눈이었다. 하지만 그녀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페르디안온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후작 각하의 방식은 비겁해요.”

예상치 못한 말에 페르디안이 멈칫했다.

“……뭐?”

미아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이어 말했다.

“제가 진짜 첩자라면 상관없어요. 하지만 만약 정말 무고한 사람이었으면요?”

“그건 미안하게 생각…….”

“사과하고 끝인가요?”

“물론 보상을 원한다면 해 주겠다.”

“그렇게, 흐읍……, 말씀하시겠죠.”

너무 흥분한 탓인지 갑자기 호흡이 턱 막혔다. 미아가 잠시 가슴을 붙잡은 채 인상을 썼다.

그러자 옆에 있던 지로티 공작이 걱정 가득한 눈으로 미아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아가, 무리하진 말아라.”

“괜찮아요…….”

미아가 서글픈 눈으로 페르디안을 올려다보았다. 그 단호하고 올곧은 시선에 페르디안은 어떠한 변명도 할 수 없었다.

“후작 각하는 제가 아무 힘도 없는 사람이라 그렇게 행동한 거예요. 만약 제가 권력이 있고 힘이 있었다면, 제가 무고한 사람이었을 때의 여파가 두려워서라도 그렇게 하지 않았을 거예요.”

이어지는 말에 페르디안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지로티 공작은 묘한 얼굴로 미아를 응시했다.

“후작 각하는 알고 있었던 거예요. 설령 상대가 죄가 없다고 밝혀져도, 누구도 키토 후작에게 함부로 억울함을 토로할 수 없다는 걸.”

“…….”

“후작 각하는 후작 각하의 신분과 가문을 믿고 정의를 휘두른 거예요. 그 정의에 누가 맞아 죽든…… 전혀 신경 쓰지 않고서.”

페르디안은 충격받은 얼굴이었다. 그는 뭔가를 말하려는 듯이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미아가 실소를 흘렸다.

“제가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도…… 결국, 아딜 덕분이고요. 흐읍, 하아…….”

한꺼번에 너무 많은 말을 하게 되자 미아의 안색이 삽시간에 창백해졌다.

“흠, 흠! 이 아가씨는 쉬어야 하네. 키토 후작, 이만 나가게나.”

결국 지로티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후작. 이야기를 더 하고 싶겠지만, 지금은 아니네. 이건 의원으로서의 처방일세.”

“……예.”

단호한 말에 페르디안은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마지막까지 미아를 바라보긴 했지만, 지로티 공작이 눈을 부라리는 통에 결국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방을 나섰다.

탁.

“…….”

페르디안이 나가고 나서야 미아의 호흡이 돌아왔다. 짜증과 화가 한데 밀려들었다.

‘정말 다 꼴 보기 싫어.’

미아는 또다시 나오려는 눈물을 참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안다는 듯 지로티 공작이 미아의 이마를 토닥여 주었다.

“그런데 아가. 혹시 폐하가…… 자네를 어떻게 하겠다 말씀하시던가?”

멍한 얼굴의 미아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아딜로트를 떠올렸다.

‘날 아직 의심한다고 했지.’

다시 마음이 우울해졌다.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살려 두시고는 있지만…….”

“흠, 흠! 그렇단 말이지…….”

지로티 공작이 씩 웃었다.

“어디 보자……, 셀레스티얼 백작가는 귀족 명부에서 이름이 지워졌겠지?”

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반역이란 중죄를 저질렀기에 셀레스티얼은 멸문당했다. 미아가 셀레스티얼의 성을 사용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럼, 만약 폐하가 자네를 살려 주고, 자네가 무사히 ‘애완동물’에서 풀려난다면 말이네…….”

지로티 공작이 씩 웃었다.

“혹시 지로티 공작가를 맡아 볼 생각은 없나?”

뜻밖의 제안에 미아의 눈이 커졌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지로티 공작가는 후계자가 아직 없다네. 그래서 밖에서 데려올 생각을 하고는 있었는데, 자네가 딱인 것 같구만.”

당황한 미아가 눈만 깜빡이다 겨우 답했다.

“하지만 저는…… 아무 능력도…….”

“아니. 난 자네가 아주 잘할 거라고 생각하네.”

짧게 대답한 지로티 공작이 곧 자기 무릎을 치며 호탕하게 웃었다.

“솔직히 난 자네가 그렇게 바로 ‘할아버지’하고 부를 줄은 몰랐네. 그런데 그러는 걸 보고, 요놈 참 뭘 해도 될 놈이구먼, 싶었지 뭔가?”

“그건…….”

“지금 대답하란 건 아니네. 자넨 환자니 쉬어야지.”

지로티 공작은 그렇게 말하며 향을 피웠다.

수면과 관계된 향인지 금세 졸음이 몰려왔다. 미아는 지로티 공작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잠에 빠져들어 갔다.

“뭐, 일단 폐하가 자네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두고 봐야 아는 일이지만 말이야…….”

* * *

2주가 더 지나자 미아의 몸도 많이 회복되었다. 그녀는 느리게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래도 아직은 성치 않았기 때문에 하루의 대부분을 잠으로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미아는 눈을 떴다. 인기척 때문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아딜로트가 창문 턱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었다.

흰 토가 차림이었다. 벌어진 앞섶을 신경 쓰지 않고 무심히 손에 든 서류를 살피는 모습이 사무치게 아름답고, 또 묘하게 색정적이었다.

“깼어?”

아딜로트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어둠 속에서 그의 눈은 불이 들어온 것처럼 반짝이는 빨강이었다.

미아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러다 눈 나빠져요, 폐하…….”

잠시 멍한 얼굴을 했던 아딜로트가 실소를 흘리며 서류를 내려놓았다. 그는 천천히 일어나, 미아가 누워 있는 침대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미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가, 망설임 끝에 그것을 추슬렀다.

“미아.”

약한 한숨과 함께 그가 말했다. 미아는 멈칫했다. 아딜로트가 자신을 이름으로 부르는 건 드문 일이었다.

“키토 후작이 실수를 했더군.”

키토 후작.

아딜로트는 페르디안과 같이 자랐기에, 보통은 그를 이름으로 부른다. 그렇지 않았다는 건, 아딜로트가 지금 황제의 입장으로 말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랫사람의 허물은 윗사람의 책임이지. 원하는 게 있다면 들어줄 테니, 말해 봐.”

아딜로트가 어둠 속에서 말했다. 그 말에 미아의 머릿속에는 많은 생각이 오갔다.

‘풀어 달라고 할까?’

여기를 나가, 먼 곳에서 혼자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면 어떨까.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소설 속 세계에서 살아남는 것이야말로, 미아가 가장 간절히 바라던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황태후가 이미 내 얼굴을 봤어.’

그처럼 집요한 여자라면 어떻게든 자신을 찾아내 패로 써먹을 게 분명했다. 과정이야 어쨌건 미아는 이미 아딜로트와 한배를 탔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황태후를 막기 위한 방책을 요청하는 것이 좋았다. 그게 미아 자신이 살길이기도 했으니까.

아니면 아예 죽이지 말아 달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미아의 최대 목표는 늘 생존이었으므로.

그런데.

“…….”

미아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러고 싶지 않아.’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이 있었다. 이성적이지도 쓸모 있지도 않은 욕심꾸러기 같은 말이었다.

“하하…….”

미아는 맥없이 웃어 보기도 했다. 아딜로트가 뭐라도 말하면, 평소처럼 웃으며 ‘황궁 출입 허가!’ 하고 외칠 생각이었다.

그러나 아딜로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묵묵히 기다렸다.

“…….”

“…….”

그러다 달빛이 구름에 가린 순간, 미아는 결국 속에 든 말을 꺼냈다.

“나 좀…… 믿어 주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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